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왕녀와 흡혈귀 - Remy Ritter von Scharlach
[번역] 왕녀와 흡혈귀 - Prinzessin Maria Margarethe von Adelsried
[번역] 왕녀와 흡혈귀 - Her Royal Highness Princess
[번역] 왕녀와 흡혈귀 - Prinzessin und Vampir (1)
[번역] 왕녀와 흡혈귀 - Prinzessin und Vampir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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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나 전장을 헤쳐 나온 레미도 코를 찌르는 독특한 화약의 냄새는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만 단위의 군대가 격돌하는 전장은 순식간에 그 일대가 머스켓 총의 연기로 뒤덮여서 폐가 약한 귀족 출신의 장관들은 계속 기침만 하기에 쓸모가 없었다.
“……발사!”
레미가 지시를 내리면 가로로 늘어선 총병들이 머스켓 총에서 굉음과 연기와 함께 총알을 발사한다. 운이 안 좋아 가슴이나 배에 총알을 맞은 프랑스 총병은 피를 토해내며 쓰러진다. 이윽고 전우의 복수를 하기 위해 프랑스군의 머스켓이 불을 뿜어내고 황제군의 총병들이 죽어갔다.
전장이 이러한 양상을 띄우게 된지는 얼마 안 됐다. 14년 전, 제 1차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스웨덴 왕 구스타프 아돌프는 장창을 중심으로 한 테르시오라는 진형을 사용하는 황제군을 대적해 머스켓 총의 화력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전술──발상의 시작은 네덜란드였다──을 사용해 완벽하게 제국군을 격파했다.
그 이후 각국의 군대는 서서히 스웨덴과 네덜란드를 따라해 화력에 중점을 둔 편성으로 전환했다. 이렇게 현재의 전장은 총음과 연기가 가득 차게 되었다. 혼돈의 세계가 도래한 것이다.
레미는 언제나 입던 플레이트 갑옷을 입고 자신의 애마 위에서 지휘를 내리고 있었다. 손에는 치륜총을 쥐고 자신의 지시에 맞춰 발포했다.
“발사!”
프랑스군에게 뒤쳐지지 않도록 레미는 휘하의 총병들에게 신호를 내렸지만 황제군이 열세라는 건 자각하고 있다. 거기다 적의 대포에서 날아온 철포탄이 아델스리드 성백작국군의 총병을 그 뒷자리를 메꾸고 있는 창병과 함께 죽였다. 그 피해의 규모는 그렇게 크진 않다. 하지만 부대가 공황 상태가 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은 레미에겐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샤라크 경!”
목소리를 듣고 뒤돌아보니 본대의 전령을 들고 온 기병이 탄을 뚫고 돌아오고 있었다. 레미는 고삐를 땡겨 말을 최전선에서 이탈 시키고 안전한 장소에서 전령과 합류했다.
“바이에른 군은 어떠지?”
“절망적입니다. 도랑에서 지키고 있던 대포를 빼앗겼습니다. 패배하는 건 시간 문제 일 것 같습니다.”
“메르시 장군은 뭐라 했는데?”
“장군은 전사 했습니다.”
“……큿.”
아델스리드 성백작국이군 근처에는 황제 직속 기병대가 카라콜 사격──말의 기동력을 이용해 적에게 접근하여 권총을 쏘고 바로 퇴각하는 전술──으로 분전하고 있었지만 머스켓 총병이 사거리로 이기기에 금방 기병들을 흩뜨렸다.
──한계가 왔나.
레미는 드디어 각오를 다졌다.
“라벨!”
다시 보병대에 달려들어 레미와 교대해 서열 제 2위에 어울리는 지휘를 펼치던 라벨을 불러냈다.
“퇴각한다. 뒤는 맡기지.”
“……알았다.”
최전선에 있던 라벨은 아군이 한계가 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철퇴에 대해서 불만을 표할 일은 없을 것이다. 일단 피해가 심한 총병을 물러내고 장창을 가진 창병들을 앞에 배치하고 병사들이 섞이지 않도록 세심하게, 천천히 후퇴하며 적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난다. 라벨은 체격에 어울리는 우렁찬 목소리로 군대를 지휘했다.
아델스리드 성백작국이군 휘하의 기병대를 이끌고 퇴각을 원호하던 레미는 로마 제국군 본대가 있는 방향을 슬쩍 봤다. 제국군은 프랑스군에게 압도당해 제각기 후퇴하고 있었다.
“또 져버린 건가. 우리는.”
이렇게 뇌르틀링겐에서 일어난 전투는 신성 로마 제국군의 패배로 끝났다.
1645년. 프라이부르크 전투에서 1년, 전쟁 시작 후 27년이 되는 해다.
“……뇌르틀링겐이 함락 된 건가요.”
레미가 브라이텐펠트에서 아델스리드 성까지 귀환하는데 걸린 시간은 1개월이었다. 다음 프라이부르크에서는 2주일. 그리고 뇌르틀링겐에서 성까지 돌아오는데 걸린 시간은 4일이었다. 이제 프랑스군은 아델스리드 성의 코앞까지 왔다는 것이다.
마리아는 회의실의 창문에서 늘쩍지근하게 밖을 바라보며 레미에게 보고를 듣고 있었다. 레미와 처음 만난 그 날과 비교해보자면 그녀는 나이와 안 어울리게 매우 야위었다.
“그들은 금방 다다를 것 같나요?”
“방심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도나우 강을 넘기 전에 겨울이 찾아오겠지요. 그리고 제국군도 괴멸하지도 않았고 프랑스군도 어느정도는 피해를 입었으니까. ……아델스리드에 도달하는 건 아직 멀었을 겁니다.”
“그럼 다행이네요.”
“하지만──”
“알고 있습니다. 선제후들도 이제 한계겠지요. 그들이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과 같은 방법을 취할 것도 얼마 안 걸릴 것이고.”
25년이 넘게 진행 된 전쟁은 독일을 매우 황폐한 땅으로 만들어버렸다. 특히 스웨덴이나 프랑스와 가까운 위치에 있는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들은 계속 되는 전투로 인해 자국이 유린 당하고 지속력을 전부 잃고 말았다.
신성 로마 제국은 외국과 비교하면 단일 국가라 하기엔 너무나도 분권적이었다. 국명에 어울리는 영토를 실현하기 위해 역대 황제들이 로마가 있는 이탈리아로의 간섭에 치중해 본거지인 독일의 통치가 소홀해졌고 제후들의 독립성이 더욱 더 높아졌다.
