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왕녀와 흡혈귀 - Remy Ritter von Scharlach
[번역] 왕녀와 흡혈귀 - Prinzessin Maria Margarethe von Adelsried
[번역] 왕녀와 흡혈귀 - Her Royal Highness Princess
[번역] 왕녀와 흡혈귀 - Prinzessin und Vampir (1)
[번역] 왕녀와 흡혈귀 - Prinzessin und Vampir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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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은총을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소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아멘.”
마리아가 다니는 성당은 두 곳이 있다.
하나는 아델스리드 마을에 있는 교회의 성당.
그리고 또 다른 곳은 아델스리드 성의 뚜거운 벽 안에 있는 예배당이다.
군사적 거점이 되는 성은 가끔 농성전의 무대가 되기도 한다. 농성전이 일어났을 경우 기도를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성 안에 예배당을 지어 놓는 건 오래 전부터 지속되어온 전통이다. 필연적으로 마을의 교회보다는 소규모이겠지만 수 백 년 전부터 이어져온 아델스리드 성에도 고딕 양식으로 만들어진 예배당이 슬쩍 지어져있다.
아침 빛이 색이 다양한 스탠드 글래스를 넘어 홀에 놀여져 있는 긴 의자와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부드러운 빛을 비추고 있다. 예배당에 있는 사람은 마리아, 아르님, 신하들과 시종장. ──스탠드 글래스에 그려진 그림은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끌어안고 모성애가 넘치는 미소를 띄우는 그 모습은 보는 사람들을 매료시키는데 충분하다. 북방의 이단자들은 왜 그녀를 신앙하지 않는 것인지 성백녀 마리아는 개신교도들을 이해하지 못해 언짢은 표정이었다.
신성한 미사 의식 중에는 제멋대로 날뛰는 먼지조차도 성화된 눈처럼 보인다. 늙은 사제가 읽는 성서의 말은 예배당의 분위기를 신이 앞에 있는 것처럼 만든다. 그리고 그걸 듣고 응하는 자들은 귀족인 아델스리드 가나 그에 준하는 유서 깊은 가계의 인간이다. 모든 요소가 장엄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그래서 마리아는 마을의 교회보다도 성의 예배당을 더 좋아한다. 섭정이 된 지금은 영주로서 주민을 접해야하기 때문에 마을의 교회를 마음 놓고 찾아갈 수도 없을 것이라 이 예배당의 갑갑함이 그녀의 심금을 자극하는 것이다.
마리아의 손에는 그리스도의 피인 포도주를 은으로 된 술잔에 담아 잔에 빨간색을 가득 채웠다. 사제의 말에 맞춰서 포도주를 다 마신다. 액체가 목을 흘러내리는 감각이 기분 좋다. 하지만 이것은 포도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다. 그리스도의 몸인 빵을 먹는다. 지금 마리아는 신과 뒤섞이고 있는 것이다.
──마리아는 의식이 끝나가는 도중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여기에 있어야 할 인물이 없다는 것을.
“미사에는 오지 않으신 것 같네요. 샤라크 경.”
“……이거 마리아 섭정 각하님 아니십니까. 오늘의 미사는 벌써 끝나셨는지요.”
“예. 지장 없이 끝났어요.”
“그거 다행이군요.”
1개월 전에 처음 만났을 때의 그는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있었지만 두번째로 만났을 때의 그는 장식이 적은 연보랏빛의 조끼에 바지, 그리고 구두를 신은 일반적인 상류층 시민의 모습이었다. 이름이 붉은 색인 것에 반해 그가 자신을 상징하는 색은 부드러운 연보라색이다. 갑옷 뒤에 입었었던 코트도 같은 색이었다.
그런데 세 번째 연병장에서 레미를 봤을 때, 그는 다시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있었다. 레미가 시대에 뒤쳐진 갑옷에 어떤 의의를 두고 있는지 지금의 마리아는 추측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가벼운 차림의 레미는 몸의 굴곡이 얇은 게 단적으로 보이고 얼굴이 반듯한 것도 있어서 중성적인 인상을 마리아에게 더 주고 있다.
레미는 어두컴컴한 성 안 쪽 깊은 곳에 서있었다, 무기고나 어딘가를 들렸다 돌아오는 중인지 단순히 시간을 때우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마리아가 눈짓을 보내니 그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주군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기사의 허리에 차있는 양검에서 경쾌한 소리가 울려퍼진다.
“신하들에게 들었어요. 왈라키아의 기사라는 별명이 있으시다고.”
