한 시간이 지나고서야 세이자는 무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때까지는 듣고싶지도 않던 일원의 소개라던지, 말하고 싶지도 않은 오게 된 경위라던지. 전부 설명하고 설명받아야 했기에 당연히도 정신적으로 지쳐버린 상태였다. 그래도 지낼 방을 배정받게 되니 정말로 해방이구나, 하고 세이자는 느꼈다. 누워서 긴장을 풀자 느껴지는 문 밖의 인기척만 아니었다면 정말로 그랬을 것이다.
"아, 하하…."
쾅! 하고 문을 열자마자 녀석들은 황급히 도망치거나, 문틈새를 엿보는 자세 그대로거나, 머쓱한 웃음이나 하고 있었다. 한둘이라면 모를까 셋이서 우르르 몰려들어서. 값진 휴식마저 방해받아버린 세이자는 참으로 싸늘한 시선을 유지중이었다.
"……."
"그, 그게 말이죠, 모두들 아직 궁금한 게 많다보니까요. 더 알고 싶어서 있었달까…."
결국 옆에서 허리를 쿡쿡 찔리며 수장으로서의 책임을 강요당한 쇼가 볼을 살 긁으면서 총대를 맸다. 이르길, 단편적인 질답일 뿐이었기에 모두는 아직 만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세이자야 물론 지칠 정도로 대답해줬었다만, 그건 열 명쯤 되는 다수가 만족하기에는 양이 부족했던 게 문제였달까.
"쇼 말이 맞아요. 앞으로 좀 오래 지낼 사인데, 이렇게 서먹서먹해서야 되겠어요? 용무 끝났다고 뿅! 하고 사라지다니."
"…오래 지낼 사이라면 앞으로 서먹서먹하지 않게 지금 정도는 쉬게해주지 그러냐. 피곤한데."
"피곤해요? 그러면 옆에 있는 온천이라도 갈래요? 피로에 좋은데."
무라사는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어떻게 해도 자신들과 어울리는 쪽으로 주제를 틀어버려 더 이상 빠져나갈 길이 없다는 걸 세이자는 눈치챘다. 그러다보니 말대로 온천이나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온천욕을 끝난다면 녀석들도 뻗을 테니 더 이상 참견받지 않을지도 몰랐고.
"…뭐, 그래."
"오 순순히 오는군요! 좋아요, 가보죠!"
순순히 따르는 세이자가 마음에 들었는지 무라사는 손을 잡곤 기운차게도 나아갔다. 따라오는 쇼와 이치린은 그녀들 옆으로 착 달라붙어 치근덕대기 시작했다.
"초입으로서 궁금한 거라던가 있어?"
"…그다지."
머리를 헝클이며 의욕없어하는 세이자를 보던 이치린은 턱을 쓰다듬으며 선배로서의 위광을 좀 보이고자 했다.
"아아, 초입이니까 뭘 물어봐야할지도 모르겠구나? 설명해줘야겠네."
"……."
전혀 아니다.
"일단 우리는 명목상 절이야. 그렇지만 그렇게 규율이 빡빡한 편은 아니지. 바깥과 비교해도 너그러운 편일걸? 수행도 단체로 할 때 정도만 참여하면 되고 그 이외에는 개인적으로 하라 그러니까."
이건 나름 귀가 솔깃한 정보였다. 일단 수행과 갱생이라는 명목으로 묘렌사에 떠넘겨졌기에 개인적인 시간도 없을 줄 알았는데, 누구의 감시도 받지 않고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있다니까 말이다. 관심조차 그다지 주지 않던 방식을 바꿔 이치린의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치린은 반응이 기분 좋았는지 더욱 의기양양하게 얘기했다.
"평소에는 고기를 먹지 말라던가, 싸우지 말라던가, 술을 마시지 말라던가. 그런 게 있긴 한데, 지키기만 하면 언니도 그렇게 뭐라 하는 성격은 아니야."
"나쁘진 않구만."
"그렇지? 아 그치만 꼭 명심해야 될 게 있어."
"뭘?"
"연회 때가 아니면 절대 고기랑 술은 먹지 마. 절대로야."