그 결과가 선제후의 존재다. 금인칙서로 정해진 7명의 제후가 선제후로 인정 되어 문자 그대로 그들의 다수결 투표로 신성 로마 황제를 선출해냈다. 현재 5명의 선제후가 가톨릭이고, 2명이 개신교다. 그래서 가톨릭인 합스부르크 가문이 황제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고 있지만 대제후이기도 한 2명의 개신교 선제후── 작센 공국과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의 존재도 절대 작지 않다. 실제 이 대전쟁의 초기에는 거리낌없이 황제에게 반기를 들어 스웨덴과 동맹해 가톨릭 신앙을 강요하는 황제에게 칼을 뽑았었다.
10년 전의 프라하 조약으로 제국의 내전은 일단 종결하고 작센 공국은 황제군과 합류했다.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은 프라하 조약을 무시하고 스웨덴과 단독으로 휴전했다. 당시엔 브란덴부르크를 따른 선제후들은 없었지만 이렇게 다시 스웨덴과 프랑스에게 침략을 당해 황제군이 무력하다는 걸 드러낸 현재 작센 공국이든 가톨릭 선제후인 바이에른 공국이든 돌이킬 수 없는 궤멸을 맞기 전에 그들과 휴전을 단행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다.
“바이에른 공국이 황제군에서 빠져나간다면 프랑스군을 막을 필요도 없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아델스리드의 대지에 늦여름의 차가운 비가 내린다. 창문을 적시는 물방울은 마리아의 비뚤어진 옆모습을 비췄다. 비추고 또 비췄다.
“전 정말로 무력하네요. 전장에 서는 것도 못하고 안전한 성에서 당신의 승리를 허공에다 빌고 있으니. 그리고 지금은 프랑스군이 여기에 오지 않기를, 오기 전에 평화 협정이 맺어지는 걸 빌기만 할뿐…….”
마리아는 뒤를 돌아 레미를 보며 덧없는 웃음을 지었다.
“샤라크 경. 당신은 신이 있다고 믿으시나요?”
“……저는.”
“전 있다고 확신해요.”
레미는 주군을 말끄러미 응시하는 것 밖에 못했다.
“신의 자비는 있어요. 동시에 신의 심판도 있죠. 이게 신벌이라면 저는 달갑게 받아드리겠지요. 그리고 무자비한 신에게 제 영지의 평안을 기원할겁니다.”
마리아의 눈엔 한 점의 망설임도 없었다. 레미에겐 지금의 마리아는 너무 눈부시기에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고개를 숙인 그는 조금 떨고 있었다.
“……당신에게는 제가 광신도로 보일지도 모르겠네요.”
“아뇨. 감복했습니다. 마리아 각하, 당신은 성모의 이름에 정말로 어울리시는 분입니다. 지금 확신했습니다.”
“샤라크 경…….”
“그래도 잊어버리지 마시길. 인간은 고결한 신의 자비를 믿으면 믿을 수록, 신이 없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끝없는 절망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아니 어쩌면 신은 처음부터 없을지도 모르고 이 세계의 신비 같은 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죠──. 그런 오염에 잠기면 현세에 구제같은 건 없다고 생각 드실 겁니다.”
“예전의 당신처럼…… 말이죠.”
“──네.”
레미의 청갈색 머리카락은 물을 맞은 것처럼 밑으로 쳐져 있기에 마리아는 그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 그는 울고 있을 것이다. 마리아가 자신이 경험한 허무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될 것 같기에. 자신의 한심함 때문에 마리아의 마음을 심연으로 몰아붙이는 것을 참아낼 수가 없었다.
무릎 꿇은 그는 구토하는 것처럼 형태가 없는 말을 계속 뱉어냈다.
부디, 부디, 부디, 부디, 부디.
적어도 당신 만큼은.
순수한 당신 만큼은.
“신에게 매달리지 말아주세요…….”
──마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성모와 같이 자애가 넘쳐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레미는 일전에 자신이 빠졌던 절망을 떠올렸다. 순수한 마리아에게 신에게 버려진 불쌍한 기사의 충고는 닿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녀는 그녀의 방식대로 살아가야한다. 그녀가 최악의 결말을 맞이하지 않도록 세계를 바꿔야하는 것이 충실한 레미 리터 폰 샤라크의 역할이다.
그러나 그건 이루어지지 않는 바람이다. 적은 압도적이기에 운명을 바꿀 수 있지 않는 한 그들은 아델스리드를 유린하고 마리아의 신을 부정할 것이다.
그렇다면.
──고개를 숙인 레미의 검은 눈동자가 인외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신이라는 거짓 된 존재에게 모든 걸 맡기기 전에 그녀의 목숨을 끊어버릴 것이다.
“샤라크 경, 분명 신은 저희를 지켜봐 주고 계실 거에요.”
레미의 시선이 허리에 걸친 양검으로 향했다──
그 순간,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나서 레미는 무서운 악몽에서 깨어났다.
바로 뒤돌아보니 경비병이 회의실의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샤라크 경, 마리아 각하. 라벨 장군이 부르십니다. 할 이야기가 있으시다고.”
병영의 분위기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어수선한 분위기가 사라져 있었다.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용병들이 홀의 한 구석에 가지런히 서있었기 때문이다.
“작년에 당신이 했었던 말, 받아드리도록 하죠.”
라벨을 말을 들은 용병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레미와 마리아도 깜짝 놀랐다.
“괜찮은 건가?”
레미는 깜짝 놀라 물어봤지만 자신의 말이 실수라는 걸 바로 눈치 챘다. 그러나 라벨은 개의치 않고 당당하게 계속 말했다.
“예. 저도 뇌르틀링겐에서 패배를 겪고 인식을 바꿨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프랑스군을 막아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선 용병의 범주를 넘은 훈련도 이 못난 빌헬름 라벨, 그 훈련을 이행하도록 하죠.”
“정말이냐……!?”
“하지만 말입니다. 봉급이 늘어날 수가 없는 이 상황에서 병사들이 납득 하려면 뭔가 결판 낼 게 필요합니다.”
라벨은 험한 눈매로 자신의 상관인 레미에게 거리낌 없이 조건을 내걸었다.
“당신이 저를 이기는 것. 그게 되면 당신의 훈련이라는 걸 받아드리죠.”
“이긴다라……. 그건 상관없는데 뭘로 승부를 낸다는 거지? 설마 날 죽이려는 것도 아닐테고.”
