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사 누나는 저럴 때가 많아요?"
"꼼꼼하다고는 못하겠지만,더도 덜도 말고 딱 남들만큼 실수하지."
마리사는 린노스케에게 어떤 책을 요구했지만 린노스케의 말을 듣고 곧장 자신의 집으로 뛰어갔다. 문제의 책은 마리사가 좀 봐보겠다면서 집으로 가져가놓고 그걸 까먹은 것이었다. 바바박하는 발소리가 사라지고 조금 뒤,계산대의 의자에 앉아 있던 두 사람 사이에서는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리사 누나는 무슨 책을 찾으러 간 거예요?"
"음,잠깐 따라와 보겠니?"
린노스케가 일어나자 마루도 일어나 뒤따라갔다. 한 진열대에 다다른 린노스케는 어디였나 하면서 선반 곳곳을 더듬어가면서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마루는 마루대로 선반 위의 물건들을 구경했다. 먼지가 쌓여가고 있는 오래된 책,묘한 감상이 느껴지는 목제 골동품,전체인지 일부분인지 용도도 짐작하기 어려운 전자기구. 그래도 나름대로의 진열 규칙 덕분인지 난잡함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린노스케는 책 한 권과 조그만한 물건 네 개를 찾아서 집어 들면서 다시 계산대로 돌아갔다. 주변에 더 오래된 것 같은 물건들이 많아서인지 책은 시간에서 오는 특별한 느낌이 덜했다. 또 다른 물건은 여러 가지 새의 머리와 문양이 새겨져 있는 나무 토템들이었다. 다시 자리로 돌아온 마루는 이건 어떤 새일까 생각했다. 맹금류의 날카로운 눈 8개가 마루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이 책은 먼 옛날에 제사장이 썼던 일기장. 날씨나 제사 계획,일정 같은 게 적혀 있어. 이건 보다시피 토템들."
"토템에다가 제사요?"
"기우제가 뭔지는 알지? 마리사가 급하게 가지러 간 책의 내용은 그거랑 비슷한 거야."
"음...잘 모르겠어요."
린노스케는 살짝 웃으면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내용을 읽으려던 마루는 고개를 갸웃했다. 일기장이라기에 깔끔할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그 내용은 꽤나 난잡했다.
글씨가 지저분한 건 아니지만 일기와 함께 여러 문양과 그림들도 잔뜩 적혀 있었다. 린노스케는 제단 위에 토템,제물 등이 배치되어 있는 그림을 짚으면서 말했다.
"이렇게 의식을 올리는 등의 주적 행위로 자연과 길흉화복을 바꾸는 걸 보통 주술이라고 부르지. 제사장들은 이런 걸로 날씨를 바꾸는 게 주된 일이었고."
"잘은 모르겠지만 마법이랑 비슷한 거 같네요. 근데 이런 건 왜요?"
"마리사가 마루한테 뭔가 가르쳐주면 좋을 거라고 했거든. 처음에는 마법을 가르쳐 줄까 했는데..."
"했는데요?"
"자기는 남 가르치는 실력은 별로인 것도 있고,마법보다는 다른 게 좋을 거 같다면서 고른 게 바로 이거야."
마루는 책을 슬쩍 넘겨보다가 토템을 규칙적으로 세워보았다. 제단이 있을 위치에는 손가락으로 가상의 사각형을 그리자 책의 배치와 나름 비슷했다.
"별로 감흥이 없는 거 같은데. 정말 이렇게 한다고 되는지 의심스러운 거구나."
"어...정확하게 맞추시네요. 맞아요..."
"괜찮아. 마리사도 처음엔 그랬거든."
"네?"
"어렸을 적의 마리사도 처음엔 마법 같은 게 되긴 하는 거냐고 투덜댔었거든. 그랬던 마리사가 지금은 어떨까?"
"음,주술이랑 마법은 다르지 않을까요?"
린노스케는 딱히 반문하지 않았다. 살짝 웃으면서 말하는 게 그냥 농담이었다는 걸 알아차렸으니까. 마루는 부엉이가 조각된 토템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주술 같은 걸 배우는 게 좋다고 한 건 왜인지 알아요?"
"마루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들었거든. 이런 거 말해도 괜찮니?"
"...괜찮아요. 그때만 조금 힘들었고,지금은 그렇게 신경 쓰이진 않아요."
타인을 안심시키려는 거짓말은 아니었다. 린노스케는 믿고 따를 수 있는 사람들 덕분일 거라 확신했다.
"그래. 왜 그랬냐 하면,마리사는 마루가 기억을 잃은 일 때문에 힘들어하는게 마음에 걸렸어."
