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왕녀와 흡혈귀 - Remy Ritter von Scharlach
[번역] 왕녀와 흡혈귀 - Prinzessin Maria Margarethe von Adelsried
[번역] 왕녀와 흡혈귀 - Her Royal Highness Princess
[번역] 왕녀와 흡혈귀 - Prinzessin und Vampir (1)
[번역] 왕녀와 흡혈귀 - Prinzessin und Vampir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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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그 30년 전쟁 이후로 250년이 지난 19세기 말.
레밀리아 스칼렛은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 있었다.
“와…… 정말 아름다운 그림이네요. 이게 정말 400년 전에 그려진게 맞아요? 믿겨지지가 않아요.”
멍청한 소리를 내뱉는 건 홍 메이링이었다. 일단은 유럽풍의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동양풍의 얼굴과 무엇보다도 극심한 촌스러움이 이 장소에는 매우 안 어울렸다. 그녀의 주인인 레밀리아는 한숨을 푹 쉬고 있었다.
“뭐 네게 부족한 건 학문이라고는 잘 알고 있으니까 이런 기회도 있는 편이 좋은 건 알겠는데. 그 바보같은 감탄사는 어떻게 안 되겠어? 메이링.”
“그냥 솔직하게 감탄하고 있을 뿐이라구요.”
“일단 지금의 넌 내 호위잖아. 그리고 메이드고. 적어도 등을 쭉 피고 주위를 경계하라고. 미술관이여도 적은 어딘가에 숨어있을지 몰라.”
“적이라고 하셔봤자 그런게 있어요? 그리고 저보다 아가씨가 더 쎄시고 민감하시잖아요.”
“불평하지마. 꼬맹이 메이드 주제. 우리들은 관광할려고 여기에 온 게 아니라고.”
레밀리아는 메이링의 정강이를 찌르고 눈 앞의 그림을 바라봤다. 말을 탄 기사가 추악한 괴물에게 검을 향하고 있는 광경이 그려져있는 그림이다.
라파엘로 산치오 작, 성 게오르기우스와 드래곤.
두 사람이 있는 곳은 프랑스의 재보, 루브르 박물관이다. 역대 프랑스 왕국의 궁정이었던 유서 깊은 장소다. 이 곳에 발을 들이게 될 줄은 그녀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레밀리아는 자신의 품 속에 있는 편지를 바라봤다. 그 편지의 내용은.
──호그문트 남작 레밀리아 스칼렛 각하. 루브르의 기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지금 레밀리아는 대영제국에 충성을 맹세한 영국 귀족이다. 그녀는 공무로써 파리를 방문하고 있었고 이 편지는 그녀가 묵고 있는 호텔에 놓여져 있었다. 발송인은 불명. 목적도 불명. 레밀리아가 이 편지에 응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이름도 모르는 타인의 무례한 부름에 응한 이유는 그녀 자신도 아직 모르고 있다.
“오질 않네요. 그 분은.”
그림 하나만 바라보는 것도 지겨운 것인지 메이링은 불평을 말했다.
“그냥 장난에 불과했었던 걸까요?”
“글쎄. 지금쯤 범인은 그늘에서 우리들을 보고 비웃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럼 찾아서 혼내주러 가죠?”
“……아니. 아무래도 그럴 필요는 없어보이네.”
박물관의 통로를 바라보고 있던 레밀리아를 따라 메이링도 같은 곳을 보기 시작했다. 바라본 곳에는 프록코트를 걸친 남자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는 걸치고 있던 모자를 가지고 인사를 하며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레밀리아 스칼렛 각하 이시죠?”
“응. 맞아. 당신이 그 편지를 보낸 사람?”
“그렇습니다. 이런 식으로 불러내서 정말 죄송합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이라는 것이 그의 첫번째 인상이었다. 아직 나이는 20을 갓 넘긴 것 같아보였다. 정장 코트의 느낌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루브르의 기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 미술관에서 가장 유명한 기사는 라파엘로의 성 게오르기우스지. 왜 이런 장소를 선택했는지 알려줄 수 있을까?”
그는 득의양양하게 웃으면서 모자를 가슴에 얹고 고개를 숙였다.
“긍지 높은 기사와 만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럼 기사들의 수호성인, 성 게오르기우스의 앞이 최적의 장소가 아니겠습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레미 리터 폰 샤라크 각하.”
