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라. 좋지, 좋아."
남자의 고개가 홱 돌았다. 코 끝을 진하게 찌르는 연기 방향의 끝자락엔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한 여인의 모습이 있었다. 뭐가 그리 우스은지 입꼬리를 히죽 올리고 있는 여인은 물고있던 연초를 입에서 떼며 저벅저벅 걸어왔다. 위화감이랄지, 온몸을 곤두세우는 바늘같은 감각에 그는 흠칫하며 뒤로 헛걸음질쳤다. 그러다 도망치려 들었다. 눈 뜰 새 없이 일이 벌어진 건 그 때였다.
"안 되지. 어딜 가는가."
파샥! 하고, 던져진 곰방대가 남자의 손을 꿰뚫고. 여인은 웃고. 남자는 초마다 행해지는 그녀의 선고같은 발걸음 소리에 침묵만을 한다. 저도 모르게 동그래진 동공으로 그녀를 치켜보나 그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말이 없어졌군. 두렵기라도 한 겐가?"
"……."
"뭐어, 지금 상황에선 오히려 두렵지 않은 게 이상할 수도 있겠군. 이 아이의 감정을 빼앗았으니, 그만큼 과장도 클테고."
어느샌가 다가온 여인이 손을 꿰뚫은 곰방대를 뽑아 다시 입에 문다. 남자가 신음하자 '어이쿠야.' 하면서 비아냥을 했다.
"그러게 도망치려 들지 않았으면 뚫릴 일도 없었잖은가. 날뛰지 말고 가만히 있게."
"……뭐가 목적이지?"
"목적? 흠, 자네는 들어봤자 모를 텐데. 그래도 듣고싶다면 말해줄 수는 있지. 늙은이는 말이 많으니 말이야."
곰방대에 묻은 피를 살짝 음미하며 말하길.
"……아니야. 귀찮아졌네. 그냥 죽게나."
그녀가 눈을 가볍게 감았다. 남자는 '뭐…' 라는, 중얼이려는 남자의 말은 완성되지 못했다. 그의 배후에서 덮쳐든 검은 요기의 신형이 이미 남자의 목소리까지 집어삼킨 후였다. 여인, 마미조는 그의 최후마저 바라보지 않은 채 투정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이야기하다보니 짜증이 나서 말이지."
서재에 옅게 감도는 초침소리를 들으며, 마미조는 멍하니 쓰러진 코스즈를 고개숙여 바라보았다. 인간도, 요괴도 아닌 애매한 상태의 그녀는 의식을 깰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쓰러진 그녀를 다른 곳으로 눕혀놓거나 하기는 귀찮았다. 이와 비슷한 일도 벌써 손으로 꼽지 못할 정도로 경험하니 능숙해져선 그렇다. 어차피 그녀는 침몰된 자의식 속에서 욕망에 따라 생겨난 요괴로서의 인격과 다투고 있을 것이 분명하였으니까 금방 깨지도 않을 테고. 주도권 싸움이 한창 진행되는 동안에는 여유롭다. 마미조는 곰팡내나는 책장에 등을 기대고 연초에 불을 붙였다.
"…귀찮구먼."
변이가 잦아졌다. 이번 주에만 벌써 두어 번에 달할 정도였다. 그 일 이후로 정신상태가 허약해진 탓에 연약한 요마서의 요괴에게마저 인격을 집어삼켜질 정도가 된 탓일 거다. 그런데, 그토록 지주점이 없는데도 요기에 완전히 잡아먹히지 않은 건 단 하나의 이유때문일 거다. 면목이 없다는 것. 그녀의 자존감이나, 존엄 때문이 아닌 그저 그 이유 때문에. 코스즈는 그토록 싸워나가고 이겨내고 있는 거다.
하지만 힘겹게 이겨내는 것은 마미조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요괴와 인간의 중간과정같은 애매한 이 상태로썬, 마미조도 어떻게 조치할 바가 없었다. 온전히 코스즈, 그녀의 손에 맡길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니 유쾌하지 않다. 그러다 못해 불쾌하다. 차라리 모든 것을 놓고 한 요괴에게 의식을 집어삼켜진다면 마미조는 구호할 수라도 있었다. 그렇기에 미덥지 못한 인간에게 제 목숨을 좌지우지 시키는 이 일이 얼른 끝나야만 했다. 지금 코스즈는, 소녀의 연약한 몸으로 화마를 뚫어 누군가를 하나 구해야만 하는 상황과 비슷한 것이다. 어디있는지도 명확하지 않은 누군가를. 아무런 준비도 없이, 아무런 방비도 없이. 그렇기에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면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는….
"…도박수를 두기는 그렇군."
연초의 연기가 멎음과 함께 그녀의 눈동자가 돌았다. 도박수란 언제나 벼랑까지 몰렸을 때에나 사용해야 했다. 예를 들면, 눈앞의 소녀가 결국엔 죄책감으로 ■■이란 자신에게 있어서도, 환상향에게 있어서도 최악일 선택지를 고를 때 같은. 마미조는 그녀에게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며 정신적 지주가 되지 않으려는 움직임은 보였지만 그만큼의 궁지까지 몰려고도 굴지는 않았다. 죄책감은 고독 속에서 가장 효력있었으니까. 하지만 더 이상 내버려두었다간….
고심끝에 마미조는 길을 결정하고, 코스즈가 깰 때까지 기다렸다. 푹신한 마미조의 꼬리 위에서 행해지는 코스즈의 잠은 길었다. 부스스, 라는 느낌으로 깨었을 때는 시간이 한참 지나있던 뒤였다. 밤이었다. 보들거리는 감촉의 꼬리 위에서 번뜩 빛나는 너구리의 눈동자와 불꽃을 본 코스즈는 화들짝 놀라며 마른침을 삼켰다. 어느 때에는 만나기를 그토록 고대하던 요괴임을 알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그렇지 않았다.
"누, 누구..."
"몰라보다니 섭하구먼."
코스즈는 아직 모르는 요괴의 모습이다. 마미조는 잔존하는 불씨로 얼굴의 음흉한 웃음을 살포시 보이면서 공포감을 가미시켰다. 불씨가 찬찬히, 그녀의 아래로 향하자 코스즈의 시선도 따라갔다. 그런데 보인 것은.
"……!!"
이미 끈적히 바닥에 늘러붙은 피들과 목이 잘려있는 남자의 시체. 코스즈는 몸을 흠칫 떤 후엔 공포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공포감은 그녀에게 이 상황을, 이 대화를 절대로 잊지 못하게 해줄 거다. 마미조는 말한다.
"나라네, 후타츠이와 마미조."
코스즈, 자네는 이 늙은이를 도대체 어떤 눈으로 볼 건가?
"자네의 단골손님인데도 못 알아보다니 섭섭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