"그거 때문이라고요...?"
"어려울 수는 있지만,이런 걸 익히면서 시간을 보낸다면 그런 일은 조금 잊을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구나."
'그렇구나'라고 말하는 것처럼 마루는 배시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린노스케는 그렇게 웃고 있는 마루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마리사가 가져올 것을 생각하며 기대감을 키우던 마루는 좀 전에 들었던 발소리를 들었다.
조금 뒤 문을 박살낼 기세로 밀어 여는 소리와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하지만 문을 열 때의 기세와는 달리 마리사는 꽤나 힘들어 보였다. 그렇게 크지도 작지도 않은 책 두 권을 옆구리에 낀 채로,문틀에 기댄 마리사는 숨을 고르려고 애를 썼다. 마루는 서둘러 다가가 마리사를 부축하려고 애썼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 걸 보니 엄청나게 뛰었나 보다.
"그렇게 급하게 다녀올 필요는 없었는데,괜찮아요?"
"그냥...으으. 오랜만에 좀,뛰어본 거야...헉헉."
...
원래 린노스케는 마리사가 외상으로 물건을 가져가도 별 말 안 하는 편이었다. 지금 당장 외상값을 받아낼 생각도 없었다. 린노스케는 그저 장난으로 마루 앞에서 마리사의 신용불량을 문제 삼으면서 놀렸다. 마루에게 모범적이지 못한 점을 들켜서인지 마리사는 조금 쩔쩔맸다. 마리사가 놀림당한 값으로 받아낸 책 두 권은 슬프게도 지금 마루의 머리 아래에 깔려 있었다. 15분 가량의 실랑이 끝에 마루는 책 표지 위에 얼굴을 박고 좌절했다. 책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를 맡은 마루는 책을 읽는 게 아니라 맡아서 이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어려워요...뭐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읽을 수는 있지만 말 그대로 읽을 수만 있었다. 책의 난잡한 글들은 마루를 흐느적하게 녹여버렸다. 마리사도 린노스케도 예상한 반응이긴 했다. 이런 종류의 책들 중 쉬운 건 없다. 게다가 읽는 요령이 중요하다 보니 익히는데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힘이 빠져서 축 늘어져버린 모습이 웃겼는지 마리사는 실실 웃으면서 마루를 일으켜 다독였다. 그 격려에는 나름대로 경험자의 관록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처음이 가장 어려운 법이고,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그렇다고 믿고 싶어요...마법이 전문인 건 알지만,조금 도와주실 수 있죠?"
"아무렴,얼마든지 도와줄 테니까 이제 힘 좀 내 보자."
그래도 마루는 이런 선물을 받아서 기뻤다. 마루는 책을 끌어안은 채로 허리를 숙여 린노스케에게 인사하면서 마리사를 따라 향림당을 나왔다. 숲의 찬 공기 덕분에 마루의 머리가 다시 단단해졌다. 정신이 좀 들자 마루는 궁금했던 걸 물어봤다.
"그러고 보니까 주술로는 구체적으로 뭘 할 수 있어요? 점장님이 말해주셨는데도 잘 모르겠어요."
"너무 많아서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지만...마법이랑 비슷할 거야. 주술사들은 바람과 불을 다룰 줄 안다고 들었고. 남을 저주하는 주술도 있다고는 들었지만 그건 안하는 게 좋겠지. 아무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저주만 빼면 멋있네요. 그런데 왜 굳이 마법이 아니라 주술을 배우라는 거예요?"
"일단 첫번째 이유가...마법보다는 쉬울 거야. 주술은 참고만 조금 하는데 마법보다는 쉬워 보이더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네요."
마루의 빠른 납득에 마리사는 웃음을 터뜨렸다. 마리사는 숨을 좀 고르고 나서야 이어서 말했다.
"흠흠,그리고...주술이 마루한테 더 어울릴 거야. 안전하기도 하고."
"안전? 그러면 마법은 위험해요?"
"마법은 실수하면 사고도 일어나고,재료 구하기도 힘들거든. 주술은 그럴 일이 적을 거야."
"그러면 저한테 어울린다는 건 왜요?"
"음...뭐라고 해야 할까.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어. 마루가 주술을 쓴다면 딱일 거라고."
근거가 좀 부족했지만 별로 상관없었다. 마리사와 마루는 함께 히죽거리면서 걸음을 옮겼다. 마루가 앞으로 하게 될 일이 늘어났다. 능력을 조절하는 것에 이어서 주술도 익혀야 한다. 쉽지는 않겠지만 왜인지 기대되기도 했다. 마리사한테 받은 선물이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