“……!”
순간 레밀리아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날카로운 눈매로 그를 째려보고 있었다.
그 이름을 들은 건 그 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녀의 뇌리에 250년 전의 기억이 어제 있었던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델스리드, 그리고 마리아 마르가레테──
“네 녀석은…… 뭐하는 놈이냐?”
지금이라도 당장 죽일 것같은 그녀의 시선을 받고, 그는 자신을 밝혔다.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모리스 라벨. ……독일어로 말하자면 모리츠 라벨이 되겠군요. 일전에 당신을 섬겼던 기사, 빌헬름 라벨의 후손입니다.”
라벨이 파리에서 살고 있는 집은 가난했다. 그래도 최저한으로 갖출 건 전부 갖추고 있었다.
“신문에 당신의 이름이 적혀있어서 말이죠. 레밀리아 스칼렛…… 전 그 이름에 기시감을 느꼈습니다. 그 원인은 곧 알게 되었지요.”
소파에 앉아있는 레밀리아에게 라벨은 낡은 양피지 묶음을 넘겼다. 짝이 안 맞는 양피지를 단순히 실로 묶었을 뿐이었지만 다행히도 읽을 수는 있었다. 표지에 적혀있는 문자는── 빌헬름 라벨.
“저는 바스크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는 스위스 출신입니다. 이건 아버지가 고향에서 프랑스로 넘어오실때 친가에서 가져오신 물건 중에 있었던 겁니다.”
레밀리아는 양피지를 주뼛주뼛 집으며 한 장 한 장 신중하게 넘겼다. 양피지에 서투른 독일어로 적혀있는 건 그가 참전했던 30년 전쟁의 기록이었다. 브라이텐펠트, 프라이부르크, 뇌르틀링겐, 아델스리드 가도의 결전. 그리고 레밀리아는 모르는 전쟁 이후 빌헬름 라벨의 이야기.
“그는 최후의 전투에서 다리 한 쪽을 잃었습니다. 30년 전쟁이 끝난 후에 그는 고향인 스위스로 돌아가 불편한 몸을 이끌면서도 가업을 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기록해둔 것이 이겁니다.”
“……살아 있었구나.”
감개무량한 레밀리아는 양피지 속에 남아있는 라벨의 숨결에 손을 갖다댔다. 그리고 문장 속에서 몇 번이나 나타나는 것이 기사 레미, 샤라크 경, 레미 리터 폰 샤라크다.
“샤라크도 스칼렛도 그 단어가 의미하는 뜻은 같죠. 진홍색. 그리고 레미와 레밀리아. ──단순한 직감이었습니다. 하지만 제 몸 속에 흐르는 피가 이 두 사람이 관계 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스칼렛 경, 당신은…….”
레밀리아는 시선을 양피지에서 라벨로 옮기며 얼굴을 바라봤다. 250년이란 시간이 지나고 수많은 생명이 오고간 후손의 모습은 빌헬름 라벨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레밀리아는 그 표정 속에서 라벨의 잔재를 느끼고 있었다.
흡혈귀가 아닌 인간도 이러한 형태로 길고긴 시간의 흐름을 살아오는 것인가.
“모리스 라벨…… 당신의 억측은 대강 맞아. 레미는 나야. 선조도 환생도 아니야. 예전에 나는 레미 리터 폰 샤라크라는 이름을 썼었어. 난…… 늙지 않는 흡혈귀야.”
“……그렇군요.”
그걸 말해도 되냐고 물어보는 메이링에게 그녀는 손으로 괜찮다고 답하였다.
“흡혈귀 였나요. 그러면 납득 가지요.”
“불로불사였다는 건 알고 있었다는 말투네.”
“제가 알아낸 결론이 아니라 제 선조의 유언입니다.”
“라벨의……?”
라벨은 지금부터가 본론이라는 걸 말하듯 소파에서 몸을 내밀었다.
“경을 찾아내고 그의 비밀을 알아내 내 묘지에 와서 보고해라. 그는 분명 살아있을 거니까. ──그 양피지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빌헬름 라벨은 샤라크 경과 약속을 한 것 같았습니다. 전쟁에서 살아남으면 자신의 비밀을 알려준다고. 저는 그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당신을 불러내고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겁니다.”
“아아…… 그런건가.”