“제 별명이 마리아 각하의 귀에 들어가다니 이거 부끄럽군요. 이름을 떨친 보헤미아의 용병대장이나 갑주를 걸친 수도사에 비하면 제 별명은 보잘것없습니다.”
“그 이름과 당신이 미사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랑 뭔가 관계가 있습니까?”
아델스리드 가문은 대대로 경건한 가톨릭 신도였다. 1세기 전의 종교 개혁 이후로도 그 입장은 굽히지 않았다. 신하도 주민도 영주를 따라 가톨릭 신도였고 따라서 교회의 양식도 가톨릭이었다.
하지만 왈라키아 공국이 있는 발칸 반도는 가톨릭에서 분파 된 개신교와는 또 다른 계통의 “이단”이 있는 땅이다. 로마 제국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이교에 감화된 이단자들이 사는 뒤떨어진 땅이다. 그리고 지금의 왈라키아 공국은 오스만 제국의 이교도들에게 항복했다. 그 땅의 이름을 가진 레미의 신념을 마리아가 의심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블라드 체페슈를 알고 게십니까?”
마리아는 안다고 대답했다.
“왈라키아 공 블라드 3세── 드라큘라 공의 이름은 여기 바이에른까지 퍼져 있었죠. 결코 영웅으로서의 이미지는 아니었지만.”
레미는 그렇다고 수긍했다.
어떤 때는 공포 정치를 일삼아 국민을 괴롭게 만든 폭군, 어떤 때는 오스만투르크와 굳건히 맞서며 마지막엔 카톨릭으로 개종한 국민과 기독교들의 영웅, 어떤 때는 신앙을 버리고 이단자 로마 교황에 매달린 배반자. 어느 땐 잔학한 꼬챙이 왕. 블라드 체페슈의 평가는 입장에 따라 빠르게 변화해 자주 혼동을 일으켰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그는 그렇게 호의적인 인상이 아니었다. 아니 레미와의 대화로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지금 카톨릭의 군세에 블라드 같은 영웅이 있었으면 이 전쟁도 끝이 났을지도 모른다.
“저는 블라드 체페슈와 관련 된 일족의 일원입니다.”
그녀는 걷고 있던 발걸음을 멈췄다. 뒤돌아서 레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납득했다.
“그래서 왈라키아의 기사인 거군요.”
“혈족을 말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만 이 이름은 제게 있어서 도움이 되지도 않고 해가 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뭐 말해도 상관 없지요.”
블라드 체페슈의 후예인 남자가 고풍스러운 갑주를 입고 전장을 돌아다닌다면 좋든 싫든 이름이 널리 퍼졌을 것이다.
“그럼 당신이…… 샤라크 가문이 믿는 종교는 어떤 건가요. 블라드 체페슈는 죽기 전에 헝가리의 왕녀와 결혼 하고 카톨릭으로 개종했다고 들었습니다만.”
“……글쎄요. 뭘 믿고 있을까요.”
레미의 표정은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 추궁을 하지 말라는 분위기가 너무 두드러져서 마리아는 그 분위기에 휩쓸려서 목 깊숙히 담아둔 다음 말을 꺼내지 못하여 숨이 턱 막히고 말았다. 온 몸을 휘감는 불쾌감을 떨치기 위해 마리아는 다시 발길을 되돌렸다.
“당신의 기사가 교황을 숭배하지 않는 것에 환멸 해버리신 건가요? 마리아 각하.”
“아뇨…… 발단이 어찌 되었든 간에 저희는 일전에 있었던 십자군과 같은 종교 전쟁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설령 이교도의 신자일지언정 당신이 해야할 직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보기에 안 좋은 것은 변함이 없다. 작은 영방 국가의 군이라고 해도 황제군을 결집하는데 중요한 사상은 가톨릭이다. 레미는 그것을 떠올린 마리아의 상태를 보고 넘길 생각은 없었다.
“각하가 원하신다면 저는 가톨릭의 순종한 신자로서 행동 하겠습니다만?”
“……명합니다.”
“알겠습니다. 주인이여.”
레미는 아무런 주저도 없이 말했다. 그 말이 마리아를 도와주기도 했고 동시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공포를 느꼈다.
