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우-.」
지령전의 주인. 코메이지 사토리는 서류화된 안건에 싸인을 휘갈기던 펜을 놓고 잠시, 숨을 돌렸다. 눈앞에 쌓여있는 산더미 같은 서류가 오늘 하루 그녀가 얼마나 격무에 시달렸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부스스한 핑크빛 머리를 긁적이는 앳된 외모의 소녀. 사토리는 책상 위에 놓인 빈 찻잔을 퀭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오늘이 며칠이더라. 홍차 끓여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스윽, 슥.
슬리퍼 끄는 소리를 내며 사토리는 빈 찻잔을 들고, 집무실 구석에 마련된 탕비실로 향했다. 기운 없는 걸음걸이는 상당한 피로가 쌓였다는 반증이다. 위에는 푸른색을 기조로한 소매가 넓은 상의를 걸쳤고, 아래는 자신의 머리색과 같은 핑크색의 통이 넓은 치마를 입었다. 상의나 하의 모두 프릴이 있는 그녀의 복장은 그 앳된 외모로 인해 얼핏 보면 유치원복 같기도 하다.
싱크대와 연결된 빨간 밸브의 수도꼭지를 틀자, 뜨거운 물이 흘려 나온다. 사토리는 그 물로 찻주전자를 채우고 안에 찻잎을 넣었다. 그리고 속으로 3분을 샌다. 적당히 우려 났다 싶으면 들고온 찻잔에 따르면 끝.
차를 보충한 사토리는 뜨거운 찻잔을 들고 조심스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의자에 몸을 실은 채 아직 끝내지 못한 서류들을 지친 눈으로 쳐다본다.
책상을 점령하고 있는 서류 더미들의 대다수는 지저 주민들의 불만이었다.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이건 왜 안 되냐? 차별하지 마라. 등등. 하나 같이 쓸데 없는 안건들 뿐.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자신이 이런 과중한 업무에 시달린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어 오를 법도 하나, 사토리는 묵묵히 하던 업무를 이어나갈 뿐이었다.
이런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곳. 지령전의 주인으로 있을 자격이 없어지기 때문에. 도중에 몇 번인가 찢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아가며 부지런히 펜대를 놀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지긋지긋했던 격무가 끝이났다.
단지, 불평만 쓰여 있을 뿐인 서류를 읽고, 싸인만 할 뿐인데도 하루가 꼬박 지나갔다. 지금 시각이 몇 시인지도 모른 채, 단번에 밀려온 피로에 사토리는 책상 위로 쓰러지듯 엎어졌다.
이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하고 싶은데.
희한하게도 잠이 조금도 오지 않았다. 너무 피곤해서 그런가?
스윽, 슥, 스윽.
오지 않는 잠을 집무실에서 억지로 청할 필요는 없다고 여긴 사토리가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그녀의 가슴팍에 있는 사토리 요괴라는 상징인 여러 혈관들이 연결된 제 3의 눈도 어딘지 모르게 충혈되 있는 듯 했다.
스윽, 슥, 스윽.
슬리퍼를 끌며 향한 곳은 저택에 마련된 방들 중 하나. 문 앞에선 그녀는 '똑똑' 노크를 두어 번 한 뒤, 문을 열고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러자 하얀 머리의 남성이 반가운 얼굴로 그녀를 반겼다.
「사토리님!」
그의 정체는 기억상실 중인 카자네 소우지. 지령전에 거둬진지 만 이틀이 지난 지금 그는 사토리의 애완동물로서 길러지고 있었다. 사토리는 제 3의 눈. 서드 아이로 소우지의 속을 읽었다.
'사토리님이다! 사토리님 사토리님 사토리님 사토리님! 호메떼 호메떼!! 호메떼에에!'
자신을 향한 애정과 관심에 사토리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틀 전인가 오린이 주워온 지령전의 새로운 애완동물.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쓰다듬어 달라는 눈빛을 보내오는 그를 보며, 사토리는 자신이 지어준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래. 오늘 하루 잘 지냈니? 흰둥아.」
「네! 잘 지냈어요.」
「후후. 밝아 보여 다행이야.」
기억상실과 낯선 풍경. 처음 흰둥이를 봤을 때는 적잖이 우울해 보였는데, 지금은 완전히 기운을 차리고 밝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 사토리님. 그거 해주세요. 낑낑!」
「응?」
「쓰다듬 해주세요. 머리도 꼬리도 전부!」
애완동물로 길러진지 얼마나 되었다고, 흰둥이는 꼬리를 흔들며 사토리의 애정을 갈구했다. 귀와 꼬리를 빼면 다 큰 사내나 다름없지만, 귀여움 받기 위해 갖은 애교를 떨어대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보이기도 하다.
