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왕녀와 흡혈귀 - Remy Ritter von Scharlach
[번역] 왕녀와 흡혈귀 - Prinzessin Maria Margarethe von Adelsried
[번역] 왕녀와 흡혈귀 - Her Royal Highness Princess
[번역] 왕녀와 흡혈귀 - Prinzessin und Vampir (1)
[번역] 왕녀와 흡혈귀 - Prinzessin und Vampir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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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확실히 종언을 향하고 있다.
아델스리드의 북쪽, 도나우 강에 진을 친 프랑스군은 도나우강에서 쉽게 진군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을 이끄는 튀렌 장군이 스페인령 네덜란드 공략을 명령받아 독일을 일정 기간 떠나있었고, 또 군내의 용병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해서 프랑스군은 대규모 행동을 일으킬만한 준비를 갖추지 못하였다.
그건 황제군도 같은 상황이었다. 황제군에게 가장 많은 병력을 제공하고 있던 바이에른 선제후국이 프랑스와 휴전을 해서 일시적이지만 황제군 자체가 없어질 뻔한 위기를 맞았었다. 그러나 선제후의 신하며 황제군 총사령관인 벨트 장군이 휴전에 응한 주군을 등지고 신성 로마 제국으로의 충의를 맹세했다. 바이에른 선제후는 벨트 장군에게 끌려가는 형태로 전쟁을 계속하게 되었다. 최종적으로 황제군은 본래의 세력을 되찾는 것에 성공했지만── 대국적으로 보자면 허황에 불과했다.
베스트팔렌에서 치뤄진 평화 회의는 완만했지만 문제는 해결 되지 않았다. 영토, 종교, 배상금, 그리고 전후의 제국의 체제도. 전례가 없는 수의 참가국의 의견은 종전을 향하면서 하나로 굳혀졌다. 그것은 신성 로마 제국과 스페인왕── 세계를 재패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확실한 패배를.
그리고 승자인 프랑스와 개신교 제국은 물론 패자인 합스부르크 가문조차 전쟁의 결과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30년간의 전쟁은 모든 국가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모두가 대전쟁이 초래한 영토의 황폐해진 땅을 보고 눈을 감았다 너무나도 많은 자들이 목숨을 다했다. 예전부터 세계는 한계를 맞이하고 있었다.
1648년 봄. 평화는 다가오고 있다. 네덜란드와 스페인은 먼저 휴전에 들어갔다. 하지만 베스트팔렌에서의 외교관들의 노력과는 달리 군인들은 자신의 마지막 투쟁을 끝내려 하지 않았다. 정식으로 조약이 맺어지고 축포가 울리는 날 까지 죽이는 걸 멈추지 않겠다고 결의를 다짐했다. 튀렌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브란겔 장군이 이끄는 스웨덴군과 합류를 마쳤다. 그리고 지금도 군세를 남쪽으로 향해 바이에른의 대지를 다시 유린하고 있다.
“──왕녀전하.”
레미는 그녀의 호칭을 불렀다. 그는 재작년 가을의 그 연회날 이후로 마리아를 왕녀전하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자비심을 기리는 그 말은 주문과도 같은 확고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방에서 안정 되지 않은 시선으로 창 밖을 바라보고 있던 마리아는 천천히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돌아봤다.
“아아, 레미입니까…… 왜 그러시죠?”
레미는 눈썹을 찡끄렸다. 마리아가 섭정으로 취임한지 곧 6년이 된다. 허무한 웃음을 띄우는 그녀의 표정은 24세의 표정이라고는 볼 수가 없었다. 과도한 중압감에 시달려 정신이 마모되어 미래를 잃어버린 표정이었다. ──레미는 본 적은 없지만 이 표정을 알고 있다.
“……북쪽의 프랑스군에 대한 정보가 들어와서 전하러 왔습니다.”
“그렇습니까. ……수고하십니다.”
“당신은 지금 뭘 하고 계시죠?”
“……밖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밖 말입니까.”
