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부디, 저희 이누가미일족을 져버리지 마시옵소서!"
한 너구리가 이요국의 마쓰야마 영주에게 구원을 바라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그런 그를 내려다 보는 영주의 얼굴에는 난처함이 여실히 드려나 있었다. 자신의 발밑에 엎드려 있는 것은 그냥 너구리가 아닌 조상 대대로 마쓰야마를 지키며 수호해 오던 이누가미교부의 너구리. 그런 그의 요청이라면 들어주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인데, 영주는 망설이고 있었다.
영주가 곁눈질로 쳐다본 녹봉을 받아먹는 관료들 역시 성가신 일을 떠맡은 것처럼 썩 좋지 않은 표정이었다. 원하는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자, 너구리는 다시 한 번 머리를 땅에다 박으며 애원했다.
"마쓰야마는 오랜 옛날부터 저희 이누가미일족의 비호를 받아온 성이 아니옵니까? 그런데 어찌 저희들을 돕겠다고 하지 않는 겁니까?"
크흠. 헛기침 소리가 영주의 목에서 올라왔다.
"그.. 그건..."
오랫동안 입어왔던 은덕을 갚지 못 할 망정 내버리다니, 그런 일은 아무리 인간과 요괴, 서로 다른 종족이라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일. 그런데도 쉽사리 도움의 손을 내밀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으니.
영주의 눈엔 무안한 빛이 어려 있었다.
"상대가 너무 나쁘다고 할까.."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영주라고 해도 좋다. 그의 간청을 들어주게 된다면 그런 소리를 들어도 상관없을 정도의 상대와 적대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었다.
"하필이면 이누가미교부의 성에 눌러 앉은 것이 오니 백귀야행의 수장, 슈텐도지라서 말이지."
관료들에게서 깊은 탄식 소리가 새어나왔다. 자신들의 땅을 지켜온 이누가미교부의 너구리들의 위기를 어찌 보고도 모른 척 하겠는가. 행여나 오니라는 재앙의 불씨가 이쪽으로 옮겨 붙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할 따름일 뿐.
그래도 마냥 방관만 하고 있기엔 그들도 사람인 이상 양심에 찔리는 일이었다. 도의에 어긋난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오니의 공포와 도의.
그 둘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주를 비롯한 관료들은 실로 오니에 대한 공포가 더 앞서고 있었다. 섣불리 도와주려다가 화를 입어버리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이누가미교부의 너구리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살 사람은 살아야 하는 법.
성내에 침음이 흐르는 가운데, 머리를 조아렸던 너구리가 고개를 홱 들었다.
"너무 하십니다! 결국, 자신들의 보신을 위해 오랜 세월 동안 이 성을 지켜온 우리들을 져버리겠다니! 실망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도와주지 않는 것으로 마음을 굳힌 영주들을 바라보며, 그는 노성을 내뱉었다. 이런 은덕을 모르는 매정한 인간들 같으니라고. 너구리는 실망감과 분함으로 빠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갈았다.
결국은 요괴와 인간관계다 이건가.
오랜 세월동안 쌓아왔던 우정은 고작 그 정도였단 말인가.
작은 손을 말아 쥐고 나무로 된 바닥을 내려친다. 그렇게 노기를 발산하던 그에게 조심스러운 말이 건네졌다.
"그 일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는 없지만."
영주를 비롯한 모든 관료들의 시선이 일제히 방금 말을 꺼낸 자에게 향해졌다.
"그게 무슨 말인가?"
영주가 말을 꺼낸 관료에게 물었다. 그 관료는 주먹으로 입을 막고 헛기침을 하더니 차분한 어조로 설명했다.
"옛날부터 전해져온 오니에 대한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오니는 무언가를 건 내기를 좋아한다고."
"그 말은.. 그 오니. 슈텐도지에게 내기를 걸자는 건가?"
설마 하는 물음에 관료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그렇습니다. 힘으로는 대적할 수 없는 상대지만, 내기라면..."
"어떻게든 된다는 거지?!"
영주의 얼굴에 조금이나마 희색이 돌았다. 확실히 전승 속에서의 오니는 무언가를 건 내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내기를 걸어온 상대와 정정당당히 겨루며 승자의 부탁을 들어준다고 한다. 내기의 내용은 내기를 걸어온 도전자가 정하는 것이 보통이며, 이 경우 자신에게 불리한 조건이라 할지라도 거절하지 않는다고.
분명, 이거라면 어떻게든 될지 모르지만.
"네. 도박이긴 합니다만, 어떻게든 될 겁니다. 하지만.."