신앙이라는 건 그렇게 손쉽게 바꿀 수 있는 사소한 게 아닐 것이다. 만약 자신이 개신교도를 속이고 가톨릭으로의 신앙을 금해야만 한다면. 그게 아무리 표면 상의 허위라고 해도 그 행위 자체가 마리아에게 있어서 참을 수 없는 굴욕이라 생각했다. 자신의 삶을, 인생을 근본부터 부정하고 죽이는 행위다. 가능하다면 그런 경험은 아예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이 남자는 대체 무엇인가. 왜 그렇게 간단히 그에게 있어서의 이교의 허물을 뒤집어 쓰는 것인가.
──어쩌면 나는 생각을 잘못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마리아는 이제서야 그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봤다.
──샤라크 경은 개신교나 정교회의 이단, 아니면 오스만투르크나 페르시아인 같은 이교도의 신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건──.
“……샤라크 경.”
마리아의 목소리는 자신이 이해한 것이 마치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라 생각한 공포로 인해 조금 떨린 목소리였다.
그래서 적어도 그의 정체에 대한 일부분을 알고 싶어했다.
“당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듯 걸어가면서 물어봤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레미는 깜짝 놀랐지만 아무런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죽었습니다. 예전에 말이죠.”
부모에 대한 집착심이 아예 느껴지지 않아 마리아는 슬픈 듯이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일전에 기독교의 세계였던 유럽은 2개의 종파밖에 없었다.
하나는 가톨릭. 로마 제국을 중심으로 한 로마 교황이 정점에 군림 해있는 서구의 종파.
또 하나는 정교회. 동 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콘스탄티노플 총주교가 정점에 군림 해있는 동구의 종파.
그런데 그 두 가지로 나뉘어져 있던 세계도 200년 만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1453년, 오랜 기간 동안 이교도 아랍인에게 잠식 되어온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 정교회의 본거지였던 그리스는 이교도에게 점령 됐다.
그리고 1517년 독일 신학자 마르틴 루터가 95개 논제를 발표해 가톨릭 단색이었던 서구 세계에 종교 개혁의 폭풍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그들은 세속적이고 타락한 교황과 그를 따르는 성직자들을 비판하고 그 결과로써 성서를 중시하는 복음 주의가 널리 퍼졌다. 루터가 일으킨 루터 파는 북 독일과 북구에 츠빙글리와 칼뱅이 퍼트린 개혁파는 스위스와 네덜란드에 퍼지고 영국 왕 헨리 8세는 로마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고 영국 국교회를 독립 시켰다.
종교의 움직임은 정치와도 관계가 많았다 교회에 세금을 걷으려고 하니 로마 교황의 존재가 거슬렸던 속된 군주들은 적극적으로 새로운 종파── 개신교를 받아들였다. 개신교를 받아들인 건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 현저히 나타났으며 영국, 네덜란드, 스웨덴, 덴마크 등의 제국은 개신교를 재빠르게 국교로 삼아 유럽에 새로운 종교적 대립축이 발생했다.
그리고 비종교적인 지정학적 대립축도 또 별개로 존재해 합스부르크 가문과 프랑스 왕가의 대립으로 구현화 돼있었다. 현재 프랑스 왕가는── 부르봉 가문.
“루이 13세가……?”
그 보고는 레미와 무관과 문관, 또 마리아를 매우 경악시켰다.
1643년 5월 하순. 게오르크가 전사하고 반 년이 지났을 때다. 브라이텐펠트에서 황제군을 이긴 스웨덴군은 아직 바이에른 지방엔 도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성 로마 황제 밑으로 모이는 제국 제후나 가톨릭측 세력에게 적국은 북방의 이단자 스웨덴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적은 서방── 가톨릭 교국 프랑스 왕국.
“네. 프랑스 왕은 1주일 정도 전에 붕어했다고. 정무는 당연히 마자랭 추기경이 맡고 있다는 것 같습니다.”
“암살은 아닌 거겠죠? 루이 왕은 이제…… 막 40대가 됐잖아요.”
손에 쥔 양피지를 읽고 있는 아르님에게 마리아는 납득이 안 간다는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그는 담담히 부정했다.
“현 단계로는 그건 아닐 겁니다. 병사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보고가 하나 더 있습니다. ……프랑스 북부, 네덜란드에서 파리를 목표로 향한 스페인 군이 로크루아에서 프랑스군에게 대패했습니다. 이후로는 프랑스가 제국에게 역으로 침공 해오는 것을 각오해야만 하겠군요.”
“적은 서쪽에서도 온다는 것입니다 마리아 각하. 그것도 같은 가톨릭의 적이 말이죠.”