이치린은 갑자기 정색하고 그 소리를 했다. 그 모습은 단순한 엄포라기보단 복합적인 무언가처럼 보였다. 이를테면 공포와 두려움의 혼합 같은.
참고있어도 떨리는 이치린의 얼굴을 보면서 세이자는 미심쩍음을 느꼈지만 일단은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벌써 욕탕에 도착해있었다. 세이자는 말을 잊고 노곤한 몸이나 빨리 풀고 싶었다. 하지만 들어가는 문은 도통 열리지 않았다. 한참을 낑낑대봐도 그건 마찬가지. 아무리 힘을 줘봐도 무리여서 세이자는 헉헉대다 기어코는 포기해버렸다. 설마 수련하겠답시고 문 무게를 평균의 수십 배로 해놓는 건가.
뒤따라오던 이치린은 세이자를 살짝 가소로움과 아련이 섞인 눈치로 보면서,
"……이거 미닫이야."
"……."
지금까지 문은 다 여닫이였으면서 왜 이것만?
욕탕 내부는 희뿌연 김 투성이였다. 하도 자욱해서 눈 앞만 간신히 구분될 정도였다. 지령전 사태 때 솟아났던 온천수를 끌어다 쓰고 있는 거라는 쇼의 설명이 들려왔다. 간헐천이 솟아났던 게 딱히 하쿠레이 신사에만 국한되었던 게 아니라, 끌어오는 데 그렇게까지 용쓸 필요도 없었다더라.
출처가 어찌되었건 몸을 담그는 게 먼저였다. 풍덩, 하며 과장되게 물이 튀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와도 세이자는 천천히 발부터 들였다. 물에서 목만 삐죽 빼고 그대로 등을 기댔다.
"……후우."
세이자로서는 분명 오랜만에 느껴보는 느긋함이었다. 자신은 이제껏 쫓기고 도망칠 뿐인 아마노자쿠였기에 익숙하지 못한 것이 당연했다. 느긋함이라는 형용은 변혁을 바라는 아마노자쿠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것이었다.
뛰고, 도망쳐서 격정되는 게 아닌, 차근차근히 단계를 밟아 기분좋게 오르는 심장의 박동도. 노곤하고 축축한 기분이 몸을 덥히는 것을 만끽하는 것도. 모두가.
이제까지 괄시하고 억압해두었던 피로가 물에 녹아 단숨에 몸에 퍼져서, 세이자는 꼼짝하지도 못한 채 있었다. 지금까지 느껴왔던 무력감과는 전혀 다른 정의의 맥빠진 기운만이 뇌 속에 가득했다. 들썩 고개를 들어올려봤지만 어쩐지 멍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고, 세이자는 그래서 자신에게 엉겨있는 끈적한 감촉을 떼낼 수가 없었다. 풀썩 쓰러지듯 등을 기댄 채 힘을 빼고 있을 뿐으로, 그러다보니 서서히 미끄러져서 간신히 빠져나와있던 목마저도 서서히 물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과연 레지스탕스인 자신에게 이런 여유가 허락되도 되는 걸지.
이렇게 고분고분하게 순응할 뿐인 삶이 허락되는 걸지.
또 그렇게까지 해서 고요를 얻어야만 하는지.
"음? 얘 어디갔어?"
"글쎄요? 어……,"
어쩌다 나온 이치린의 말에 쇼는 손으로 챙을 만들며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곧 물 속에 잠겨있는 세이자를 봤지만, 아 잠수하고 있구나 생각해서 별로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조용히 굴던 듯 싶던 세이자가 저렇게 노는 걸 보곤 귀엽다고 생각해 놀래킬 생각으로 똑같이 물에 완전히 잠수하곤 다가갔다. 하지만 세이자가 눈앞에 자신이 와도 전혀 꼼짝않고 있자 그제서야 이상한 걸 느끼곤 고개를 갸웃였다. 눈이 완전히 풀려있단 걸 눈치채고서야 다급하게 그녀를 물에서 꺼냈다.
"자, 잠시만요? 왜 정신을 잃은 건데요? 예?"
"우왓, 뭐야? 쇼, 뭔 짓을 한 거야!?"
"아니아니, 제가 했다뇨…! 이럴 때 보통은 무라사를 의심하지 않나요?!"