“죽이지는 않죠. 어디까지나 모의전으로 진행 되니까요. 그럼 저와 기사인 샤라크 경이 승부를 내려면 뭐가 적당할 것인지 골라야겠군요.”
의도가 보이는 말투이기에 레미는 라벨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가 하고 싶은 것이 뭔지 찾기 위해. 라벨은 자신의 체격과 안 어울리게 어린애 같이 웃었다.
“설마 라벨…….”
“사랴크 경. 저는 스위스 변방 출신의 평민입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왔기에 말을 타고 사는 것은 필수 불가결이었지요. 그러나── 아니, 그렇기에 이 나이가 되어서도 말을 탈 때마다 구시대의 기사들을 동경하게 되더라고요.”
수 많은 기사도 이야기에서 그려진 기사는 고상하고, 공정하고, 과감했다. 하지만 지금은 기사들이 맡았던 기병이라는 역할은 거의 대부분이 저속한 용병들이 맡게 되었다. 기사 계급은 망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 세상에 기사의 긍지를 1세기만에 부활 시키려고 한다.
“먼지 투성이이긴 하지만 무기고에는 아직 당시의 무기들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한 번 정도라면 무리 없이 사용 할 수 있겠죠.”
얼빠진 표정 표정으로 바라보던 레미는 점점 그가 진심이라는 걸 이해해갔다. 설마 17세기가 반이나 지난 시점에서 이런 걸 할 생각인가.
“마상시합을 하죠.”
용병들도 순간 조용해졌다가 바로 주위에 있는 동료들과 떠들기 시작했다.
“……그걸로 라벨이 요구를 응해준다면 나로서는 상관없지만.”
그걸로 괜찮겠냐는 뜻이 레미의 말에서 묻어나왔다.
“뭔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나는 나 자신을 기사라고 자기 규정하고 있지. 그래서 갑옷을 걸치고 기사로서의 충의를 마리아 각하에게 바치고 있다. 기사의 이름에 걸맞게 랜스도 다룰 줄 알지.”
몇 세기 전의 기사의 무기는 검, 방패, 메이스등 많이 있었지만 가장 상징적인 무기는 랜스라 불리는 기사용 장창이다. 그들은 방어력이 뛰어난 무거운 갑옷을 걸치고, 예리한 랜스를 들고, 단련 되어있는 기마술로 적에게 돌격했다. 그 충격력은 어마어마했기에 그들은 전장의 꽃이 되었다.
마상창시합은 그 기사들의 모의전이다. 창 끝이 무디고 부러지기 쉬운 목재 랜스를 사용하지만 다른 장비는 실전용이다. 그 장비들을 써서 서로 기병 돌격을 하고 상대를 말에서 떨어뜨린 자가 승리하는 방식이다.
즉 레미는 마상창시합을 경험 해본 적이 있다는 것이다. 한 편 라벨은 평범한 용병일 뿐인 그에게 그런 과거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내가 너무 유리한 거 아닌가?”
그런 레미의 말을 듣고도 라벨은 겁없이 웃으며 기사의 자만심을 흘러넘겼다.
“승기를 잡는게 너무 빠르신데요. 샤라크 경.”
용병 대장은 처음부터 패배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당신에게 경험과 자만심이 있다면 제겐 힘과 몸집이 있습니다. 강력의 라벨이라는 이름이 허세가 아니라는 걸 보여드리죠.”
라벨과 레미의 체격 차이는 압도적이다. 그 정도의 거한이라면 모의전용 랜스로 돌격해봤자 미동도 안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레미의 경험도 미지수다. 과연 그 경험이 라벨과의 체격 차이를 극복 해낼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저도 오랜 기간 동안 기병대로 활약해왔습니다. 말을 다루는 실력은 당신에게 뒤쳐지지 않는다고요.”
이건 레미가 라벨의 의도에 걸려 들은 게 아닌가── 뒤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마리아는 그렇게 생각 하고 있었다. 이번엔 기사가 용병 대장의 자아 도취를 비웃을 시간이다.
“그런 말을 잘도 내뱉는군. 라벨. 마상창시합은 힘으로 해결 할 수 있는 성질의 대결이 아니다. 섬세한 힘조절이 필수 불가결이지. 좋다. 이 레미 리터 폰 샤라크, 그 승부 받아들이지. 시작은 언제인가?”
“가능하면 빠른 게 좋겠죠.”
“그러면 3일 후?”
“알겠습니다. 신의 이름을 걸고 최대한 빠르게 준비 해보죠.”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서로 허리에 걸친 양검을 뽑아 머리 위로 맞대는 것으로 회담을 끝냈다. 그 모습은 마치 기사도 이야기에 나오는 기사들의 결투가 시작 되기 전에 나오는 전일담과도 같았다.
다음 날, 마리아는 레미를 찾아 갔다.
“승산은 있는 겁니까?”
“외람되지만 질 것 같지가 않네요.”
그는 성의 마구간에 있었다. 레미가 총사령관이 되고 나서 3년이 지나서야 마리아는 드디어 그의 평소 행동 패턴을 익히게 되었다. 대강 방 아니면, 성의 내부 아니면, 무기고 아니면 마구간이다. 즉 무기와 말 말고는 흥미가 없다는 뜻이다.
견고하지 않는 간이 지붕과 말을 묶고 있는 기둥 밖에 없는 레미가 다니는 장소 중에서 가장 태양빛이 많이 비추는 장소라 생각했다. 마리아가 보기에 레미는 태양빛을 기피하는 것 같이 보였다. 아예 안 쬐는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마상시합을 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저도 그림이나 태피스트리에서 밖에 본 적이 없는데.”
“해본 경험은 없습니다만 랜스로 적군에게 돌격해본 적은 있습니다. 정말이에요.”
“……장창 돌격도 기사도 이야기에서밖에 못 봤는데.”
레미의 애마는 주인의 지위에 걸맞게 마구간 안에서도 설비가 가장 좋은 자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봤자 소규모 국가에 불과한 아델스리드 성의 기준으로 좋은 것이었지만. 기사 레미가 자주 다니고 있기에 마구간의 경비병들은 마구간 손질을 매우 공들이고 있었다.
마리아는 애마의 목을 애지중지하게 쓰다듬는 레미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당신은…… 언제부터 전장을 나섰나요?”
생각해보면 마리아는 그의 경력을 거의 모른다. 레미의 신앙심이 없는 걸 비추어보아 간단히 물어볼 수도 없었지만.