아델스리드 성의 어전 회의에서 총사령관 레미 폰 샤라크의 좌석은 상위에 위치하고 있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맑기에 가톨릭을 비꼬는 말이 방에 잘 울려 퍼졌다.
“……알고 있습니다. 샤라크 경. 저도 이 전쟁이 이젠 제국 내의 분쟁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올해로 25년 째 진행 되고 있는 이 긴 전쟁의 발단은 신성 로마 제국 내의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립이었으며 전쟁 초기에는 실제로 제후들이 각 종파에 나뉘어져 분쟁을 전개해갔다.
그리고 지금의 전쟁은 다음 단계로 이행하고 있다. 영토의 황폐화를 앞에 두고 제국 제후들은 8년 전, 1635년 프라하 조약으로 가톨릭이 양보하는 형태로 와해. 주 적은 외국인 스웨덴과 프랑스가 되었다. 지금 와서는 종교 전쟁이 국제 전쟁으로 변모 해버렸다.
“저희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폐하이며 가톨릭의 수호자인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단순명쾌하지만 이렇게 물어보는게 간단 하겠군요. 방침의 변경은 없으십니까?”
“당연합니다. 돌아가신 아버님의 대서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저희 아델스리드 가문은 황제 폐하의 충실한 신하였습니다. 이제 와서 그 신조를 꺾어버려선 안 됩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그건 넘을 수 없는 선이었다. 몸에 흐르고 있는 혈액이 그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말한다. 마리아가 한 말에 그녀 자신의 의사가 존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불경 하다는 것은 알고있지만 레미는 한숨을 쉴 수 밖에 없었다. 뼛속까지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독일 귀족인 마리아와는 다르게 레미에게 있어 합스부르크 가문은 단순히 일시적인 군주의 윗사람일 뿐이지 광신적인 충의를 내세울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스위스의 시골에 기원을 가진 합스부르크 가문은 신의 가호를 받은 일족이었다. 작은 지방 영주였던 시절 그들은 우발적으로 얻게 된 신성 로마 황제위를 헛되이 쓰지 않고 전쟁 보다 혼인 정책으로 영지를 확대해나갔다.
“……다른 이들은 전쟁을 하게 두어라,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그대는 결혼하라.”
레미는 이를 악물고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끔 말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독일 남동부에 오스트리아라 불려지는 영지의 집합체를 쌓아 올려 신성 로마 제국위를 독점하고, 결혼 정책의 결실로 스페인 왕위를 계승했다. 당시의 스페인은 네덜란드나 남 이탈리아 그리고 남북 아메리카와 필리핀 등의 광대한 식민지를 소유하고 있던 세계 최대의 국가였다. 그리고 포르투갈 왕위도 얻은 것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저물지 않는 유럽 굴지의 왕가가 되었다.
그래서 반발도 거셌다. 가톨릭의 수호자로서의 자부심으로 인해 온갖 개신교 국가들이 적대시 했고, 같은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도 적으로 만들었다. 프랑스는 신성 로마 제국과 스페인 왕국 사이에 있어 합스부르크 가문의 확장은 프랑스 왕가 존망 위기에 직결해 있기 때문이다.
이 대전쟁을 일으킨 원인 중 한 명은 프랑스 왕국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이다. 그는 추기경이라는 가톨릭의 고위 성직자이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에게서 프랑스를 지키기 위해 개신교 제국과 손 잡아 개신교 동맹의 맹주가 되었다.
──그 리슐리외도 반 년 전에 죽었다. 그의 후계자 마자랭 추기경은 리슐리외의 노선을 충실히 계승해 스웨덴과 네덜란드 같은 개신교 국가와 동맹해 신성 로마 제국과 스페인 왕국과의 전쟁을 속행하고 있다. 하지만 리슐리외의 노선을 후원 해주고 있었던 루이 13세도 지금 붕어했다. 조그마한 기대감이 마리아의 가슴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프랑스가 이 전쟁에서 빠질 가능성은 있습니까?”
그녀의 시선엔 아르님과 레미가 있었다. 하지만 둘 다 표정이 밝지가 않았다.
“아예 없다고는 못 말하겠군요.”
먼저 입을 연건 레미였지만 그는 마리아가 아니라 아르님을 보고 있었다.
“프랑스는 대국이지만 아무리 대국일지언정 체력은 무제한이 아니니까요. 전쟁이 시작 했을 때부터 개신교에 자금 지원을 적극적으로 했고 지금은 참전해 3개의 전선을 유지하고 있고. 국력의 한계는 거의 다 했을 겁니다.”