“예. 사랑스러운 아델스리드의 대지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열려있는 창문에서 바람이 불어 마리아의 황갈색 머리카락을 상냥하게 흔든다. 그러나 레미에겐 그녀가 이러한 미풍에도 부셔질 것만 같았다. 초조함에 터질 것만 같은 심장을 억누르기 위해 그는 가슴팍을 누르고 있다.
“레미……?”
침묵하는 기사를 마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표정을 살피는 것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레미가 갑작스레 마리아의 팔을 붙잡아서 오래 바라보지도 못했다.
“밖으로 나가죠. 왕녀전하.”
“밖……이요?”
“당신이 사랑하는 성백작국을 그 피부로 느끼시는 겁니다. 말은 타보신 적 있으시죠?”
“예. 탈 줄 압니다만…… 보고는요?”
“그런 건 나중에 해도 됩니다.”
레미는 마리아를 방에서 끌고 나왔다. 그대로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복도를 뛰어가기 시작했다. 곧바로 마구간으로 가 두 사람 몫의 안장을 재빠르게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거 참, 보기 힘든 분이 보기 힘든 장소에 있구만요.”
목소리의 주인은 빌헬름 라벨이었다. 그는 신기하다는 눈으로 마구간에서 서성거리는 마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샤라크 경이 밖에 나가자고 해서요.”
“그렇군요. 그래서 여기에. 수고하십니다.”
“라벨 장군이야말로…… 훈련이 힘드시지 않나요?”
“예, 뭐. 돈을 받는 만큼은 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는 예전의 마상창시합때 입었던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있었고, 손에는 랜스를 쥐고 있었다. 목제 모의 랜스가 아니라 끝이 날카로운 원뿔형의 철봉이 라벨의 키보다 두 배만큼 뻗어있다. 진짜 랜스다.
자신의 말과 전령용의 작은 말에 안장을 올린 레미가 두 말을 이끌고 두 사람에게 돌아왔다. 라벨이 있는 건 예상 외였는지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은…… 그 훈련인가. 고생 하는군.”
“아뇨 아뇨.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제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요. 이 모습은. 병사들이 쳐다보는 것이 좀 문제긴 하지만요.”
라벨이 랜스를 하늘로 향해 치켜드니 랜스의 곡면이 태양빛을 반사해 반짝였다. 그것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어린 아이가 지을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리아 각하와 나갔다 올테니 경비는 맡겨두겠다. 라벨.”
“경이야말로 스웨덴의 용기병이랑 마주치는 짓은 하지 말아주십쇼.”
“그럴리 있겠냐. 만일 그러더라도 이 칼로 양단 내버리겠어.”
레미는 대담한 미소를 띄우며 허리에 걸친 양검을 건들였다. 그리고 마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갑시다. 성 밖으로. 당신의 고향으로.”
‘말에 타는 건 오랜만이다. 애초에 요 수년간 아델스리드 성을 나간 기억조차 없다. 언제나 성 안에서 정무에 쫓기고 가끔씩 창문에서 내가 통치하는 대지를 바라보기만 했었다.’
마리아는 흔들리는 시야 안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승마술을 그녀에게 가르쳐준 건 죽은 아버지 게오르크다. 그는 말에 남다른 애착을 품고 있었다. 전장에서도 항상 말을 타고 있었을 정도로.
“……안 탄진 꽤 됐지만 몸은 기억하고 있네요.”
적어도 섭정에 취임하고 나서는 승마를 할 여유같은 건 없었다. 그런데도 지금 확실히 손에 고삐를 잡고 아델스리드의 대지를 달리고 있다. 바람을 가르고 산뜻한 초봄의 공기를 가득 들이마시고 있다.
가을에 심은 호밀 씨앗은 혹독한 겨울의 추위를 견디고 신록의 봄에 일제히 싹틔웠다. 조금 전까진 흙색이었던 땅은 아름다운 연녹색으로 뒤덮였다.
“아름답네요.”
