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자신이 여태껏 선택해 온 모든것들이 잘못된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을 했다.
어쩌면 이 모든것이 나쁜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인연이라는것이 이렇게 얄밉고 증오스러운 녀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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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향의 겨울은 고요하기 그지 없다. 살짝 열린 창문 틈새로 비춰지는 흰 빛은 이 세상의 마지막 소리 하나라도 잡아먹을 듯이 주변을 고요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고요함에 동조하듯 흰 눈에 눈이 곂치는듯 사박거리는 소리만이 귓가를 멤돌뿐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손에 들린 꽃을 들어보았다. 연분홍빛의 벚꽃가지였다. 겨울이 될때까지 시들지도 않고, 썩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다. 참으로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나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더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손에 쥐고 있으면, 마치 그녀의 온기가 손을 타고 전해져 오는듯 했다.
내가 어려서부터 그녀는 고귀하고,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그렇기에 더더욱 다가가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았다. 시간을 흐르고 흘러 어느새 내가 아버지의 일을 도와 가업을 물려받을 준비를 하게 될 무렵, 마치 약속이라도 한듯, 인연은 그렇게 다가왔다.
"실례합니다. 혹시 도지마씨는..."
그녀는 가게 안에서 다급하게 나의 아버지를 찾고 있었다. 나는 잠시 당황하여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짧은 연갈색 머리카락이 햇볕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기..."
그녀가 어느샌가 내 앞에 불쑥 다가와 나를 불렀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질 치다 등 뒤의 선반에 '쿵'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부딪치고 말았다. 욱신거리는 등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도...도지마씨라면. 우리 아버지를 찾는거야?"
"아버지...혹시 아드님이세요?"
"응. 아버지라면 잠시 일이 있으시다고 건넛마을로 내려가셨는데. 아마 하루 이틀쯤 지나야 다시 돌아오실거야...왜. 뭐 필요한거라도?"
그녀는 안절부절 못해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아닌 이상 곤란한 모양인것같다. 하지만 나도 나름 아버지께 배운게 있다.
아버지는 나에게 일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것을 정성을 들여 가르쳐주셨고, 나는 마치 마른 수건처럼 아버지가 알려주신 모든것들을 게걸스럽게 받아들였다.
"아버지가 없더라도 걱정하지마. 나도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있어."
"그런가요?"
그녀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동안 주변이 환해진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시간마저 멈춘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이교우지 유유코지? 저기 사이교우지 가문의 큰 저택에서 살고 있는."
"아...맞아요. 알고계시네요"
그녀가 짐짓 놀란듯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히죽 웃으며 자신있게 말했다.
"그렇지? 가끔 아버지 일 도울때부터 죽 봐왔어. 아니 더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면 더 오래전부터...아주 어렸을때부터. 네가 어렸을때...내가 어렸을때..."
그녀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머쓱하게 턱을 긁적거렸다. 손가락 끝으로 수염이 따끔거리며 느껴지기 시작했다. 면도를 안한지 일주일정도 지났다는것을 깨달은것을 방금 알게 되었다.
"그러면 도지마...어...음..."
"도지마 유스케. 편하게 유스케라고 불러도 좋아"
"네. 유스케씨. 그러면..."
유유코의 의뢰는 간단했다. 굳이 아버지가 나서지 않아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연장을 들고 더운 여름날에 땀을 흘려가며 일을 한다는 것은 보람찬 일이다. 부숴진 무언가가 언제 그랬냐는듯 고쳐지는것도 보람찬 일이다. 늘상 아버지와 함께 일하며 옆에서 조수처럼 일했던 날과는 또 다른 맛이 있었다.
그렇게 며칠간 나는 사이교우지 유유코의 집에 꾸준히 들락거리며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는 동안 유유코와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게 되었고, 금세 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친한 친구 관계는 꾸준히 발전해 연인이 되었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역시 나를 닮아서 대단한 아들이군!'이라며 좋아하셨다.
수긍은 하지 않았다.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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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해가 저물어가는 느즈막한 시간대에 유유코는 나를 바라보며 물어보았다.