"절 의심하는 거예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아아, 모르겠어요! 빨리 와서 도와주기나 해요!!"
맥박을 살펴보자 다행히 정신을 잃었을 뿐이었다. 쇼는 그래도 불안이 사라지지 않아 무라사를 불러 혹여나의 비상사태를 대비했다. 무라사가 호응하듯 나무국자를 짧게 휘두르자 세이자가 움찔거리더니 곧 물을 크게 토해냈다. 쇼는 그제서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세이자를 부축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괜찮아요?"
"…아무것도."
초점을 한동안 맞추지 못하던 세이자는 머리를 쓸어넘기면서 잠시 숨을 골랐다. 희미한 숨소리로 신호를 내다 덜컥 일어나더니,
"됐어. 어지러워서 그럴 뿐이야. 너무 피곤해서 그러니까 먼저 자러간다."
어쩐지 착잡한 세이자의 표정을 본 쇼는, 그녀를 부축해 데려다주는 것 말고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도레미 스위트는 맥이다. 맥이라 함은 꿈을 먹는 요괴다. 그렇기에 그녀의 거주지는 꿈의 세계이고, 그 세계와 그곳에 찾아오게 되는 주민들을 관리하는 것이 그녀의 일이다.
가끔씩 현실의 주민들이 꿈의 세계를 찾아오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것은 극소수이고, 보통의 경우엔 꿈의 주민이 방문객의 대다수다. 현재 도레미를 찾아온 사구메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도레미? 나, 나 뭐 이상한 건 없었을까? 이상한 말 같은건 하지 않았겠지? 응?? 괜찮았겠지?"
"…괜찮지 않을까요. 정말로 싫었다면 내쳤을 테니까요."
"ㄱ, 그러려나? 그러면 다행인데!"
양 볼을 감싸안고 춤까지 추는 사구메를 보는 도레미의 눈에는 어쩐지 힘이 빠져있었다.
꿈의 주민은 기본적으로 감정표현을 강하게 한다. 감수성도 풍부한 편이다. 원본이 되는 현실의 존재가 무의식적으로 품고있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에, 순도높은 감정의 표현을 저절로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위상 높은 달의 존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는지, 꿈의 사구메를 만나고 있는 도레미가 한창 진땀을 빼는 중인 이유기도 했다.
'얼마나 좋으시길래 저렇게까지…….'
원래의 사구메는 이렇게 활달한 성격이 아니다. 생사가 달려있던, 꿈의 세계의 영지를 빌려 달의 도시를 이전시켰을 때도 거의 무표정 일관이었던 사구메의 얼굴을 도레미는 옆에서 똑똑히 목격했었다. 하지만 지금 있는 사구메는 꿈의 주민이기 때문인지, 과장은 기본이요, 한 발을 들고 빙빙 돌아대는 기괴한 행복의 표시까지 춤까지 추고 있지 않은가. 도레미 안에서의 사구메의 이미지가 와장창 깨져버리는 순간이었다. 면전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화창하게 웃는 사구메는 절대 도레미가 알던 사구메가 아니었다.
"도레미가 보기에 세이자는 어때? 귀엽… 이건 솔직히 내 감상이니까 아니려나 헤헤…."
"……일단 잠시만 떨어져 주시겠나요. 부담스럽네요…."
이렇게 볼을 부비부비대는 사구메는 내가 알던 사구메가 아니라고.
"으음, 미안해. 하지만 말이야, 흥분되서 어쩔 수가 없는걸. 아… 정말로,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도레미가 협력해줘서 말이야."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고마워, 응. 정말로. 싫다싫다, 투정부리지만 부탁하니까 해줬잖아. 너무 고마운걸."
"네네… 알았다니까요."
"좋아해 도레미!"
"자, 자자잠, 잠깐만요!! 왜 거기서 그 말이 나오는 건데요!? 아니, 달라붙지 마요! 저리 가라니까요!!"
다시 달라붙은 정도로 안긴 사구메를 도레미는 겨우 떨어트렸다. 도레미는 숨이 찰 정도로 뒤로 물러나면서 다시 다가오려는 사구메를 부릅뜬 눈으로 봤다. 떨어진 사구메는 손을 모아 움찔움찔, 살짝 몸을 꼬고 있었다. 저거 뭐야, 진짜 뭐야. 도레미는 생각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낯간지러운 짓을 하셨다고!! 아아 진짜! 적응 안 되잖아요!"