들길을 달리는 두 사람의 말은 그렇게 빠르진 않다. 전장에서의 기민한 움직임에 익숙해진 바실리우스 바실리온에겐 속이 탈 정도의 속도다. 그래도 마리아에겐 이 정도가 딱 적당했다. 끝없이 펼쳐져있다고 생각 들 정도의 호밀밭은 그녀의 시선을 고정시키는데 충분했다.
“잠깐 멈출까요.”
앞서가던 레미는 손으로 마리아의 말을 멈춰 세우고 자신의 말도 그 자리에 멈춰 세웠다. 몸에 가해지는 진동이 바뀐 것으로 경치에 빠져있던 마리아가 드디어 자아를 되찾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멈출 거면 말 좀 해주세요.”
불만스러운 표정의 마리아를 보고 레미는 어깨를 움츠렸다.
“말했습니다만. 왕녀전하가 듣질 않으셔서 조금 무리해서 멈췄습니다. 그대로 계속 달렸으면 그것대로 위험했거든요.”
“……으.”
“그렇게까지 빠질만큼 아름다웠습니까? 아델스리드의 대지는.”
레미의 말을 들은 마리아는 재차 확인하려는 것처럼 신록의 대지로 시선을 옮겼다. 바람을 받은 호밀잎이 나부끼면서 기분 좋은 소리를 총명한 주군에게 내고 있다. 그리고 밭의 저편에는 작은 농촌이── 아델스리드 성백작국의 서쪽 끝, 추스마르스하우젠 마을의 민가가 드문드문 보인다.
“네, ……가까이서 보니 이렇게나 훌륭한 것일줄은 몰랐어요.”
“이게 당신이 다스리고 있는 국가의 대지입니다.”
“쉽게 믿기는 힘드네요.”
“이 은총은 모두 당신의 공적입니다. 당신이 고생했기에 이 황폐한 제국에서 이런 산뜻함이 존속하고 있는 겁니다.”
“……아아 그런건가. 그런가보네요.”
마리아의 감긴 눈에는 눈물이 나오진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뇌리에는 6년간 몹시 바빴던 나날의 기억의 단편이 물거품처럼 나타났다 사라져갔다.
“제가 아버님의 공석을 메꾸는 것이 됐나보네요.”
마리아의 통치는 구제이기도 했다. 마리아가 통치하는 영지의 시민들은 이렇게 올해도 싹틔우는 것이 가능했다. 이 초록 호밀밭이 섭정 마리아로서의 치세가 잘못 된 게 없다는 것의 증명이다.
현 성백작 프리드리히는 아직 성인이 아니다. 마리아의 섭정으로서의 통치는 계속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아직 반환지점 밖에 오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이제 곧 전쟁이 끝난다. 조금만 더 수개월만 더 이 평온을 유지할 수 있으면 전부 보답받을 것이다. 별 탈 없이 프리드리히에게 이 성백작국을 넘기는 것이 가능하다. 섭정을 끝마치는게 가능하다.
그런데도 왜 세계는 이렇게나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인가.
자신이 경건한 신자인데도 왜 신은 이렇게나 무자비한 것인가.
“레미.”
마리아의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
“방금 전에 제 방에서 말하려고 했던 걸 말해 주실 수 있습니까?”
“말하려고 했던 것이라니요?”
“제게 보고가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성에 돌아가서 진정 되시면 그 때 말하겠습니다.”
“명령이에요. ……지금 여기서 말해주세요.”
레미는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눈동자를 가렸다. 마리아는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눈 앞에 있는 대지를 바라보고 있다. 바늘방석과도 같은 침묵이 자나간 후 레미는 죄를 고백하는 것처럼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프랑스와 스웨덴의 연합군이 남하를 시작했습니다. 벨트 장군의 황제군도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 같습니다.”
“네…….”
“벨트 장군은…… 우리 영토의 추스마르스하우젠에서 방어진을 펼치고 마지막 결전에 임한다고.”
“아아──”
마리아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태양이 지금이라도 당장 가라앉을 것 같았다. 그 빛이 너무 눈부셨다.
“여기가 전장이 되겠군요.”