"유스케. 너는 내가 어떤 사람이라도 좋아해줄 수 있어?"
나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해 한참을 유유코를 바라보았다. 아마 나는 약간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갑자기 왜?"
"그냥...궁금해서"
"렌이 물어보라고 시켰지? 난 또...'나는 사실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었다!' 라는 그런 어이없는 이야기인줄 알고 당황했잖아."
"괴물...이라..."
유유코가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너는. 내가 어떤 사람이라도. 좋아해줄 수 있어?"
나는 한참동안 유유코를 바라보았다. 짙은 갈색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곧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할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말을 하지 못했다. 갑작스레 가슴 한켠에서 두려움이 솓아났기 때문이다.
환상향. 요괴와 인간이 공존하며 살아가는 낙원같은 장소. 하지만 인간은 요괴에 비해 턱없이 약하고 심심하면 마을에서 자취를 감추기 일쑤다. 며칠이 지난 후에야 깔끔하게 발라진 가죽과 뼈만이 마을 무덤으로 돌아올 뿐.
나는 그때 유유코가 어쩌면 요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머리속을 아주 짧게. 찰나와 같은 시간처럼 지나갔지만, 그 찰나와 같은 순간 머리속의 모든 생각을 요란하게 헤집어놓고 지나가버렸기에, 나는 유유코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흐흥...고민 할 시간이 필요하다는거네?"
"...그게 말이지..."
"괜찮아! 사실 나도 장난 반 흥미 반으로 물어본거니까. 그리고 유스케 너라면. 인간이 아닌 나라도 좋아해줄거라고 여러번 느꼈는걸?"
"아..."
"그러니까 대답 못했다고 너무 속상해 하지마. 어떤 사람이라도 그렇게 갑작스럽게 그런 질문을 하면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할테니까"
유유코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런 유유코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그런 그녀에게 감사해서 나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여름 해가 서서히 저물어가는 와중에 나는 내 안에 안긴 유유코가 작게 바르르 떠는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한참을 끌어안고 있던 유유코가 내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었다.
"이건..."
"나뭇가지야"
"아니 그건 아는데 말이지...이건...너희 집에 있는 나무에서 가져온거지?"
유유코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맞아. 이 벚나무...예쁘지? 사시사철 푸른게 신기할 정도야..."
"그러고보니 너희 집에 있는 가장 큰 벚나무가 있었지. 그건 가을 늦게까지 벚꽃을 떨군다고 하던데"
"그걸 보면서. 내가 없을때는 나를 기억해줘"
"뭐야 갑자기. 금방이라도 떠나갈 사람처럼"
나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떠나! 그냥 늦은 밤이나 그럴때 내가 보고싶어지면, 그때 그걸 보면서 참으란 뜻이야!"
"네네 알겠습니다."
나는 유유코와 헤어진 후, 유유코가 준 작은 선물을 창문에 살짝 걸어두었다. 달빛에 반사된 벚꽃잎이 신기할 정도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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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그녀의 집 안의 식솔들은 모조리 말라 비틀어진 시신이 되어 발견되었다. 웅장한 매력을 자랑했던 집도 단 하룻밤만에 낡아 무너져가는 폐가처럼 되었다. 정원에 자란 분재와 꽃들은 검게 말라 비틀어져 손만 대어도 바스러질것만 같았고, 하늘을 날던 새들마저 바닥에 떨어져 죽은 시체가 되어 있었다.
마치 단 하룻밤만에 죽음이 이 집만을 집어삼킨듯 했다.
그렇게 짙게. 이 집에 남은 죽음의 내음이 온 몸을 휘감아 가는것을 느꼈다. 소름이 돋았다. 나는 온 몸에 돋는 불길한 예감을 떨쳐내기라도 하려는듯 정신없이 모여든 인파를 헤치고 유유코를 찾아 집 안으로 달려갔다. 넓은 마루와 수도 없이 이어진 방. 그녀의 가족의 수는 극히 적을텐데 어째서 그녀가 살던 집은 이렇게 넓고 정신이 없는걸까.