관료가 말끝을 흐린 것과 동시에 영주의 얼굴도 다시 그늘이 끼었다. 절대로 간과해선 안 되는 문제. 영주가 한탄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상대가 그 슈텐도지란 말이지."
"슈텐도지라면 어떤 승부를 하든, 아무리 이쪽이 유리한 조건이라고 해도 승산이 없을 겁니다."
"역시.."
한동안 멈췄던 침음이 다시 성내를 잠식했다. 그때였다. 잠자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너구리가 한 가지 좋은 생각을 떠올린 듯 눈을 크게 뜨며 끼어들었다.
"그거라면 제게 좋은 묘안이 있습니다!"
"무어라? 그게 사실인가!?"
영주가 눈을 밝히며 쳐다봤다. 너구리는 자신에게 집중된 기대의 시선에 주춤하면서도 용기를 내어 힘 있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네! 그 슈텐도지에게 술로 내기를 거는 겁니다! 이거라면 절대 거부하지 않을 거고 우리에게 좀 더 유리한 조건을 붙일 수 있을.."
"무슨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한단 말인가!"
너구리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한 관료에게서 노성이 터져나왔다. 너구리는 깜짝 놀라 끔뻑이는 눈으로 그 관료를 쳐다봤다. 관료의 얼굴은 일그러져 한 눈에도 노한 것처럼 보였다. 그의 노성이 이어졌다.
"천하의 애주가이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술고래를 상대로 술 내기라니! 어리석은 것도 정도가 있지!"
"저기.. 제 얘기를 끝까지 들어봐 주시면.."
"더 들어 볼 것도 없다. 안타깝게 되었지만, 역시 이 일은.."
너구리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지 않고, 거절의사를 밝히려던 관료는 사나운 시선에 돌연,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시선을 보낸 것은 영주. 그는 그런 관료를 나무라듯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 있는 건 미천한 너구리가 아닌 우리들의 우방인 것은 댁도 잘 알지 않소? 너무 그렇게 내치려 하지 마시오."
"죄.. 죄송합니다. 너무 황당무계한 얘기라 저도 모르게."
"알면 됐소."
쓴 소리에 기가 죽은 관료는 입을 다물고 숙였던 고개를 더 숙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오니의 공포로 우방인 그들을 내버리려 했던 영주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태도를 바꾸자 관료들 사이에 수군거림이 커져갔다.
설마, 저 너구리의 얘기를 들어주려는 것은 아니겠지?
관료들은 그런 불안이 담긴 눈을 하고 있었지만, 영주는 괘념치 않고 너구리의 뒷말을 재촉했다.
"하던 얘기마저 하시오."
"가.. 감사합니다. 그럼."
이후 이어진 이야기는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눈을 크게 뜨고 납득할 만한 것이었다. 오니들이 가장 좋아하며 자신있어하는 술 내기로 필승을 얻어낼 만한 비책. 이것이야말로 너구리가 아니면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
"이집 술 참 맛있네. 향긋한 게 맘에 들어!"
그 시각, 마쓰야마 인근의 산에 위치한 마쓰야마 성을 본 딴 이누가미교부의 성에서는 오니 백귀야행의 수장 슈텐도지가 그곳을 지배하며 희희낙락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옆으로 누운 그녀의 앞에는 과일로 빗은 과실주와 진수성찬이 놓여 있었으며 미녀로 둔갑한 너구리들이 그녀의 시중을 드는 중이었다.
비어진 술잔에 미녀가 따라 채운다. 기특해서 엉덩이를 쓰다듬는 손길에 미녀는 몸을 흠칫 떨면서도 저항하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공포에 어떠한 추행도 참고 견뎌내는 그녀의 모습에 슈텐은 엉큼한 미소를 지으며 키득 댔다.
"너구리들은 참 부럽단 말이야. 이렇게 아릿따운 미녀로도 둔갑할 수 있으니까. 한때 나도 둔갑술을 배워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되더라고."
자신의 시선 너머 이곳 이요국 너구리들의 수장이자, 이누가미교부의 이름을 이어받은 너구리에게 건넨 말이었다. 다른 너구리에 비해 유달리 배가 나온 이누가미교부는 진땀인지 식은땀인지 모를 땀을 뻘뻘 흘려대며 대답했다.
"그.. 둔갑술이란게 우리 너구리 아들이랑 야시들 말고는 쓰기 힘든 술법인지라.. 다른 요괴가 배우고 싶다고 쉽게 익혀지는 게 아니랑께요."