“……선대 게오르크를 따르기 시작한 건 20년 전 입니다.”
“20년!?”
즉 1625년── 당시엔 제국의 종교 내전이었던 이 대전쟁에서 프랑스와 영국의 지원을 받은 덴마크가 개입하고 갑작스럽게 국제 전쟁의 분위기를 띄우기 시작한 시점이다.
“바이에른 공작과 아델스리드 성백작은 동맹 관계였기에, 저도 게오르크 각하를 따라 틸리 백작의 황제군에 참전했습니다. 덴마크와의 전쟁 초기에서 저는 무훈을 올려 기사 작위를 게오르크 각하의 주선으로 작위 받았습니다.”
내우외환이었던 당시라면 다른 임관할 곳도 다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신앙심을 보건대 가톨릭에 붙어야 할 이유도 없고. 마리아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의문이었다. 허나 레미는 웃으면서 애매하게 얼버무렸다.
“소영주였기에 빌붙기가 쉬웠다……고 하면 각하가 화내실려나요?”
“지금의 당신은 기사로서의 완전한 충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와서 그 발단에 토를 달 생각은 없어요. 신경 쓰이는 건 당신이 아직도 왜 여기에 있냐죠.”
마리아의 진지한 눈동자에 레미는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러나 갑자기 응어리를 풀어낸 것처럼 밝은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제가 블라드 체페슈와 관련 된 일족이라는 건 마리아 각하도 알고 계시겠지요. 즉, 조국 왈라키아를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으로의 원한. 그건 기독교 신자라면 너무나도 당연한 인과의 연쇄입니다. 오스만투르크인들은 속국 트란실바니아 공국을 통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 로마 제국을 침공하고 있지요. ──그 용감한 드라큘라 공작의 후예가 사교를 믿는 오스만투르크인에게 복수하기 위해 황제를 섬긴다. 훌륭할 정도로 아름다운 울림이지 않습니까?”
“즉 ……그 말은 거짓이라는 겁니까?”
“애초에 저는 블라드 체페슈의 정식 혈통이 아닌걸요.”
정식 혈통, 그것은 장남이 정식으로 계승하는 혈통. 표현하기에 따라 완전 무관계한 인간은 아니지만 드라큘라 공작은 200년 전, 과거의 인물이다. 정식 혈통이 아니라는 것. 즉 방계 후손은 찾아보면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레미는 그 중 한 명일 뿐인 것이고.
“블라드 체페슈의 이름이 가장 의미를 가지는 곳이 가톨릭이었기에 가톨릭에 있는 것 뿐입니다. 그러니 저는 빌헬름 라벨보다도 더 용병같은 인간이겠지요.”
그림자때문에 윤곽이 희미해진 레미의 얼굴에서, 근심 같은 건 하나도 없이 그저 속마음에서 우러나온 표정은 매혹적으로 보였다.
“……자신의 선조의 이름조차도 이용해 신뢰를 얻고 기사로서 행동한다. 그러면 뭐가 있는 거죠? 당신이 바라는 건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아니면──”
“지위입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고백했다.
“제가 기사라고 자신을 규정하고 기사로서 존재하고 있는 건, 기사도가 제 삶의 방식인 것도 기사도에 제가 감명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제가 하고 싶은 기사는 지배 계급에서의 기사일 뿐이죠. 영토를 가지고, 무력을 가지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귀족으로서의 기사.”
그러면 지금 기사 작위의 지위는 그가 바란 것이 아닐 것이다. 지금의 레미는 영토는 아마 없을 것이다. 신성 로마 제국에서 기사는 엄밀히 말하자면 귀족이 아니니까. 토지를 얻기 위해선 최저한 남작이라도 되야 한다.
──레미는 이전에 출세의 야망을 말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부끄러운 것은 아니다. 기사들의 대부분은 무훈을 쌓아 더 높은 작위를 수여 받았다. 기사와 야심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다.
하지만 그래선 야망의 노예가 아닌가.
야망을 품은 기사가 아니라 야망에 잠긴 기다.
“……환멸 했습니까?”
그는 조롱하는 것 같은 미소를 띄우고 있었지만 그 미소는 마리아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납득은 갑니다.”
──마리아는 동요하고 있었다. 동요하고는 있지만 신하 레미의 속마음을 알게 돼서 그런 건 아니다. 자신이 생각해도 의외일 정도로 그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으로 응어리가 풀린 것 같이 머리가 상쾌해졌다.
“아아, 이게 어찌 된 일인가요. 충의를 맹세한 기사의 본질은 속세와 권력욕에 물든 야만스러운 타국민이었다니──”
오페라 가수처럼 하늘을 우러르며 노래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신화에 나올법한 모습이었지만 레미는 어리둥절해서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걸 본 그녀는 어린 소녀와 같이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건 당연하잖아요. 멸망한 기사가 무덤에서 박차고 나왔는데 공손하게 섬기는 것 보다 야심을 숨긴 용병이 기사의 이름을 사칭하는 것이 이 전란과 모략이 소용돌이치는 세상과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마리아는 기쁘다며 레미의 뺨에 손을 뻗었다.
“3년간 섬기셨는데도 제가 알지 못했던 당신의 그림자를 이렇게 일부라도 저에게 보여주신 것이 정말 기뻐요.”
마리아는 정체 모를 충의보다도 이기주의가 더 낫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레미는 당황했다. 그리고 불쾌하다는 듯 표정을 찡그렸다.
음지에서 나오지 못하는 자신과는 다르게 눈부신 태양 아래서 춤추고 웃고 있는 마리아가 예전과는 다른 모습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에.
상처 자국이 온 몸을 덮고 있는 것 같기에.
그녀는 지금이라도 당장 울어버릴 것 같기에.
“그러니 당신은 그 몸이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이 마리아를 섬겨주세요. 기사 님. 그러면 저도 군주로서 당신의 바램을 이루어 드릴게요.”
레미의 피부는 피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차가워서 마리아는 조금 오한을 느꼈다. 그래도 확인 하기 위해 조금 깊숙하게 만져봤더니 심장에서 전해져 오는 붉은 색의 고동이 그의 피부 안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마치 레미 폰 샤라크의 색을 구현 한 것처럼.
마리아와 레미의 대화도 끝나가고 있었다. 레미가 마리아를 바라보고만 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팔을 뿌리칠 생각도 없는 것 같다.
마리아는 그의 본심을 알게 되어 만족했다.
