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구야는 깜짝 놀라는 대신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아나타는 어느 달토끼가 앉아있던 자리를 흔들리는 불안한 눈동자로 쳐다보다가 길게 심호흡했다. 이어서 아나타는 혼잣말하듯 말했다.
"안되겠네요."
카구야는 짐짓 하나도 모르겠다는 듯이 말했다.
"응? 뭐가?"
"신경쓰여서 집중이 하나도 안되는 군요. 죄송하지만…… 문답은 여기까지하고 레이센 좀 만나고 와도 될까요?"
다급해보이는 아나타의 질문에 카구야는 생각하지도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그러렴."
"감사합니다."
아나타가 입을 열었을 때 아나타는 이미 몸을 돌린 후 였다. 어디까지나 예의상으로 한다는 식의 대답이었지만 카구야는 신경쓰지 않았다. 대답과 동시에 아나타는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아나타가 방을 나가자 카구야는 뒤로 벌러덩 누웠다. 레이센도 삐져서 나가고, 아나타도 사과한다고 나가 혼자 남아있게된 카구야였지만 그녀는 심심하지 않았다. 무료함을 달래줄 사색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카구야는 아나타와의 문답을 떠올려보았다.
즐겁지는 않았지만, 흥미로웠다.
무료함에 도배된 삶에 있어서 호기심은 중요한 요소였다. 그래서 카구야는 아나타에게 진실 놀이를 제안한 것이었다. 호기심을 파헤치기 위해서.
문답이 끝난 지금, 카구야는 앞으로 아나타가 무슨 짓을 할지 궁금했다. 에이린이 말한 바에 따르면 아나타는 '경계의 저주'에 걸려있다. 그렇다면 극단적으로 말해서 아나타에겐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능력이 있다. 물론 어떤 것도 못하게 되어버릴 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과연 아나타가 어떻게 행동할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아나타는 과연 레이센에게 사과를 하고 서로 화해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아나타는 유일한 기억의 단편, '복수'를 할 수 있을까?
문뜩 복수를 떠올린 카구야의 머릿 속에 한 소녀의 모습이 맴돌았다. 새하얀 장발을 부적으로 묶고 다니고 날카로운 눈초리를 지닌 소녀였다. 카구야는 그녀가 좋았다. 그래서 복수도 좋았다.
머릿 속에서 어느 소녀의 모습을 지워버린 카구야는 다시 아나타와의 대화를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어떤 한 가지 생각이 카구야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카구야는 상체를 벌떡 일으켜세웠다. 그녀는 '설마?'하는 표정을 짓다가 곧 피식 웃었다.
"당해버렸네."
방금 전 진실 놀이에서 먼저 질문한 것은 아나타였고, 마지막으로 질문한 것도 아나타였다. 사정이 어떻게 됬든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 말은 즉 아나타가 카구야보다 하나 더 많은 것을 얻어갔다는 소리다. 방금 문답을 어디까지나 무료함을 달랠 놀이로 생각했기에 카구야는 자신이 왠지 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결국 카구야는 다시 뒤로 벌러덩 누우며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것이 아나타가 노린 건지, 아닌 건지는 모르더라도.
* * *
아나타는 스스로가 지금 상황을 썩 마음에 들지 않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리는 아나타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심장은 그렇지 않다고 강하게 뛰고 있었다. 내가 뭘 잘못한 거지? 그러나 심장이 그 질문에 대답해주는 일은 없었다. 아나타는 그게 싫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알 수도 없는 이유로 가슴이 아픈 것은 더 싫었다. 차라리 무얼 잘못했는지 모르더라도 사과하고 끝나는 것이 나았다. 그래서 아나타는 심장이 외치는 대로 레이센을 찾아나섰다.
카구야의 방을 나오자마자 레이센의 방으로 달려간 아나타는 방 앞에 멈춰선 후 방문을 두드렸다. 할 말을 정리할 새도 없이, 숨을 고를 새도 없이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한 행동이었다.
"레이센, 있나요?"
아나타는 '꺼져요!'라는 소리라도 들려오길 바랐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침묵 뿐이었다. 침묵이 곧 대답이라는 걸 깨닫는데 걸린 만큼 할 말을 생각해두고 차오르는 숨을 가라앉힌 아나타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어서 그러는데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이번에도 대답은 침묵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아무 말이 들려오지 않자 아나타는 한숨을 쉬고 싶었다. 그러지 않은 이유는 레이센이 그 소리를 들어봤자 하나도 좋을 게 없기 때문이었다. 한숨은 목 아래로 삼킨 아나타는 무언갈 다짐한 얼굴로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문고리를 돌렸을 때 아나타는 그대로 멈춰섰다. 아나타는 그 상태로 며칠 동안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카구야와 처음 만났을 때나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과 같은 사건들.
아나타는 조심스레 문고리를 원래대로 돌려놓은 후 손을 놓았다.
"들어가는 것이 안된다면 여기서라도 말할게요. 들어줘요."
아나타는 마치 문 너머로 레이센이 보이는 것처럼, 그리고 문 너머에서 레이센이 듣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아나타는 벽과 문이 자신의 목소리를 왜곡하지 않기를, 그리고 레이센이 귀를 막지 않기를 빌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레이센."
아나타는 사과했다.
하지만 웃기게도 사과하는 방법을 아나타는 몰랐다. 아나타 스스로도 그걸 알고 있었다. 거기다가 아나타는 스스로가 무얼 잘못했는 지도, 혹은 정말 잘못한 게 맞는 지도 몰랐다. 그런 상태인데다가 '사과를 하는 법'에 대한 기억이 없는 아나타는 아무리 고민해도 진심 어린 사과를 하는 법을 생각해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아나타가 선택한 방법은 아무 생각 없이, 몸이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기로 했다.
"예. 제가 잘못했습니다. 물론 이번 일도 제가 뭘 잘못 했는지도 모르겠고, 정말 잘못 했는지도 모르지만…… 흔히들 그러지 않나요? 모르는 건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모르면서도 배우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런 말이 떠오르는 군요. 저는 제가 잘못한 걸 알려하지 않았어요."
아나타는 거기까지 말한 다음 크게 숨을 들이마쉬며 눈을 감았다.
"물론 일일이 제가 잘못한 걸 모두 알려달라는 건 아닙니다. 단지…… 레이센에게 뭘 잘못했는 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사과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 사과하기 위해서 그것이 필요했어요. 내가 잘못했다는 자각이 필요했어요."
아나타는 눈을 다시 떴다.
"당신에게 사과하고 싶어요. 용서해주지 않아도 좋아요. 그러니 대답이라도 해주세요. 영원정에서 꺼지라고 해도 좋아요. 그런 대답이라도……."
아나타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복받쳐 말하다가 뒷말을 흐렸다. 격해지려는 감정을 억누르며 아나타는 다시 침착하게 말했다.
"레이센 우동게인 이나바,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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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복귀 기념, 업로드.
이제 슬슬 감상문을 써야할텐데
한동안 뻘글도 안쓰다보니 이래저래 타자치기가 힘들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