"음.. 그렇단 말이지. 난 온갖 요술에 정통하지만, 아까 말한 둔갑술이랑 결계술이 서툴단 말이야. 막 때려 부수는 거는 잘 하면서. 뭐, 잘하는 게 있으면 못 하는 게 있는 거겠지. 안 그래?"
"암요 암요! 누구라도 다 잘 할 수 없으니께요."
슈텐도지가 성을 점령한 이례로 이누가미교부의 역할은 그녀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 쳐주며 최대한 화를 돋우지 않는 것이었다. 지금처럼 시덥 잖은 말에 맞장구치며 비위를 맞춰준 것도 오늘로 이틀 째.
언제까지 머물지 모를 슈텐도지를 상대한 지도 고작 이틀째인데도 그의 심신은 빠르게 지쳐가고 있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거대한 화약고를 상대한다는 것은 막대한 정신력을 소모 시키는 일.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일족 전체의 운명을 짊어졌다는 과중한 책임감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면 지금이라도 당장 쓰러질 것 같은 것이 현재의 그였다.
그래도 절대 쓰러져선 안 되지. 자신이 쓰러지면 누가 이누가미일족을 책임진단 말인가! 겉보기엔 너구리의 귀와 꼬리가 달려 있을 뿐인 배나온 중년은 자포자기가 되려는 자신을 일족을 위한다는 일념으로 채찍질했다. 그렇게 각오를 다잡으며 거짓 미소를 유지하던 그에게 슈텐이 술병을 흔들어 보였다.
"그렇게 보고만 있지 말고, 너도 한잔 들지?"
슈텐의 술 권유에 그는 "괜찮습니다."하고 거부 의사를 밝혔지만, 다음 순간 날카로워진 그녀의 눈초리에 고개를 숙이며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거부한다는 선택지란 존재하지 않는 마당에 괜한 고집을 부려봤자, 목숨이 날아갈 뿐. 슈텐에게 술잔을 받아든 그는 행여나 술에 취해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조심에 또 조심을 기울이며 술을 들이마셨다.
이틀 전 갑자기 나타나 폭군으로 군림한 오니와 일족을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비굴해질 대로 비굴해진 자신의 수장의 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보던 너구리들은 착찹한 심경을 숨기지 못하고 한탄의 숨을 내뱉었다. 두려움에 떨며 슈텐의 비위를 맞춰야하는 생활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자신들의 앞날이 마냥 어둡기만 그들은 그녀에게 들리지 않게 조용히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그 녀석, 반드시 성사 시키겠다며 호언장담 했었는데 말이야."
"잘 될 턱이 없지."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걸어보고 싶어진다니까."
"그건 그렇지."
두 너구리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요물은 자신들을 대표하여 마쓰야마성의 협력을 얻으러 갔던 너구리, 킨지로였다. 자신들이 오랜 세월 동안 지켜주며 우호를 쌓았던 인간들이라곤 하나 상대가 슈텐도지인 이상 좋은 결과를 얻어낼 거라고는 너구리들은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져보는 것 정도. 설령 마쓰야마성의 영주가 자신들의 요청을 들어준다고 해도 낙관적인 상황이 되지 않을 테지만.
술 몇 잔에 얼굴이 달아오른 이누가미교부가 이젠 더 못 마시겠다며 손사래를 친다. 그런데도 슈텐은 웃는 낯짝으로 비어진 잔에 술을 부어 반강제로 마시게 하여 결국, 그를 쓰러지게 만들었다. 쓰러진 그를 보며 술에 약하다며 혀를 쯧쯧 차는 슈텐의 모습은 안하무인 그 자체. 술이 비자, 호통이 터져 나왔다.
"술 더 없어? 있으면 재깍재깍 가져오란 말이야!"
어디선가 너구리 한 마리가 술병을 품에 안고 달려왔다. 너구리의 얼굴은 공포로 얼어 있었고, 그에게서 술병을 낚아챈 슈텐은 만족스런 얼굴로 병나발을 불었다. 단숨에 반 정도 비워버린 슈텐의 입에서 꺼억, 하는 트림 소리가 새어 나왔다.
성안을 가득 매운 지독한 술 냄새에 너구리들은 코가 썩는 것만 같았다. 도대체 이걸로 몇 병째인 것인지. 저 가냘픈 몸에 들어간 술의 양은 어림잡아 큰 통으로 세 개. 이곳 너구리 전부가 마셔대도 다 못 마실 양이었다.
끊임없이 술을 마셔대는 가히 신화적인 술고래를 앞에 두고, 너구리들은 한시라도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