레미는 그녀의 닳아버린 마음을 불쌍히 여겼다.
그래서 대화는 끝나려고 하지만 마지막으로 마리아는 레미에게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었다. 그녀의 시선에는 마구간에 있는 그의 애마가 있었다.
“그런데…… 당신의 애마에 뭔가 이름은 없습니까?”
실무주의적인 레미라면 말에 이름 같은 건 안 붙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바로 이름이 있다는 걸 긍정하고 애마의 목을 쓰다듬었다. 아름다운 갈색 털이 흩날리는 말은 작위를 가진 레미의 말로 쓰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품격을 가지고 있었다.
“예. 여태까지 수많은 말을 소유해봤지만 이 말은 아무런 불만이 없었습니다. 정말로 좋은 말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지으려고 할 때 상당히 고민 했었죠.”
“그렇죠. 라벨 장군의 말도 굉장하다고 들었지만 당신의 말도 그에 뒤지진 않죠.”
마리아의 말을 들은 레미는 입꼬리가 올라갔다.
“칭찬해주셔서 영광입니다. 분명 이 말도…… 바실리우스 바실리온도 자랑스러워 할겁니다.”
“바실……?”
단어가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아 고개를 기울이는 마리아를 보고 레미는 다시 한 번 말했다.
“바실리우스 바실리온입니다.”
“바실리우스…… 바실리, 우스?”
“온.”
“바실리우스, 바실리온…….”
“네.”
“……무슨 의미입니까?”
“페르시아 황제의 칭호를 그리스어로 표현한 말입니다. 혹시 모르십니까?”
“공교롭게도 전 그 쪽은 잘 모릅니다…….”
샤라크 가문은 종교의 흐름을 그리스어로 교육을 하나 억측했지만 레미는 아마도 부정 할 것 같아서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저 그의 단어를 선택하는 감성은 앞으로 신용하지 않을 거라 결심했다.
마상창시합을 하기 전에 레미와 마리아는 아르님 재상에게 보고했다. 당연히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게 아델스리드 성백작국을 위한 일 일수도 있으니 사후승낙이란 형태로 재상이 추인했다. 그리고 그는 레미와 마리아에게 충고했다.
“법적으로는 마상창시합의 금지령이 아직 살아있을지도 모릅니다.”
마상창시합은 가끔 사망자도 나왔고 비용도 많이 들었다. 귀족이 마상창시합에 열중한 결과 기사로서의 본망을 등한시 여긴다고 생각한 당시의 권력자들이 몇 번이나 마상창시합의 금지령을 발포 했었다. 신성 로마 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은 전쟁 중입니다. 목적이 뭐가 되었건 이 시기에 마상창시합을 한다는 걸 황제나 바이에른 공이 알게 된다면 필요 없는 충돌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즉 쓸데없이 시민들을 불러들이지 말고 몰래 진행하라는 의미라고 레미는 이해했다. 그리고 실제로 마상창시합 당일이 되니 어딘가에서 소문을 들은 시민들이 성을 제 것인 양 관객 행세를 하고 다녔다.
“괜찮은 건가요?”
마리아는 조금 불안해진 표정이었지만 그와 대조적으로 레미는 소란스러운 시민들을 쫓아낼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어디까지나 복안이기에 실행에 옮기려면 라벨과의 상담이 필요합니다만. 각하 저는 앞으로의 군사의 보충, 증원을 국내의 시민으로 충당하려 하고 있습니다.”
“어머.”
“스웨덴을 따라한다는 소리를 들어도 어쩔 수 없지만 고향을 지키는 건 용병보다도 국민들이 사기가 높을 것입니다. 그들의 밭과 집이 걸려있으니까요. 그리고 용병들도 어딘가의 농가의 차남이나 3남 입니다.”
“그래서 그 과정을 좀 줄이겠다. 이겁니까?”
“네. 그래서 그들에게 저희들의 용감한 모습을 눈에 각인 시켜서 이야깃거리로 만들 겁니다.”
“그건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단 라벨 장군에게 질 경우엔 진짜로 복안으로 끝나버릴 겁니다.”
레미는 검은 플레이트 아머를 몸에 걸치고 애마에 올라타있다. 그 바실리우스 바실리온도 주인과 같은 검은 색 마갑을 머리와 복부에 걸쳐 있어서 레미가 들고 있는 랜스가 목제 모조품만 아니었다면 기사도 이야기에서 뛰쳐나온 당시의 기사 그 자체였다.
체격이 작은 레미도 거대한 말 위에 올라타면 시선도 자연스럽게 매우 높아진다. 마리아가 힘들게 고개를 내밀어 시선을 성의 정원으로 향하니 정원 그야말로 축제의 현장이었다.
가장자리는 구경꾼인 시민들과 용병들이 모여있고, 성의 창문이란 창문은 시종과 하인들이 마상창시합을 보기 위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리고 귀인용 관람석은 긴급 사태의 어전 회의 말고는 모이지 않던 신하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굉장히 번잡하네요.”
“기나긴 전쟁으로 인해 그들은 축제를 굶주리고 있었던 거죠. 아니 어쩌면 축제라는 것을 처음 즐기는 자도 있을 겁니다.”
“……저처럼 말인가요?”
“어머.”
그건 레미에게 있어서 솔직하게 놀랄만한 가치가 있는 사실이었다. 성백녀이기에 축제는 한 번이나 두 번쯤은 경험 했을 거라 생각했었지만, 생각해보니 마리아가 태어났을 땐 이미 전쟁이 시작 되어있었다. 철이 들기 전은 몰라도 그 이후는 대전쟁이 격화 되어 있었다.
“그거 괜찮네요. 그러면 각하도 축제의 열광이라는 걸 맘껏 즐기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 어떠한 술보다도 승리의 맛과 향이 좋습니다.”
“말씀 안 하셔도 그럴 겁니다.”
마리아가 조금 불만스러운 듯 얼굴을 찡끄리니, 레미는 기분 좋게 미소를 띄우고 말을 끌고 나갔다. 마리아는 그걸 막아 세우려고 했지만 순간 망설이고 그의 성이 아닌 이름을 불렀다.
“무운을 빕니다. 레미.”
그가 마리아에게 이름으로 불린 것은 처음이었다.
말을 멈춰 세우고 눈을 크게 뜨면서 놀란 그는 상냥하게 웃으면서 아름다운 주군에게 승리의 약속을 바쳤다.
“경애하는 마리아 각하를 위해.”