아차하면 길을 잃을것만 같은 복잡함,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넓은 정원, 그리고...홀로 떨어져 나와 저택 한 구석에 작게 자리잡은 초라했던 그녀의 방.
생각해보니 나는 그녀의 집을 가보긴 했지만, 방에 직접적으로 들어가본 적은 전혀 없었다.
어쩌면 그녀는 내가 모르는 사이 자신에 대한 모든걸 숨겨오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바보 같았다. 그녀는 내 모든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의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무지했던 자신을 끝없이 자책하며 나는 천천히 떨리는 손을 들어 유유코의 방 문을 열었다.
문은 매끄럽게 열리며 어두운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빛이 반짝이는듯 하더니 엄청나게 많은 수의 나비들이 빛을 따라 하늘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갑작스런 나비떼에 당황하여 엉덩방아를 찧었다. 나비는 하늘위로 날아가더니 서서히 사라져갔다.
나는 고개를 돌려 방 안을 다시 바라보았다. 방 안은 깨끗하고 정갈했다. 방 안에 묻은 핏자국을 제외하면 금방이라도 사람이 지낼 수 있을 정도로 깔끔한 방이었다.
핏자국에 시선이 미친 나는 천천히 무릎을 꿇고 그 자리를 바라보았다. 넓게 번진 핏자국의 옆엔 날카로운 단도가 들려져 있었다. 내가 가게에서 유유코와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누었을때. 유유코가 나에게 수리를 부탁했던 아름다운 단도였다.
이가 상하고, 날이 부러져가는 낡은 단도는 자신의 손을 거친 순간 예리하고 날카로운 단검 한 자루가 되어있었다.
'이 칼의 수리를 부탁드릴게요'
'단검...이네? 호신용으로라도 쓸 생각이야?'
호신용이라. 쓴 웃음이 새어나왔다. 나는 말없이 바닥에 놓인 단검을 쥐고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어떻게 단 하루만에 그 넓은 장소를 죽음으로 물들였는지, 그녀의 시체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녀의 집안에는 무슨 사정이 있던건지. 나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치사해...떠날거면...그렇게 말도 없이 가지 말고...뭐라고 말이라도 해주지 그랬어..."
나는 그렇게 한참을 소리없이 흐느꼈다. 모든 시간이 멈춘것처럼. 차갑고 고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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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겨울이 되도록 벚꽃은 지지 않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화사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난 가끔 내가 그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을 한다.
난 가끔 내가 그녀의 마음을 조금만 더 일찍 알아 주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한다.
난 가끔 내가 그때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얄궂게도 후회는 항상 뒤늦었다는걸 깨달은 후에야 찾아온다. 그래서 후회라는건 너무나도 쓰고 괴롭다.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나야 잊게 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어쩌면 그것이 내 잘못된 선택에 대한 벌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겁의 시간이 지나도 잊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주듯 나뭇가지에 피어난 꽃잎이 작게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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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새벽에도 명계는 늘 뿌연 안개로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요우무는 끝없이 이어진 계단을 바라보고는 말없이 백옥루로 돌아갔다.
마루에 걸터앉은 자신의 주인은 멍하니 백옥루의 주변에 핀 벚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유코님. 혹시...가지치기가 잘 되지 않았습니까?"
"...아. 요우무...미안. 아무것도 아니야"
"오늘따라 생각이 많으신것 같습니다."
"그냥...오늘따라 저 벚나무들을 보고있으면...왠지 모르게 가슴 한켠이 벅차올라서..."
"유유코님..."
유유코는 멍하니 벚나무를 바라보다 몸을 돌려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별거 아니야. 단지 내가 잊고있던 또 다른 기억 때문인 거겠지..."
요우무는 고개를 돌려 벚나무를 바라보았다. 역시나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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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단편 소설입니다.
문득 슬픈데 엉엉 눈물나는건 아닌 그런 내용을 써보고 싶어!
라는 생각에 당장 써내려갔습니다.
생각보다 결말을 쓰는게 힘들었습니다.
여기서 어떻게 엔딩을 내야 잘 냈다고 소문이 날까...하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애매하게 끝내게 되었습니다.
간만에 쓰는 소설은 느낌이 새롭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