“그러면.”
“프랑스가 시간이 지나서 한계를 맞이하는 것 보다 제국의 파멸이 더 빠릅니다.”
아니, 그 보다도 더 빠르게 파멸 할지도 모르지요──. 레미는 그 말을 덧붙이려고 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저도 샤라크 경의 의견과 동일합니다.”
뒤이어서 말한 것은 재상 아르님이었다. 그에게 쌓여있는 수많은 외교 문서는 모든 유럽 국가의 실정을 극명하게 말하며 이 이후 전쟁의 행방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 아델스리드 성백작국의 운명조차도. 그 양피지를 읽은 자는 쉽게 상상할 수 있게 만든다.
“일전에 저희는 구스타프 아돌프에게 제국의 깊숙한 곳까지 침공을 허락했습니다. 그에 반해 이 아델스리드 성백작국이 전화에 휘말리지 않은 건 스웨덴에게 있어 이 바이에른은 멀리 떨어진 이국의 땅이고 보급이 불충분하며 침공 루트 이외의 도시를 점령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다릅니다.”
프랑스가 서쪽에서 바이에른 선제후국을 그리고 안 쪽에 황제가 있는 오스트리아를 향해 진군하게 되면 정면에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이 아델스리드다. 그리고 바이에른 지방에서 프랑스까지의 거리도 멀지도 않다. 병참의 유지도 쉬울 것이다.
이대로라면 성백작국은 버려지고 그대로 프랑스군에게 약탈당하던가 아니면 전쟁터가 되어 유린당하던가 도출 해낼 만한 결말은 이 최악의 2가지밖에 없다.
회의실이 무거운 공기로 가득 찼다. 섭정 마리아부터 아르님, 말단 신하까지 전부 입을 다물고 한 명에게 시선을 향했다. ──결론같은 건 처음부터 하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미래가 찾아온다 하더라도 가만히 앉아서 받아드릴 수도 없지요.”
이건 전쟁이다. 전쟁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가 가능한 자는 군인 이외엔 없다.
아델스리드 성백작국 총사령관 레미 리터 폰 샤라크는 엉겨 붙는 안개를 떨쳐내는 것처럼 당당하고 자신 넘치는 목소리를 울려 퍼트렸다.
“네. ……아버님에게 이어 받고, 동생 프리드리히에게 문제 없이 넘겨줘야만 하는 이 땅을 파멸시키는 건 저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럼 답은 하나밖에 없군요.”
레미는 의자에서 거침없이 일어나 양 발을 맞춰 마리아를 향해 섰다. 발소리가 기분 좋게 울린다. 그리고 오른손을 접고 앞으로 내 기사의 충의를 보였다.
“이 샤라크, 군대를 출진해 프랑스군을 분쇄하는 걸 보여드리겠습니다. 마리아 각하와 영지의 평안을 위해.”
“부탁합니다 샤라크 경. 저는 당신에게 맡기는 것 밖에 못합니다.”
“재능이 없는 몸이지만 분투 해보겠습니다.”
그러나 소리 높게 선언하는 레미의 말 속에 마리아는 그늘이 살짝 보인 것 같았다.
그 그늘을 말하자면 비장감. 그가 맞서야만 하는 상대는 너무나도 강대하다. 그리고 그는 돈 키호테가가 되지 못할 것이다. 어리석게 풍차에 돌진하는 건 그의 냉철한 이성으로는 절대 하지 않을 행위다.
그는 그래도 달릴 것이다. 그는 기사이기 때문이다. 주군의 바람을 받아 들여,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가더라도 그 바람을 달성 시킬 것이다.
시대에 뒤떨어진 기사의 충성심은 고상하면서도 허무하다. 일전에 기사의 전성기에는 고귀한 기사는 적에게 잡혀도 몸값만 내면 죽이지 않았다. 상대들도 그걸 이해하고 있기에 돈을 원해서 적을 적극적으로 살리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의례적인 전쟁은 시대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전쟁의 주역은 이름도 없는 창병이나 총병이다. 강고한 진형을 짠 그들의 앞에선 갑옷을 걸치고 말을 타고 있는 기사는 슬프게 느껴질 정도로 무력하다.
레미는── 기독교 신자의 모범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의 충의는 틀림없는 기사다.
그럼 지금의 나는 어떤가. 마리아는 자문한다.
기사가 없는 시대에 태어난 난 일전의 기사들의 주군처럼 올바르게 행동하고 있는가? 라고.