그렇게 기사는 전장으로 향했다. 그의 앞길에는 마상창시합── 그 중에서도 일기토를 위한 설비가 갖춰져 있다. 길고 얇은 야외의 회랑은 말이 전력으로 달리면 10초도 안 되어서 끝에 다다를 거리다. 그 중앙에는 기다란 울타리가 회랑의 사이에 설치되어 있다. 일기토는 기사들이 서로 반대편을 가로 질러 오른손에 쥔 랜스를 부딪혀 상대를 말에서 떨어뜨려야 한다.
그리고 그 울타리 너머의 반대편에는 레미와 같이 기사 같은 갑주를 두르고 마갑을 두른 말을 타 랜스를 손에 쥔 거한, 빌헬름 라벨이 레미의 방향으로 나오고 있었다.
“……충고 했을 텐데요. 마리아 각하.”
레미를 배웅한 마리아는 그대로 귀인용 관람석으로 이동했지만 그녀를 반기는 건 떨떠름한 표정의 아르님 재상이었다. 다른 신하들은 마상창시합에 흥미진진한 것 같았지만 아르님이 강렬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기 때문에 차마 열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재상은 이 축제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마리아는 그의 옆에 앉았다.
“예. 매우 마음에 안 듭니다. 마상창시합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이래선 완전히 결투 아닙니까? 어느 쪽이 됐든 둘 다 금지 되어있는 사안입니다. 황제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귀찮은 일이 되어버릴 겁니다.”
“어머. 그건 큰 일이네요.”
다른 사람의 일인 것처럼 반응 하는 마리아 덕분에 아르님의 주름은 더욱 더 깊어졌다.
“……그리고 말입니다. 프랑스 왕 앙리 2세처럼 마상창시합을 하다 죽은 사람은 상당히 많습니다. 샤라크 경과 라벨 장군, 둘 중 한 명이라도 잃게 되면 아델스리드 성백작국은 엄청난 손해를 입게 됩니다.”
“그건 쓸데없는 걱정이에요. 아르님 재상.”
“어떻게 그렇게 단언하실 수 있는 거죠?”
이렇게 까지 물고 늘어지는 아르님도 없었다고 마리아는 기쁘게 생각하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아델스리드를 제 1순위로 생각하며 기사보다도 기사 같은 아르님에게 있어 이런 리스크가 큰 상황은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리아는 이 시합에서 그 누구의 목숨도 안 잃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왜냐면──
“그야 샤라크 경이기 때문이지요.”
주저없이 단언하는 마리아를 보고 아르님은 한동안 멍해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말끄러미 바라봤지만 이상한 말을 했다는 자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랬더니 마리아가 역으로 어디 문제 있냐고 물어보았기에 아르님은 시선을 정면으로 되돌렸다. 회랑의 중앙에는 좌우에서 나오는 레미와 라벨이 마침 만나려 하고 있었다.
“잘도 저런 갑옷과 마갑을 준비 해왔군.”
울타리의 사이에서 둘이 근거리에 대치했을 때 말을 멈춰 세웠다. 레미의 장비는 대부분이 실전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라벨은 기병대장이라 해도 전형적인 중갑기병이었기에 전신을 갑옷으로 감싸는 중갑기병과는 또 다르다.
“이 갑옷은 라벨 가문에 대대로 내려온 오래 된 플레이트 아머 입니다만, 신용하고 있는 대장장이에게 부탁했습니다. 써먹을 수 있게 가공해달라고. 정말 아델스리드의 대장장이들은 솜씨가 뛰어나다니까요.”
레미는 갑옷에 연보라색의 허리띠를 고정시키고 투구에는 털 장식을 붙이고 있다. 한 편 라벨의 갑옷에는 그런 장식품이 하나도 없어 거칠게 보였다. 장식을 붙일 준비까진 못한 건지, 아니면 일부러 다 없애버린 것인지.
적어도 그 갑옷은 거한인 라벨의 체격에 알맞게 만들어져 있었다. 말에 타고 있다고는 해도 정면에 있는 압도감은 심상치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애마도 바실리우스 바실리온에 뒤쳐지지 않을 만큼 훌륭한 청가라말이었다. 체격이라는 그의 최강의 무기는 레미를 상대로 충분히 발휘 할 것이다.
“겉모습을 갖췄다고 경험의 차이는 메꿔지지 않는다.”
하지만 레미는 겁먹은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위엄 있는 태도로 라벨을 째려보는 모습이 체격의 차이를 신경 쓰지도 않는 것을 보여줬다.
“잘도 말씀하시는군. 샤라크 경.”
한편 라벨도 상관에게 거리낌 없는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용병이면서 군의 제 2위까지 올랐다는 자각이, 군에서 살아온 경력이 기사의 모습으로 마상창시합을 임한다는 생전 처음으로 하는 경험과 견줄만하다는 자신감을 줬다. 레미는 그를 흥미 깊게 생각해 크게 웃었다.
“나는 귀공을 얕보고 있었다. 전장에서의 능력은 높게 평가를 했었지만 그 인식의 본질은 기사를 동경하는 벼락기병대장이었다. ──이 레미 리터 폰 샤라크의 이름을 걸고, 빌헬름 라벨을 기사로 인정하며 정정당당히 일기토를 임하도록 하지.”
“인식이 바뀌게 된 건 저도 그렇습니다. 샤라크 경. 용감한 기사에게 행복이 깃들기를.”
“그래. 서로 좋은 결투를 하자고.”
서로 합을 맞춘 듯 들고 있던 랜스를 기울여 십자 모양으로 교차 시켰다. 모조품 이라고는 해도 인간의 키보다도 몇 배나 긴 랜스가 추어올려져 있는 모습은 압권이어서 성 안은 순식간에 환호로 가득 찼다. 귀족도, 시민도, 농민도, 용병도, 모두가 계급도 신앙도 관계없이 팔을 들어올려 외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상창시합을 참가하는 것처럼 열광적이었다.
“굉장해…….”
마리아는 아델스리드 성을 감싸는 열기와 사람들이 흥분 되어 소리 지르는 것을 현 상황 상 조금은 자제 해달라고 하고 싶은 상태였다. 양손을 땀이 차도록 쥐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어 황급히 손을 폈다. 그녀는 지금 만큼은 섭정이 된 것을 후회하고 있다.
곧 이어 두 사람의 기사는 말을 돌려 제 자리로 돌아갔다. 양쪽의 도우미가 무기의 점검에 들어가 곧 시작 될 마상창시합을 준비한다.