아델스리드 성의 회의실은 선대 게오르크 사망 보고가 전해진 6년 전의 그 날부터 계속 침통한 공기가 가득 차있다. 용병대장 라벨은 평소의 쾌활한 웃음기가 없어지고 재상 아르님도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남은 신하들도 함부로 말을 꺼내려 하지 않았다.
“추스마르스하우젠의 황제군은 약 3만 5천. 진군중인 프랑스, 스웨덴 연합군은 황제의 간첩에 의하면 3만.”
그 안에서 군사 회의를 도맡는 건 총사령관 레미다. 그는 보고가 적혀있는 양피지를 책상에 펼쳐놓고 담담하게 현 상황을 보고했다.
“수로는 황제군이 앞서지만 사기나 장비는 연합군에게 크게 밀리겠지요. 지금의 황제군은 말하자면 오합지졸들입니다.”
신성 로마 제국군을 구성하고 있는 건 황제 직속의 부대와 벨트 장군의 부대, 그리고 갑작스레 참가하게 된 바이에른 선제후국의 부대다. 일단 벨트 장군 휘하로 지휘 계통은 통일 되어있지만 굳건하지는 않다.
“한 편 연합군을 이끌고 있는 건 프랑스의 튀렌 장군과 스웨덴의 브란겔 장군. ……둘 다 유능한 사령관입니다. 황제군의 수적 우위가 그들의 우위성을 이길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황제군이 더 불리하다는 것인가요.”
“……네.”
모두가 입을 다무는 절망 속에서 마리아는 마치 평소의 회의처럼 태연한 표정으로 서류를 바라보고 있다. 그녀를 바라보는 신하들은 훌륭한 섭정이라고 숭경하는 마음을 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굳건한 점은 허세다. 레미는 그걸 알고 있다. 그래서 레미는 그런 슬픔을 감추기 위해 군사 회의를 계속 진행했다.
“황제군 측도 그건 인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벨트 장군에게 통보가 왔습니다. ──우리 황제군은 성백작군에게 원군을 요청하지 않을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성백작국에게 원군을 보낼 일도 없을 것이라고.”
침묵을 유지하던 신하들이 그 순간 술렁이기 시작했다. 레미가 읽은 벨트 장군의 통보는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신하 중 한 명이 책상을 두들기면서 방 밖까지 들릴 정도의 큰 목소리로 외쳤다.
“황제 전하는 우리들을 버릴 생각인건가!?”
그를 비난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 감정은 모두가 품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레미는 매우 냉정하게 대답했다.
“황제 전하가 아닌 벨트 장군의 의사입니다. 그리고 황제군이 모든 제국 영방을 방위 해지 못했던 건 원래부터 그래왔었고.”
“허나 이 상황이 계속 되면 우리 성백작국이 멸망할 거라고!”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 영토를 어떻게 해서든 사수 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아델스리드 성백작국군이 있고, 3년 간의 훈련이 있었던 것 아닙니까.”
범잡을 수 없는 분위기를 내뿜는 레미를 보고 패기를 잃은 신하는 숨죽은듯 의자에 앉았다.
“이건 우리군뿐만 아니라 황제군도 우려하고 있는 일입니다만── 연합군의 분견대가 우회해 황제군 본대의 뒤를 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뤼첸 전투의 파펜하임 장군처럼. 아니면 비트슈토크 전투에서의 바넬 장군처럼. 그럼 과연 추스마르스하우젠에서 그 분견대는 어딜 지나갈 것인가.”
레미의 시선이 좁아진다.
“──저희가 지금 있는 이 장소. 아델스리드일게 분명합니다.”
파도가 휩쓸고 간 것처럼 한 번에 모든 잡음이 사라졌다. 모두가 말을 잃고 침을 삼키고 있었다.
“샤라크 경…… 적이 분견대를 보낼 확률은 어느정도 입니까?”
“높겠지요. 대열을 갖춘 군이 이동해도 3시간이 안 걸릴 짧은 거리입니다. 기동력이 우수한 스웨덴군이라면 시간을 더 단축 하는 것도 고려해봐야 하고. 또한 황제군을 기습하지 않더라도 연합군에게 있어서 불확정 요소인 아델스리드군을 억누르고, 측면을 노리는 가능성을 배제하는 건 좋은 수가 아니죠.”