9년 전, 1635년 황제와 가톨릭, 개신교 양 쪽 제국 제후들 사이에서 맺어진 프라하 조약으로 인해 제국 내의 내전은 끝나고 개신교 제후의 권리가 가톨릭 제후와 같은 걸로 인정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제국 제후의 군사력 소지가 금지 당했다.
그래서 아델스리드 성백작국이 소유하고 있는 군대는 성백작이 지휘권을 가진 독자의 조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신성 로마 제국군의 일부인 상태이다. 레미도 총사령관이지만 아델스리드 성백작국이 제국에 제공한 군대 약 2천 명의 지휘관일 뿐이고 그의 권한도 매우 제약 되어있는 상태다.
──어전 회의가 끝나고 얼마 후, 그는 아델스리드 군을 이끌어 성을 나와 한동안 제국군의 일부로 활동하고 있다. 레미에게 할당 된 직무는 보병 부대를 관할하는 하급 사령관이며, 말을 타고 소속 된 부하들에게 명령의 소리를 지르는 시장 바닥의 상인과도 같은 일이라고 그는 출진 전에 말했다.
그리고 대외적인 외교, 영지 경영, 프리드리히의 교육 등에 마리아가 분주한 사이에 레미가 없는 채로 1년이 지나고 있다.
“공주 님.”
마리아는 회의실의 위층에 있는 성주 일가의 방에서 프리드리히를 앉혀놓고 신약성서를 무릎 위에 올려둬 열심히 라틴어 교육을 하고 있었다. 차세대 군주의 교육도 섭정의, 아니 누나의 중요한 직무다.
마리아에게 입실을 허가 밭은 아르님은 검소한 아델스리드 성에서 얼마 안 되는 현란한 성주의 방에 조금 거북한 듯이 발을 디뎠다.
“수업 중에 실례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이제 거의 다 끝나가요. 프리드리히는 배우는게 빨라서 가르치는 저도 편해요.”
“그거 괜찮네요…… 전쟁이 끝난다면 이 성백작국도 평안하겠군요.”
아르님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귀한 일족의 남매를 바라봤다. ──그가 아버지 게오르크의 죽음을 전할 때도 이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고 마리아는 그리운 듯 기억의 실을 더듬었다.
“지금 샤라크 경이 귀환했습니다.”
“그런가요. 이기고 돌아온 건가요?”
“그건 마리아 각하가 직접 확인하시는 게 어떨까요.”
“……그렇네요.”
마리아는 프리드리히의 상대를 시종들에게 맡기고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있는 아르님의 옆을 지나가 방을 나왔다. 자신의 발걸음으로 인해 들려오는 나무 바닥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계단을 내려가고 사람이 없는 회의실에 다다른 시점에서 마리아는 자신이 빨리 걷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
“마, 마리아 각하이십니까?”
“죄송합니다. 지나갈게요!”
갑작스러운 일에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하는 병사들을 무시하며 기세 좋게 회의실의 문을 열고 외벽의 복도를 향해 치맛자락을 들어올리면서 성백녀로서의 체면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돌바닥 위를 초원에 있는 것처럼 달려나갔다.
그리고 서쪽의 마을이 한 눈에 보이는 창문에 도착하니 몸을 창 밖으로 내밀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황갈색의 머리카락을 나부끼게 해 머리카락으로 인해 따가워 그녀는 엉겁결에 눈을 감아버렸다.
주뼛주뼛 눈을 뜨니 푸르른 늦여름의 바이에른이 펼쳐졌다. 깊은 숲이 푸른 생명을 가득 담고 그 숲을 가로지르듯 만들어진 도로가 서쪽으로 뻗어 다른 마을── 추스마르스하우젠으로 이어져 있다. 저기가 아델스리드 성백작국의 서쪽 끝이다.
그리고 숲과 마을 사이에는 금빛을 내는 광대한 호밀밭이 펼쳐지고 있다. 여름도 끝나가고 이제 곧 수확의 시기다. 은총의 계절이다.
그런데도 그 밭 속의 도로를 행진하는 군대는 그 화사함을 티끌도 못 느끼고 있었다. 발걸음은 무겁고 기운이 없는 마치 죽은 자들의 행렬이다.
아아, 져버린 것인가──.
