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텅 빈 머리 속에서 그나마 남아 있는 것들을 기억해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흙탕물 속에 빠뜨린 것을 찾는 것과 비슷했다. 아니, 하다 못해 그런 경우는 손의 촉각이라도 있다. 머리가 지끈거리도록 노력을 짜내 기억해낸 것들은 다음과 같았다.
"처음은 눈이 내리는 숲이었고,한참 걷다가 눈보라가 불기 시작했고...거기까지요."
티끌이나마 기억하고 있는 것 중 가장 처음은 지금으로부터 수 시간 전 정도였다. 이름도,나이도,아는 사람도,어디에서 살았는지도 기억이 없다. 해 줄 수 있는 일이 적었던 마리사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기억상실의 이유에도 주목했다.
"저체온증에 걸린다고 기억에 문제가 생기나? 아무래도 그건 아닐 텐데?"
"머리를 다쳤나? 하지만 그 정도 머리를 맞았으면 상처가 났을 텐데."
레이무의 말에 아이는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봤지만 상처 하나 없었다. 수 시간은 커녕 며칠 전의 상처도 없었다. 심각함이 가득한 탁상 위에서 오갈 곳을 못 찾던 신묘마루는 뭔가 머리에서 번뜩였다.
"주머니...?"
"주머니요?"
"네가 입고 있는 옷의 주머니. 비어 있을 수도 있지만 뭐라도 찾는다면 도움이 될까 해서..."
실망만 할 경우가 떠올랐는지 신묘마루는 말끝을 흐렸다.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레이무는 아이가 입고 있던 외투를 벽에 걸어 두고 있었다. 눈보라에 얼고 젖었던 외투는 서서히 말라가고 있었다. 레이무는 외투 안팎의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고 아이는 자기 몸 곳곳을 더듬기 시작했다. 아이는 아무 것도 찾지 못했지만 레이무는 성과가 있었다.
"있다!"
기억까지는 아니지만 일단 뭔가를 찾았다는 것 정도는 기뻐해도 좋을 것이다. 레이무의 손에는 작은 종이봉투가 있었다. 이런 건 보통 편지를 넣을 때 많이 쓰는 물건이었다.
더욱이 봉투는 비어 있지도 않았다. 누가 봐도 편지봉투였다. 종이가 부서질 일은 없지만 레이무는 조심스럽게 내용물을 꺼냈다. 지금으로선 이 편지가 가장 중요한 정보이자 단서일 것이다. 접힌 편지지를 펼치지 않은 채로 살펴보던 레이무가 말했다.
"혹시라도 너한테 온 편지라면 네가 먼저 읽는 게 맞겠지?"
편지를 건네받은 아이의 얼굴이 조금은 풀어졌다. 아이는 서두르고 싶은 걸 억누르면서 종이를 펼쳤다. 편지를 보던 아이가 미간을 찡그렸다. 기뻐한다거나 실망한다거나 했다면 납득은 됐을 텐데. 이번에는 종이를 회전시키기도 하더니 아예 앞뒤를 뒤집다가 다시 정위치로 돌아왔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이건 문맹인지 아닌지가 문제가 아니었다.
"네...이름은...내 이름? 마...루."
더듬더듬 읽으면서 나온 것은 바로 아이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세 사람은 기뻐할 수 없었다. 앞뒤를 뒤집었을 때 본 편지는 상태가 문제였다. 글씨를 지웠다거나 애매하게 쓴 정도가 아니었다. 글 위에는 동전만한 구멍을 곳곳에 뚫어놓은 것처럼 지워진 부분이 여럿 있었다. 그나마 있는 글씨들은 희미해서 제대로 보지 않으면 얼룩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도저히 제대로 읽을 수 없는 편지였지만 마루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면서 지금의 유일한 실마리를 읽었다. 손에서 스며나온 땀에 글씨가 흐려질 것 같아 손놀림도 점점 조심해졌다. 잠시 뒤 마루는 편지를 원래대로 접으면서 말했다.
"제 이름이랑 뭔가 전하려는 듯한 말 정도네요."