“그럼 샤라크 경은 어떻게 대처할 생각이시죠……?”
레미는 책상 위에 지도를 펼쳤다. 아델스리드 성백작국의 대부분이 그려져있는 간단한 지도이지만 지금은 이걸로 충분하다.
“아델스리드의 북쪽에 위치하는 성백작령 벨덴…… 작은 농촌입니다만 여기에 우리 군을 배치하고 적의 분견대를 요격하는 겁니다.”
그의 손가락은 벨덴의 문자를 가르켰다.
“벨덴도 저희 영토입니다. ……가능하다면 마을에 도착하기 전에 적을 격퇴 하고 싶습니다만.”
“어렵습니까?”
“아마도 그럴겁니다.”
“그럼 벨덴의 시민들을 빨리 피난 시키지요.”
“면목없습니다.”
마리아도 의자에서 일어나 지도를, 아니면 레미의 손가락을 집어 삼키는 것같은 눈으로 지켜봤다. 이 하얀 손가락이 자신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면서.
“벨덴에서 적을 막아 세우는 것이 불가능 했을 경우엔 벨덴에서 아델스리드까지 가는 길에서 결전에 임합니다. 이 길은 좁고 지형도 우리가 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수적 열세가 있더라도 호각 이상으로 싸우는 것이 가능하다고 확신합니다.”
“……알겠습니다. 부탁드려요, 샤라크 경.”
“제 목숨과 바꿔서라도 적을 격퇴하겠습니다.”
──거짓말을 했다.
현재 아델스리드 성백작국군의 규모는 보병과 기병을 합쳐서 약 2천 정도다. 그들은 많은 훈련을 받은 굳센 병사들이지만 그걸 극복할만한 수의 차이도 한도가 있다.
만일 연합군이 대처 불가능한 규모의 분견대를 아델스리드 방면에 보낸다면. 레미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비는 것 밖에 못한다. 희망적 관측에 맡길 수밖에 없다. 이게 무슨 전술인 것인가.
그리고 그 과거에서부터 자신이 아무런 변화도 없다는 걸 자각한 레미는 질식할 정도로 가슴이 괴로워졌다.
매우 밝은 밤이었다. 아름다운 보름달이 아득한 하늘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다.
군사 회의가 있었던 밤, 마리아는 잠을 들질 못했다. 가슴이 술렁인다. 이 술렁임이 전란이 코 앞까지 다가와서 생긴 긴장인 것인지는 그녀도 알지 못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걷으니 창문에서 보이는 성의 벽은 달빛이 비춰져 익숙한 낮의 광경과는 또 다른 인상을 주고 있다. 감시탑에는 등불이 켜져있고 경비병이 지루한듯 성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리아는 시선을 벽에서 정원으로 옮겨 병영과 훈련장, 주방, 그리고 예배당으로 옮겼다.
“어라……?”
문득 마리아는 깨달았다. 예배당의 문이 열려있는 것을. 교회와 관련 된 자가 문을 닫는 걸 잊어버린 것인지 안에 불이 켜져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예배당의 문이 열려있을 뿐인 것이다. 별 일 없는 작은 이상이다. 그런데도 마리아는 그 순간은 무시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네글리제 위에 가벼운 외투를 걸친다. 그리고 소리를 내지 않게끔 문을 열고 방에서 나왔다. 성의 최고 권력자가 초대받지 않은 손님처럼 성의 내부를 살금살금 걸어가고 있다.
“누가 있는 걸까……?”
예배당까지 들키지 않고 도착한 마리아는 예배당의 문을 주뼛주뼛 들여다 봤다. 다행이도 스탠드 글래스를 통해 비쳐오는 보름달의 빛이 안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게 해줬다.
──그녀의 눈에 비치는 건 작은 사람의 모습. 등을 돌리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수가 없지만 저 청갈색의 머리카락은 이 성에 단 한 명밖에 없다.