"왜, 도레미는 나 싫어?"
"……아니, 잠시만요, 진짜로요, 기다려보세요. 왜 그쪽으로 이야기가 넘어가는 건데요."
"싫은 거야?"
"……아아, 몰라요! 예! 싫어요! 싫어! 멋대로라서!!"
모르고 도레미는 버럭 소리질러버렸다. 발언에 충격받은 사구메는 꼬인 손을 풀더니 더 이상 도레미를 보지 못하고 고개숙인 채 꼼지락대는 검지손가락만 서로 부딪히고 있었다. 마음이 약해진 도레미는 사구메를 보지 못하다가 아까전처럼 버럭 소리질렀다.
"아아! 왜 그렇게 마음에 담아두는 건데요! 아뇨, 좋하애요!! 이제 됐나요!"
"아 도레미 혀깨물었다."
"전언 철회! 사구메 씨 정말 싫어요ㅡ!!!"
한참을 씩씩대며 피한 도레미는 결국 헤실헤실 웃는 사구메의 모습을 버티지 못하고 화를 풀었다. 사구메는 도레미의 화가 풀린 걸 알자마자, 아니 알자마자라기보단 화가 풀릴 때까지 해왔던 것처럼 말을 걸어왔다.
"도레미가 보기에 세이자는 어땠어?"
"어땠달까, 랄지. 그런 거 따져야 하나요…."
"내 딸인걸. 궁금한 건 당연한 거야."
"……그렇다면 이해하겠는데, 그걸 왜 며칠이 지난 지금에서야 묻는 건지도 참…."
진빠진 얼굴로 묻던 도레미는 사구메가 며칠 동안이나 이곳을 찾지 않던 이유를 갑자기 궁금해하게 됐다. 꿈의 세계의 사구메와 만나는 것은 도레미로서는 처음이었다. 달의 그녀와 얼굴을 튼 지는 거진 반 년이 되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꿈의 주민이 찾아오는 걸 억제하고 있었던 건지, 궁금해하던 도레미에게 사구메의 답이 들려왔다.
"그야 이쪽으로 찾아오고 싶어도 못 찾아왔으니까."
"네?"
"여유가 없었는걸. 벌써 사흘째 철야중이니까."
"죽는다구요!?"
"괜찮아, 감수할 수 있어."
"아니아니, 뭐가 감수할 수 있어에요! 죽으면 말짱 도루묵인데!"
"얼른 밀린 업무를 끝내고 다시 세이자를 보러 가야 하니까."
도레미는 미쳤다는 눈으로 사구메를 봤다. 자세히 보다보니 사구메의 눈 밑의 기미가 유독 심해진게 느껴졌다. 지금까지는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신경사납게 구는지라 알아보지 못했던걸지.
"그, 그정돈가요……. 딸에 대한 열정이란 게."
"이제까진 못해줬으니까, 지금부터라도 더 잘해주고 싶어서."
"……."
침묵하는 도레미는 사구메의 열정이 그 정도까지인 것에 놀라고 대답해주기로 했다. 도레미가 봤을 때 세이자는 연약해도 그 본면을 숨기려는, 외강내유의 인물이었으나 그대로 말한다면 혹여나의 오해나 착각이 생겨날까 나름의 포장을 더했다. 딸 이야기만으로 기쁜 건지 사구메는 히히덕대고 있었다.
"아, 도레미. 온 이유가 또 있긴 한데…."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사구메를 보며, 도레미는 저게 과연 뭘까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일처리에 대한 보답같은 걸까? 현실의 사구메는 묵묵해서 그렇게 보답이나 은혜에 연연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던 지라, 꿈의 사구메라면 뭔가가 다를까 약간의 기대를 가졌다. 난생 처음 사구메에게 받는 선물일지도.
"좀 오래 철야하는데도 아직 일이 안 끝나서 말이야. 세이자를 만날 수 있게 일 좀 도와주라!!"
"안 도와줘요!!"
주머니에서 터져나온 서류의 더미를 보며 도레미는 기대한 자기가 잘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IP보기클릭)211.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