소원대로 머리를 쓰다듬자,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사토리는 자신의 손길로 행복해 하는 흰둥이의 마음을 읽으며 자신 또한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애완동물이란 좋단 말이야.
흑심이라곤 티끌도 없는 저 순수함. 보는 것만으로도 치유 받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머리에 이어 꼬리도 쓰다듬어 주고 있자니, 격무로 인한 피로가 약간이나마 풀리는 듯 했다.
손이 멈추자, 흰둥이는 금새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좀 더 쓰다듬어 주길 바라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흰둥이에게 사토리는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쉽지만, 그만 쉬려 가볼게. 다음엔 좀 더 쓰다듬어 줄 테니까, 얌전히 지내 주겠니?」
「네!」
「착하구나. 그럼, 그동안 너도 좀 쉬거나 아니면 다른 애완동물과 놀고 있으렴.」
「그럴게요!」
옳지. 착하다 착해. 하고 마지막으로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어 준 사토리는 만족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 홀로 남은 흰둥이. 소우지는 자신을 쓰다듬어 주던 주인님의 손길을 떠올리며 한동안 깊은 여운에 잠겨 들었다.
*
겨우 잠에 든 사토리는 그리운 꿈을 꾸었다. 처음 지저로 쫓겨나다시피 왔을 때. 그곳에서도 미움을 받는 자신과 여동생을 물신양면으로 도와주던 한 여자가 있었다. 저승의 염라와 교섭하여 작열지옥터의 관리인으로서 자신을 추천 해주었던 여자는 한 가지 특이한 취미가 있었으니.
그것은 요수를 애완동물로 삼아 기르는 것.
은인이기도 한 그 여자의 영향으로 결국, 사토리 자신도 애완동물을 키우게 되었지만.
그저 옛 기억을 회상하는 정도의 짧은 꿈이었으나 깼을 때는 상당한 시간이 흘려 있었다. 그동안 쌓인 피로 때문에 정신없이 잤던 모양. 잠결에 느릿한 걸음으로 복도를 걷는다. 푸른 색 일색인 파자마를 걸친 사토리는 세면장에 들어가 찬물로 세수를 했다.
물로 촉촉하게 젖은 얼굴이 거울에 비쳐진다. 충분한 수면으로 눈밑의 다크서클은 지워져 있었지만, 그래도 초췌한 인상이 남아 있는 핑크색 머리의 소녀가 무뚝뚝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토리가 인상을 쓰자, 거울 속의 소녀도 따라서 인상을 쓴다.
후우-. 한숨을 뱉어내고 다시 얼굴에 찬물을 끼얹은 사토리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낸 뒤,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파자마를 벗고 평상복을 차려 입은 사토리는 예정된 하루일과를 시작하기 위해 집무실로 향했다. 오늘은 또 얼마나 쓸데없는 안건들이 쏟아져 나올까? 지령전의 주인으로서 원래는 작열지옥터만 관리하면 되었었는데. 언제부턴가 작열지옥터 뿐만 아닌 지저 전체를 관리하는 입장이 되어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가 하면, 이 지저에서 사무일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이 극히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까놓고 말하자면, 사토리 이외엔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작열지옥터를 제외한 곳은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고, 그야말로 무법지대나 다름없는 공간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약육강식의 세계가 되어버린 지저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요괴들의 불만은 커져갔고, 폭동으로까지 번져 한 차례 홍역을 치른 적도 있었다.
결국, 많은 지저의 요괴들은 자신들을 관리해 줄 누군가를 필요로 했고, 그런 시류 속에 얼렁뚱땅 사토리가 떠맡게 된 것이었다. 아니, 떠맡겨졌다가 옳을 것이다. 애초에 그런 류의 일은 사토리 이외엔 거북해 했으니까.
산의 사천왕이라 불리던 호시구마 유기라는 오니도 있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눈이 닿지 않는 곳까지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크고 작은 다툼이 벌어지면, 직접 나서 중재를 하지만, 사소한 불만불평이나 그 외의 안건들은 전부 사토리의 몫.
지금의 사토리가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게 된 것은 그러한 연유에서였다.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상 위에 쌓인 오늘의 일이 그녀를 기다린다. 하루라도 빨리 자신의 업무를 도와줄 사람을 찾지 않으면, 언젠가 과로로 쓰러져 버릴 지도 모르는 나날. 사토리는 탕비실에서 홍차를 끓이며 빨리 그런 사람이 나타나 주길 간절히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