회랑의 중앙에 아델스리드 성백작국의 깃발을 들고있는 병사가 나와 레미와 라벨이 가는 길을 방해하는 것처럼 깃발을 바로 옆에서 흩뜨렸다. 이 깃발이 올라가면 말은 달리기 시작하고 창과 갑옷이 충돌하는 것이다. 당사자들은 좋든 싫든 긴장하게 된다. 그것이 전해진 것마냥 소란스러웠던 관객들도 파도가 멈춘 것처럼 조용해졌다.
레미의 시선에는 표정을 찡그리고 호흡을 가다듬는 라벨이 있었다. 레미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는 대담하게 웃으며 투구의 바이저를 기세 좋게 닫았다.
그 날카로운 금속음은 라벨의 기세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라벨을 계속 응시하던 레미도 같이 바이저를 내렸다. 극단적으로 좁혀진 시야 속에서 그를 계속 바라봤다.
“아아, 이 어두움, 이 고양감.”
갑옷 속에서 울리는 감미로운 목소리는 누구에게도 닿지 않고 사라졌다.
기사를 위해 만들어진 고귀한 정적 속에서 레미는 눈을 감고 자신을 가다듬은 다음에 다시 눈을 떴다.
──시야의 끄트머리에서 병사 하나가 권총을 하늘로 향해 발사했다.
발포음과 함께 깃발이 들어올려져 두 사람의 기사는 동시에 달리기 시작했다.
“자──”
바실리우스 바실리온은 주인의 명령에 따라 순식간에 가속해 발소리가 크게 울려퍼진다. 대지가 흔들리고, 바람을 가르고, 말발굽이 땅을 도려냈다.
그리고 말들은 울타리에 도달하고 레미는 모의 랜스를 전방으로 향했다.
랜스의 손잡이를 옆구리에 고정시키고, 무딘 창 끝은 울타리 너머 반대편으로── 정면에서 동시에 울타리로 달려오는 라벨에게 향했다.
귀에 바람이 몰아쳤다. 머리의 털 장식이 격하게 흔들린다. 랜스를 쥔 오른손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견고한 갑옷을 입은 철의 괴물, 라벨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간다. 라벨……!”
레미는 전력으로 달리는 말과 호흡을 맞춰 랜스를 라벨의 흉갑 부분을 향해 내밀었다.
“하앗!”
──랜스는 라벨을 맞췄지만 반응은 없었다. 그리고 레미에게도 각오한 만큼의 충격이 오지 않았다. 그 순간에 상황을 파악했다.
“스쳤을 뿐인가?!”
어깨인지 팔인지 좁은 시야로는 판별이 안 됐지만, 갑옷의 모서리를 맞아 랜스가 미끄러진 것일 거다. 거한의 라벨은 그 정도로 끄덕일 상대가 아니었다.
울타리의 끝까지 다다른 레미는 고삐를 땡겨 말을 선회 시키고 울타리 건너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에 라벨이 지나온 길이다.
라벨도 똑같이 방금 전에 레미가 지나온 길을 돌격하고 있었다. 마상창시합을 처음 하고, 랜스가 몸에 닿았음에도 혼란에 빠지지 않고 바로 상황판단을 하는 우수한 무인이다.
레미는 마음 속으로 라벨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그러니 일말의 망설임 없이 전력을 다해 쓰러뜨릴 것이다.
──다시 한 번 교착.
나무가 깨지는 소리가 한 번에 울려 퍼진다. 두 사람의 랜스가 정면으로 충돌해 손잡이까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산산조각 난 랜스의 파편이 주위에 안개처럼 흩날리고 그 안을 레미와 라벨의 말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폭음과도 같은 환호가 끓어올랐다. 귀인석의 신하들 중에는 열광 끝에 일어난 자도 있었다. 마리아는 감탄의 소리를 내며 기도하듯 양손을 꽉 쥐었다.
“레미……!”
무의식 중에 흘러나온 목소리는 폭풍과도 같은 환호 속에서 덧없이 묻혀버렸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싸우고 있는 자신의 기사에서 한 시도 떼지 않았다.
레미는 라벨과 엇갈리고 난 직후 고통에 괴로워했다. 말의 달리는 속도에서 나오는 장창 돌격의 힘은 견고한 플레이트 아머 조차도 관통한다. 창 끝이 무딘 비치사성의 모의 랜스라도 그 충격은 헤아릴 수 없다.
그 충격이 한데 모인 랜스가 서로 부딪히면 어떻게 될지는 뻔한 일이다. 레미는 오른손이 마비 되는 것 같은 고통에 쓴웃음을 지었다. 빌헬름 라벨, 경험도 없는 일개 용병이 이렇게 까지 한다는 사실에 레미는 경탄했다.
다시 회랑의 끝까지 도달해 출발점으로 돌아온 레미는 손잡이까지 박살 난 랜스를 내던지고 대기하고 있던 병사에게서 새로운 모의 랜스를 건내 받았다. 이번 돌격으로 끝내기 위해 랜스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3번째 달리기 시작한 바실리우스 바실리온의 기동에는 피로가 느껴지지 않았다. 쉴 틈 없이 달려가며 멧돼지와 같이 콧김을 내뱉으면서 돌격해갔다. 최고의 말이다. 고삐를 잡고 등자에 힘을 담아 랜스에 체중을 싣는다.
고양감이 멈추지 않는다. 이것이 기사의 본망이다. 레미는 눈을 한계까지 크게 떠 자신의 시선에 라벨을 담아냈다.
──바이저의 사이에서 그와 눈이 마주쳤다.
보이는 건 겨우 눈동자 뿐이었지만 레미는 그 짧은 순간에 라벨도 자신과 똑같이 웃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결착의 예감에 성 안은 비상한 분위기로 가득찼다. 모두가 소리 지르고, 모두가 숨을 삼키고, 모두가 두 사람의 기사를 계속 바라보고 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더 이상 기사의 영광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일전에 기사가 활약하던 시대의 피가 격한 맥동을 일으키면서 극명하게 알려주고 있다. 이것이 무인. 이것이 기사. 그들이야말로 긍지 높은 기사다.
두 사람의 사이가 없어졌다.
레미가 소리 질렀다.
“하아아아아앗!”
모든 힘을 오른손의 랜스에 집중해 라벨에게 찔렀다.
라벨의 랜스는 왼쪽 어깨에 닿았지만 바로 자세를 바로 잡아 흘러 넘겼다.