마리아는 바로 그렇게 직감했지만 왠지 모르게 극단적일 정도로 침울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체념은 아니다. 순수하게 충의를 맹세한 자들이 적어도 지금 보이는 자들은 죽지 않고 귀환 한 것이 기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예전에 이 도로를 행군 했었던 아델스리드 군의 수는 약 2천. 마리아에겐 지금의 그 들이 3분의 2인 1400명도 안 되는 것처럼 보였다. 창도 총도 들지 않은 부상 입은 보병들이 눈에 띄고 여윈 개같은 군세의 안에서 마리아는 간신히 그를 발견했다.
“──샤라크 경!”
패자의 행렬 안에서도 레미는 검은 갑옷을 입고 등을 올곧이 핀 상태로 말을 타고 있었다.
마리아의 눈에 비치는 풍경 속에서 그의 모습은 아직 작다. 목소리가 닿을 거리가 아닐 정도로. 그녀의 외침도 반은 충동적이었던 행동이었다.
하지만 손가락 만한 크기의 레미는 주군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은 것 같았다. 투구의 바이저를 열어 마리아가 있는 아델스리드 성을 바라봤다.
“설마 그럴리가.”
반신반의의 쓴웃음. 알아들었다기엔 레미의 거리는 너무 멀다. 하지만 레미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신기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황갈색의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걸 보고 바로 마리아 각하라는 걸 확신했습니다.”
오랫동안 생각했던 마리아의 예상에 반해 레미를 중심으로 한 어전 회의는 대강 사실 확인만 하고 끝났다. 총사령관이었던 레미의 책임을 추궁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1644년 8월, 지금보다 조금 전의 일이다. 라인강을 넘은 독일의 현관문인 신성 로마 제국령 프라이부르크에서 신성 로마 제국군과 프랑스군이 격돌했다. 라인강 동쪽은 제국군에게 있어선 본토 방어의 중요점이고 프랑스군에게 있어선 제국 침공의 교두보다. 양쪽 다 쉽게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 결과가 아델스리드 성백작국군의 궤멸이다. 그들은 최전선에서 프랑스군과 싸워 3일간의 전투 끝에 진지를 지켜내고 적군에게 많은 손해를 입혔다. 그러나 수적 열세는 엎을 수가 없어서 튀렌 원수와 콩데 공작이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메르시 장군이 이끄는 제국군은 부득이하게 철퇴를 했다.
“……내게 전군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줬으면 그런 망할 놈의 군대같은 건 쉽게 격파했을 텐데.”
레미는 그런 말을 했지만 과연 그것이 그의 진심인지는 마리아도 읽지 못했다.
제국군의 주력인 바이에른 선제후국군은 아직 제국의 문인 독일 서부에 병력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심각한 손해를 입어 레미는 아델스리드 성백작국군의 단독 귀환을 진언했다고 한다. 이 절박한 사태에 레미의 말이 수락 된 건 그만큼 아델스리드 성백작국군의 피해가 눈에 띄게 컸기에 그랬을 것이다.
“모든 권한이 주어졌다면 모든 전력을 이동시켜 적을 농락 시키는 것도 가능했건만. 근데 권한이 그러면 대체 어쩌라는 건가. 우리들은 결코 적들의 산제물이 아닌 것을……!”
“샤라크 경의 기분은 이해합니다만 지금은 현 상황을 기뻐합시다. 제국군이 철퇴했지만 피해는 프랑스가 더 크지 않습니까.”
“그 우위도 오래 안 갈 것이라는 건 뻔한 사실입니다. 패주로 인한 사기 저하를 보면 결코 좋은 상황이 아닙니다.”
사무적인 어전 회의가 끝나고 레미와 마리아는 둘이서 성 안을 같이 걸어다녔다. 냉철 했었던 평소의 레미와는 달리 지금의 그는 격앙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보폭이 엄청나게 넓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하, 패배는 패배입니다. 이렇게 프랑스군은 다시 한 걸음 제국을 답파했습니다. 뭘 보고 기뻐하라는 거죠?”
“샤라크 경이 이렇게 살아서 성에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그 보다 더 좋은 희소식이 있을까요?”
“……제 생존 여부는 사소한 겁니다.”
“제게 있어서는 제일 중요한 일이에요. 당신은 제게 충의를 맹세한 기사니까요. 성 게오르기우스의 가호를 받으신 그 목숨을 헛되이 쓰셔서는 안 됩니다.”
레미의 대답은 없었다. 부끄러워 하지도 않았다. 그저 마리아의 말을 무시한 것이다.
마리아는 자신의 뒤를 걷고 있는 레미에게 말을 걸었다.
“……샤라크 경.”
“예.”
“저는…….”
“……저는 당신의 진지한 기사로서의 충성을 응해줄 수 없는 인간입니다.”