“레미……입니까?”
마리아의 작은 목소리는 예배당의 안에서 메아리쳐 그의 귀로 확실하게 들어왔다. 레미는 천천히 뒤돌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예배당에 들어오는 마리아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는 예배당의 중앙, 십자가에 사지가 매달려있는 그리스도 상과 성모 마리아의 스탠드 글래스의 아래에 무릎 꿇고 있었다. 그 모습은 어떻게 봐도 신에게 기도하는 경건한 신자의 모습이었다.
“왕녀, 전하…….”
그는 예배당에 들어온 것이 마리아라는 걸 이해하고 고개를 크게 숙였다. 마리아도 이 상황을 이해 할 수가 없어 발걸음을 멈췄다.
“레미. 당신…… 신을 안 믿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 안 믿는 건 사실입니다. 저는 신을 버렸지요.”
그 말에 망설임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레미는 평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럼 왜 여기에 있으시죠?”
“저도 옛날엔 신자였습니다. 그래서 제 힘만으로는 안 되는 상황을 성공 시켜야 할 때 신에게 기도하고는 합니다. 결국 얻는 건 없지만 말이죠.”
혼자서 해결 못한다는 건 아델스리드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틀림 없었다. 그래서 마리아는 레미를 추궁하지 않았다.
그래도 마리아에게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레미의 과거다.
그는 신을 버렸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마리아의 모습이 과거의 자신과 비슷하다고 했다.
레미는 많은 걸 얘기하지 않았다. 6년 간 그에게 알아낸 정보는 적다. 마리아는 그가 말하고 싶지 않다면 추궁하지 않겠다고 계속 억눌러왔다. 그리고 계속 입을 다물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마리아는 레미에게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두번 다시 물어볼 기회가 안 올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뭣보다 기사가 전투에 임하기 전에 주군으로서 알아야만 한다고 직감했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예배당의 문을 완전히 닫았다. 그리고 일어선 레미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챈 레미는 침을 삼켰다. 마리아는 확고한 의지를 가진 눈동자로 그를 계속 응시했다.
그리고 질문을 한다. 그의 본질을 알기 위한 질문을.
“당신은 여태까지 무엇을 경험했습니까?”
레미는 순간 온 몸이 떨렸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심연에 마리아가 손을 뻗어 무언가를 찾을려는 감각. ──그러나 마리아의 손은 행복감을 레미의 안에 놓았다. 마리아에겐 알려줘도 괜찮다는 레미의 마음이 마리아의 진지한 눈동자에 응한 것이다.
“……왕녀전하.”
“네.”
“저는 모든 것을 숨기고 전장에 임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면 모두가 불행에 빠질 일이 없으니까요.”
“네.”
“……당신에겐 각오가 있나요? 당신이 믿는 기사의 본질을 알고, 그 몸에 엉겨 붙은 오물을 견뎌낼 각오는 있습니까?”
그의 말은 너무나도 무기력했다. 그의 주먹은 피부가 갈라질 정도로 꽉 쥐고 있었다.
레미는 무서운 것이다. 마리아에게 각오를 요구해도 자신에겐 그런 각오는 없었기에.
그래서 마리아는 레미의 차가운 뺨에 손을 뻗어 지금이라도 당장 울 것같은 그의 얼굴을 보며 자애를 담아 웃었다.
“각오 같은 건 필요 없죠. 제게 있어 레미는 유일무이한 자랑스러운 기사이니까요.”
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덧없는 미소를 띄웠다.
“당신을 섬길 수 있어서 정말로 좋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씩 벗겨나갔다. 천천히. 침착하게. 그리고 전부 벗겨낸 후 블라우스를 떨어뜨렸다.
마리아의 눈 앞에 나타난 건 복부에 덮여있는 천이었다. 마리아의 표정을 확인한 레미는 결의를 다진듯 숨을 들이마시고 천의 끝자락을 잡아 벗겨냈다.
“당신은…….”