레미의 랜스는 라벨의 가슴 정중앙을 정확히 찔렀다.
그의 거대한 몸에 랜스가 견디지 못하고 부셔져 버렸지만 레미의 손에 확실히 전해져 온 반응은 이 마상창시합의 결과를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말해주고 있다.
──둔탁한 떨어지는 소리가 그의 귀에도 들려왔다.
회랑을 빠져나온 레미가 뒤돌아보니 라벨은 중앙에 굴러 떨어져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긴 겁니까?”
자신이 바란 광경이었지만 마리아는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확인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건 모든 관객이 같은 상황이었다. 손에 땀을 쥐는 긴장은 결착이라는 전환점으로 열광으로 바뀌었다. 그들의 격정이 성을, 땅을 흔들었다.
칭송하라. 승리한 기사의 영광과, 패배한 기사의 건투를.
“샤라크!”
“폰 샤라크!”
“우리 아델스리드의 레미 리터 폰 샤라크!”
축복의 목소리는 도중에 끊어지지 않고 계속 울려 퍼졌다. 레미는 처참하게 부서진 모의 랜스를 승리의 증거로써 높이 들어올렸다. 환호의 목소리가 봇물 터지듯 격화 되며 감정의 소용돌이가 성안을 가득 채웠다.
눈부신 태양 아래 레미는 저린 오른손으로 바이저를 올려 그늘진 시야 속에서 바로 귀인석의 마리아를 바라봤다. 그리고 승리의 보고를 올리는 대신에 고개를 숙여 주군에게 보내는 충의를 관객들에게 보여줬다.
마리아는 흥분으로 인해 떨고 있는 몸을 일으켜 레미의 충의에 답하듯이 팔을 그에게 뻗었다. 그 모습은 그야말로 옛날 이야기 속의 공주와 기사였으며 그 모습을 본 시민들은 감동의 마음을 환호에 담아냈다.
한 편 패배한 라벨은 일어나는게 내키지 않는듯 바이저를 올리고만 있을 뿐 쓰러진 상태로 꿈쩍 않고 있었다. 땅이 흔들릴 정도의 환호 소리에 몸을 맡기고 푸른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다. 못 움직일 정도의 중상을 입진 않았지만 단지 가만히 있고 싶었을 뿐이다.
“라벨, 처음부터 질려고 마음 먹었었군.”
그가 말에서 떨어진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말에서 내려온 레미가 시야 끄트머리에 있었다.
“……마상시합의 이야기를 꺼냈을 땐 그랬었죠. 용병들의 실질적인 대장이었던 제가 샤라크 경에게 도전하고, 지게 되면 그들은 불평없이 경을 따를테니까.”
“만약에 진짜로 그랬으면 난 귀공에게 실망했을 거고. 허나 그러지 않은 이유는 뭐지?”
“……저도 이 열광에 심취해버린 것도 있고, 한번이라도 기사가 되는게 소원이었으니까요.”
라벨은 시선을 관객들에게 돌렸다. 시합은 이미 끝났으면서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술판을 벌리는 자도 있었다.
“진정한 주역은 경일지 몰라도 기사 이야기에 나올 수 있다는 게 정말 꿈만 같았으니까요. 그래서 계획도 포기하고, 기사로서 정정당당히 승부를 건 겁니다.”
그의 표정은 매우 자랑스러웠다. 땅에 떨어지지만 않았으면 그야말로 승자일 정도였다.
“말하는 걸 보면 이유가 하나 더 있군.”
“……샤라크 경, 별거 없는 별명이지만 이래 봬도 전 강력의 라벨이라는 별명을 가진 것이 마음에 들었었고 어울린다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그래.”
“그런데 말이죠. 2일 전의 일입니다만…… 처음으로 제대로 된 플레이트 갑옷을 입어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이게 이렇게나 무거운 것이었나 하고.
라벨은 무게를 확인하듯 오른손을 몇 번이나 쥐었다 폈다. 실전용 방어구 중 플레이트 아머가 쇠퇴한 이유는 총기의 관통력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는 막기 위해 두께를 생각없이 늘린 결과 착용자가 갑옷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병들 조차도 플레이트 아머를 버리고 몸의 일부만 덮은 흉갑을 채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착용자가 그 무게를 견딜 수만 있으면 플레이트 갑옷은 이 17세기에서 유용한 방어구로 활용할 수 있다.
“경에게 도전하기 전에 알았어야 했는데. 형식만 갖추는 용도라기엔 매우 거친 플레이트 아머를 걸치고 전장을 서는 샤라크 경…… 몇 번이나 경이 총알을 튕겨내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경의 갑옷은 총알을 견뎌낼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하고, 그 방어력에 맞는 무게를 가지고 있겠지요.”
“그렇지.”
“그런데도 당신은 무게가 아예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전장을 누볐죠. ──경이여, 당신은 대체 뭐하는 자입니까? 그 체격으로 저를 뛰어넘는 완력을 가졌다는 건 믿기지가 않네요.”
라벨이 올려다본 곳에는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과 그 아래서 망령과도 같이 서있는 레미가 있었다. 기사의 몸이라기엔 쉽게 부러질 것 같이 가늘지만 라벨은 레미의 팔을 꺾지 못할 것 같았다.
레미는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망설이면서 말했다.
“내가 어떤 자인진 아무래도 좋다.”
“……그렇습니까.”
“기죽지 마라. 라벨. 그런 건 안 어울린다고.”
“이제 와서 당신을 향한 신뢰는 깰 생각은 없습니다만. 그래도──”
군인으로서 레미를 향한 흥미는 끊이지가 않았다. 그의 정체불명의 완력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어떻게 불가능의 벽을 뛰어넘은 것인가.
라벨은 무의식 중에 안 좋은 표정을 띄우고 있었는지, 레미는 그를 북돋아 줄 수 밖에 없었다.
“그럼……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같이 살아남는다면 귀공에게 내 과거를 얘기해주지. 한 줌의 거짓 없이 말이야.”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 라벨을 보고 레미는 실수한 것 같아 조금 후회했지만, 방금 전의 대건투를 치른 보답 정도면 괜찮은 것 같다고 만족해서 주먹을 쥔 오른손을 라벨에게 내밀었다.
──여차하면 그를 베어버리면 된다.
“약속입니다. 샤라크 경.”
레미가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라벨은 몸을 일으켜 세워서, 레미와 손을 부딪혔다. 철의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래. 신의 이름을 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