“부디 알려주실 수 없습니까? 이 양피지에도 불완전한 부분이 있습니다 당신의 비밀을 그리고 제 조상, 빌헬름 라벨이 살아온 길을…….”
레밀리아는 양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힘없이 신음했다. 이건 일종의 구제였다.
“이 흡혈귀인 나조차 잊어버린 아주 먼 옛날의 약속이 250년의 시간을 지나 되살아나다니…….”
그녀를 고개를 들어올려 라벨의 진지한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는 빌헬름 라벨과 똑같았다.
“좋아. 모든걸 얘기해주지. 뭐가 알고싶지? 용감한 기사의 후예, 모리스 라벨이여.”
그녀는 기억을 더듬는다. 왕녀와 흡혈귀의 바래지 않는 기억. 이 기억을 말한다면 고통스러워진다는 건 알고 있지만 레밀리아에게 있어 필요한 것이라 생각했다.
“좋은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스칼렛 경.”
길고 긴 이야기가 끝난 후에 라벨은 소파에서 일어나 레밀리아와 악수를 했다.
“입 밖에 내진 말라고?”
“알고 있습니다.”
레밀리아는 모든 걸 라벨에게 말했다. 레밀리아의 이름. 빌헬름 라벨에 대한 것. 그리고 마리아 마르가레테에 대한 것.
“이제 그 시절의 인간은 전부 죽었는데도. 내 흡혈귀의 본질도 뿌리부터 바뀌어버렸는데도. 설마 이런 시대에 이런 장소에서 그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할 줄이야. 생각지도 못했어. 역시 길게 살고 볼 일이네.”
인간의 생사뿐만 아니다. 세계도 250년 전에 비해 크게 바뀌었다. 신성 로마 제국은 멸망했지만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로 분열 된 독일은 프로이센 왕국 재상 비스마르크로 인해 통일을 이뤘다.
“그나저나.”
레밀리아는 반사적으로 말을 내뱉었지만 라벨이 귀를 기울여준 덕분에 그녀는 감정을 정리 시키고 의문점을 캐물었다.
“……아까 말했었지? 스페인 왕녀가 성을 방문 했을 때, 간단한 춤을 마리아 마르가레테와 췄다고. 그 춤의 이름이 뭘까?”
그것이 레밀리아가 품고 있는 그 전쟁의 마지막 의문이었다. 그 말을 들은 라벨은 조금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아무것도 모른채 춤을 춘 건가요?”
“즉흥적으로 춘 거였으니까 문제는 없었지. 그래서 당신은 뭔가 알고 있는 거 없어?”
“글쎄요. 제가 직접 본게 아니니까 잘 모르겠네요. 제 억측이지만…… 아마 파반느가 아닐까요?”
“……파반느.”
레밀리아는 파반느가 뭔지 모른다. 하지만 그게 맞을거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 춤은── 왕녀와 흡혈귀가 춘 변변찮은 춤은 파바느인 것이다.
이제 남은 미련은 없었다. 레밀리아는 소파에서 일어나 연보랏빛의 드레스를 걸쳤다. 대기하고 있던 메이링에게 손으로 신호를 보내고 라벨의 방에서 나갔다.
“한 가지만 여쭈어봐도 괜찮겠습니까? 스칼렛 경.”
라벨은 배웅하기 직전에 양산을 펼친 레밀리아에게 말을 건넸다.
“뭔데?”
“아직 미숙하지만 저는 작곡가입니다. 당신의 이야기는 매우 자극적이었습니다. 당신과 마리아 마르가레테를…… 왕녀전하를 소재로한 곡을 만들어도 괜찮겠습니까?”
예상 외의 부탁에 놀란 레밀리아는 기쁜듯이 웃었다.
“상관없지만 우리들에 대한 건 절대 남한테 말하면 안 돼?”
“그건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곡의 이름은 뭐 정해둔 거 있어?”
용병의 후손이며 후일 음악계를 이끌게 될 희대의 천재는 400년을 살아온 흡혈귀에게 말하는 걸 주저했지만 그녀야말로 가장 먼저 알려야할 상대라고 생각하며 말을 꺼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레밀리아는 양산으로 얼굴을 가리면서도 환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그리고 라벨을 향해 손을 흔들며 메이링을 데리고 파리의 인파 속으로 사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