마리아는 숨 죽였다. 레미의 상체가 달빛에 비춰져 윤곽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 선은 약간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뭣보다도 레미의 복부에는 작지만 여자의 유방이 존재하고 있었다.
“제 이름, 레미 폰 샤라크는 가명입니다.”
예술적으로 아름다움을 가진 레미의 모습에 마리아는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이름은 ……레밀리아 스타코지우. 먼 옛날의 왈라키아 태생입니다.”
그는──아니 그녀는 진명을 주군에게 바쳤다.
“스타코지우…….”
“왈라키아 말입니다만. 의미하는 뜻은 샤라크와 같습니다. 깊은 진홍색. 제 자신과 같은 진홍색. 제 과거인 진홍색. 제 고향을 집어삼킨 화염과 피의 진홍색.”
“레밀리아…… 당신은.”
“레미면 됩니다. 당신에겐 그렇게 불려왔으니까요.”
그녀는 자신의 나체를 숨길려 하지 않고 마리아를 정면에서 계속 응시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레미는 당장이라도 보름달의 빛에 사라질 것같을 정도로 불안정한 존재로 보였다.
“레미, 지금 왈라키아의 화염과 피라고 말하셨죠?”
“예. 그랬죠.”
“그건 언제의 이야기 인 거죠……?”
레미는 마리아를 보며 웃었다.
“분명 2백년 전. 블라드 체페슈의 시대에요. 제 뇌리에는 그와 오스만투르크인의 전쟁으로 인해 불타는 왈라키아의 대지가 새겨져서 잊혀지질 않아요.”
“레미.”
“저는 말이죠. 왕녀전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생물이 되버렸어요.”
마리아에게서 탄식의 소리가 새어나왔다.
자신을 바라보는 레미의 눈동자가 암흑과도 같은 검은색에서 선혈같은 붉은 색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마치 피를 눈에 뿌린 것과도 같았다.
하지만 레미는 태연하게 서서 얼굴이 굳어버린 마리아를 향해 상냥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스트리고이…… 조국 왈라키아에서 저와 같은 자를 칭하는 말이에요. 인간과 가축의 심장을 먹고, 역병을 몰고오고, 인간의 피를 마시는 악마. 제 본질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시체죠. 이미 죽었던 육체가 지금 이렇게 무덤에서 나와 뻔뻔스럽게 현세를 활보하죠. 이걸 여기의 말로 표현하자면, 그래──”
“──흡혈귀.”
마리아는 레미의 붉은 눈동자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눈을 떼버리면 의식이 빨려들어갈 것같을 정도로 그 색은 깊고, 꺼림칙하고, 멀었다. 인외를 마주한 본능이 범상치 않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도망치고 싶다는 충동이 온 몸을 맴돌고 있다.
동시에 마리아는 레미의 눈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레미의 전부를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붉은 눈, 청갈색의 머리카락, 작은 키, 가느다란 몸, 작은 유방, 그리고 흡혈귀라는 그녀의 본질. 이것들은 위태로운 조화 속에서 예술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스탠드 글래스에서 비쳐오는 달빛은 밤의 주인인 그녀와 매우 어울리는 빛이었다.
레미는 자신의 과거를 말하기 시작했다.
“2백년 전, 지옥의 왈라키아에서 저는 한 번 인간으로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흡혈귀로서 새로운 삶을 얻게 됐죠. ……옛날의 저도 신을 믿는 소박한 소녀였습니다. 다가오는 이교도도, 신앙을 가지고 맞선다면 반드시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죠.”
그 일말의 희망은 무로 돌아갔다. 오스만투르크인은 왈라키아를 유린했고 시민을 수호할 영주, 블라드 체페슈도 시민을 돌이켜볼 여유가 없었다.
“신의 가호가 없어진 나라에서 저는 신을 버렸습니다. 하지만 신을 버리고 흡혈귀가 되어서도 전 무력하기만 했죠. ──살아있는 시체가 바꿀 수 있을만 한 건 이 세상엔 별로 없더라고요.”
“……그래서 당신은 권위를 원하는 것인가요?”