실망스러운 성과였지만 마루는 최대한 낙관적인 생각을 가졌다. 방금 전까지는 모든 게 백지였지만 지금은 자신의 이름,그리고 자신과 가까웠던 듯한 사람의 존재는 알아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마루는 접은 편지를 레이무에게 다시 내밀었다. 레이무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편지를 받았다. 신묘마루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마루의 손을 두드렸다. 위로의 행동이었다. 마루는 괜찮다고 말하면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레이무는 엉망으로 된 편지글을 보고 고개를 젓고는 원상태로 접었다. 시간이라도 되돌리지 않는 한 제대로 읽을 수 없을 것이다. 접힌 그대로의 편지를 이리저리 보던 레이무는 뭔가를 발견했다. 작지만 뒷면 귀퉁이 쪽에 확실하게 뭔가 적혀 있었다. 잘 살피지 않아 마루는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레이무는 그걸 마리사에게 보여줬다.
"이게 뭐야?"
"여기에,작게 적혀 있어."
마리사 또한 그 글귀를 읽었다. 작고 또렷하게,부드러운 느낌이 드는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그 아이를, 마루를 도와주세요.'
마리사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그 글귀를 바라봤다. 짧디 짧은 한 문장이 끝. 편지 상태는 왜 이 모양일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이 사람은 누구고 뭘 알고 있었을까. 이런 말을 남길 정도로 마루가 소중히 여기고 있으면 지금 어디 있는 거냐고. 사방은 답답하기 짝이 없는 상황 때문에 침묵으로 꽉 차 있었다. 침묵을 깬 건 조금 경박한 소리였다.
꼬오오오오옥
이런 소리는 보통 꼬르륵 소리라고 말하지만 이 소리는 조금 절박하고 피로가 느껴지는 소리였다. 마루의 배에서 나는 소리였다. 마루는 자기 자신한테 눈치가 그렇게도 없냐고 타박하고 싶었지만 그건 웃긴 짓이었다. 대신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냈다. 다른 웃음소리가 몇 번 더 새어나왔다. 레이무가 웃으면서 말했다.
"저녁 때도 됐네. 밥 먹자."
네 사람 모두 이 눈치 없는 소리를 기회 삼아 답답한 상황을 치워버렸다.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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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사는 마루의 나이를 눈대중으로 짐작해봤다. 저 정도 몸집에 외모면 10살, 혹은 그보다 조금 아래라고 생각했다. 마루는 어제에 비하면 한결 편해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야 좀 나이에 맞는 모습을 하고 있는 듯 했다. 지금 짓고 있는 얼떨떨한 표정도 어린애다웠다.
"정말로 날 수 있어요?"
"날 수 없었으면 어제 못 구했을 거야. 너무 빨리 날지는 않을 거니까 그렇게 무서워할 필요 없어."
"...떨어지거나 뒤집히진 않죠?"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허리 꽉 잡고 있어야 돼."
마리사는 자신의 빗자루 뒷쪽에 마루를 앉혔다. 마루는 죽어도 안 놓을 기세로 마리사의 허리를 단단히 잡았다. 두 사람을 태운 빗자루는 천천히 하늘로 떠올랐고,덩달아 하얘진 마루의 얼굴이 꽤나 볼 만했다. 레이무와 신묘마루는 가볍게 손을 흔들면서 이를 배웅했다. 비행의 출발지는 하쿠레이 신사,목적지는 인간 마을. 만에 하나,마루가 인간 마을에 있었다면 뭔가를 알아낼 수 있을 거라는 레이무의 추측이 이유였다. 레이무는 걱정이 담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부모님이든,친인척이든,하다 못해 아는 사람이라도 찾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마루는 착륙하기 전까지는 눈을 질끈 감고 있으려 했다. 하지만 사람은 호기심이 공포를 앞설 때가 있다. 물론 이럴 수 있었던 건 마리사의 비행이 안정적인 덕도 있었다. 눈을 뜨자 하얀 숲이 마루의 발 아래에서 빠르게 지나갔다. 질주에서만 느낄 수 있는 불어오는 맞바람은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마루가 이전에 어떤 삶을 살았든, 지금의 그에게 있어 이건 첫번째 비행이었다.
자신의 처지에서 비롯된 걱정은 모두 잊은 채, 마루는 지금 이 순간만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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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의 잡담-
리메이크 이전의 부분에서 '과거의 나야,이걸 이렇게 전개하면 어떡하냐.'하면서 후회했던 적이 있는데 리메이크를 하니까 더 나은 전개를 할 수 있어서 편-안하네요.
이전의 작품을 보셨던 분들께는 더 발전한 작품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그리고 안 보셨던 분들을 위해 스포일러 조심도 부탁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