“네. 저는 자신을 귀족이라고 규정 지었습니다. 흡혈귀의 보잘 것 없는 힘으로 권위라는 무기를 얻고 싶어서…… 그렇게 2백년 간 그저 검을 잡고 있었습니다.”
레미는 머나먼 시간의 흐름을 확인 하는 것처럼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는 꽃이 피는 것처럼 검을 잡기에는 너무나도 가느린 손가락을 하나씩 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흡혈귀의 목숨은 인간보다 아득하게 깁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개의 이름과 하찮은 지위를 가지고, 금방 버렸습니다.”
귀족 레밀리아는 흡혈귀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인간의 수보다 더 많은 인간을 전장이라는 감정이 극한까지 치닫는 공간에서 자신의 존엄을 위해, 일시적인 지위를 위해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죽였다.
그리고 늙지 않는 몸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귀족이 되려는 순간 그 부조리함을 똑똑히 보여줬다. 피할 수 없는 한계였다. 그래서 레밀리아는 사람들을 죽이고 죽여서 얻은 자기 자신을 쉽게 죽이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다.
“그 행위에 의미는 없습니다. 저라는 존재는 2백년 전에 죽었으니까요. 수많은 시체들 위에 올려진 이 레미 리터 폰 샤라크라는 이름도 금방 역사의 틈으로 사라져버릴 운명이죠.”
하지만 지금은.
“왕녀전하.”
불안정한 붉은 눈은 마리아를 꿰뚫는다.
“저에겐 이 아델스리드가 예전의 왈라키와와 겹쳐보입니다.”
레미는 고개를 저으며 방금 했던 말을 바로 부정했다.
“제게 있어 분명 아델스리드의 영토는 아무래도 좋을겁니다.”
“그건.”
“당신이.”
레미는 마리아의 말을 막아 세우고 말투를 강하게 바꿨다.
“아델스리드가 왈라키아와 같은 운명을 걷는 것도 상관없어. 하지만 당신이 나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는 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돼.”
분노를 참으며 이를 악무는 레미의 주위는 잔잔하던 예배당의 공기가 떠는 것처럼 보였다.
“신을 버리고 시간을 잊은 흡혈귀가 된 끝에 있는 건 고문과도 같은 고독입니다. ……당신이 그 고문을 당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의 존재를 믿고, 인간인채로 죽어야 합니다.”
“정말이지…… 제멋대로네요. 당신은.”
성모와도 같은 웃음을 띄우는 마리아는 불쌍하다는듯 레미를 바라봤다. 그 시선은 너무나도 부드러웠기에 레미의 마음 속에 불타오르던 열정이 수그러들었다.
마리아는 양 팔을 뻗어 레미를 불렀다. 그녀는 조금 망설였지만 주군의 팔 속으로 들어가 마리아의 등에 자신의 팔을 상냥하게 유리 세공을 하는 것처럼, 온기를 원하는 것처럼 강하게 끌어안았다. 서로의 목을 교차하고 마리아의 아름다운 옆모습에 레미는 뺨을 문질렀다.
그렇게나 많은 전장을 뚫고 나왔음에도, 죽지않는 흡혈귀임에도, 레미의 알몸은 비단같이 부드럽고 안에서 열이 느껴졌다. 마리아의 잠옷 너머로 두 사람의 가슴이 맞닿아 서로의 심장 소리를 울린다.
“……왕녀전하.”
“네.”
“저는 당신을 위해 싸웁니다.”
“네.”
“당신이 저와 같은 길을 걷지 않기 위해, 죽지 않는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울 겁니다.”
“……네.”
“부디 폰 샤라크라는 이름의 최후를 지켜봐주세요.”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더욱 더 세게 끌어안았다.
예배당에 비치는 달빛은 그리스도상 앞의 성모와 악마를 비춘다.
분명 이것은 배덕일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주군은 충성을 맹세한 기사가 흡혈귀일지어도 그 기사와 마음이 상통했다. 이것이 기사도의 진정한 모습이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날이 밝을 때까지 계속 가만히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