“각하, 그건.”
“아버님에게 계승 된 많지는 않은 유품들 중에서 당신의 충의는 매우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건 틀림없어요. 하지만 ……아직 제 손에는 벅찬 것이네요.”
자신의 손을 확인하려고 꽉 쥐어 봤지만 떨어뜨릴 것 같을 정도로 매우 작고, 의지할 가치가 없는 자처럼 느껴졌다.
“부탁드립니다. 당신은 저 같은 인간을 위해서 목숨을 버려선 안 됩니다. 저희 아델스리드가 망하게 된다면 망설이지 말고 저희를 버려주세요. ……분명 그 날은 그렇게 멀지 않을겁니다.”
마리아는 지금까지 몰랐다. ──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책임진 자에게 주어진 납과도 같은 중압감을.
아버지 게오르크가 죽은지 곧 있으면 2년이 된다. 섭정 마리아의 기간은 아직 반환점 조차 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의 마음은 뭉개져 버린 것처럼 괴로웠다.
아델스리드 성백작국에게 주어진 외교적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다. 황제 또는 바이에른 선제후국을 따라 외국과 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지가 불타버려도 그 근본적인 원인은 신성 로마 제국이 약하다는 것이니 제국에게 따지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초토화된 아델스리드 성백작국의 책임을 떠안는 건, 당시의 통치자인 마리아다. 섭정 마리아가 제국을 따르기에 그 결말이 나오는 것이다. 그거에 대해선 변명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업화에 휘말리는 건 호밀밭만이 아니다. 농민도, 시민도, 마을도, 성도, 시종도, 신하도, 아르님도, 그리고 레미 폰 샤라크도 휘말린다.
마리아의 뇌리에 떠오르는 건 타오르는 아델스리드 성 안에서 사력을 다하다가 잿더미가 되어버린 기사의 모습──.
“그러니 부디…….”
“그건 아닙니다.”
레미는 단언했다.
“기사란, 아니. 기사도란 주군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을 긍지로 삼고, 목숨을 내던지는 것도 서슴지 않는 정신을 말하는 겁니다. 마리아 각하도 그건 알고 계시겠지요.”
“그러니 저는 당신에겐 어울리지 않다고.”
“기사인 제가 마리아 각하는 제게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레미는 강하게 마리아의 손목을 잡고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앗, 사라크 경. 잠깐만요!”
마리아는 무너진 자세를 바로 잡고 레미의 손을 떼어놓으려고 했지만 그의 하얀 피부와는 상상이 안 될 만큼 완고히 잡은 손은 그녀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이제 와선 긍지 높은 기사같은 건 과거의 존재이지요. 그래서 마리아 각하는 제 처우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고.”
“……네.”
“그럼 이렇게 생각해주세요. 저는 마리아 각하에게 충성을 다 하는 일개의 병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래도.”
“그리고 저에겐 마리아 각하에게 목숨을 바침 타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무명의 용병이었던 저를 게오르크 각하께서 기사 작위를 내려 주셨습니다. 리터 폰 샤라크라는 이름은 당신의 아버지가 주신 이름이나 다름 없습니다.”
처음 듣는 소리여서 마리아는 깜짝 놀랐다.
게오르크가 뼈가 되어 성에 돌아온 그 날까지 레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경력을 집요하게 물어보는 것도 꺼려졌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있었던 무능한 주군인 자신이라는 존재가 그에게 있어 짐이 되고 있었다.
“마리아 각하와 프리드리히 각하는 선대의 유품이십니다. 그럼 남겨져 버린 신하인 제게 내려진 사명은 명백하지요. 마리아 각하에게 충의를 다하는 겁니다.”
레미의 말은 한 줌의 거짓도 없었지만 현실감이 너무 없었기에 마리아는 어리둥절했다.
“기사로서의 보답을 안 줘도 된다는 건가요?”
“유감이지만 그럴 정도로 깨끗한 기사는 아닙니다.”
레미는 쓴웃음을 띄우며 뭔가 떠오른 듯 뒤돌아봤다.
“그렇네요…… 전쟁이 끝나면 바이에른 공작에게 등용이 될 수 있도록 추천 해주시는 걸로 충분합니다.”
“……잘 생각해보니 그 요구도 나름대로 불손한 요구이지 않습니까?”
“그럴지도 모르죠.”
레미는 거칠게 잡고 있던 마리아의 팔을 놓고 마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에게도 출세의 야망은 있거든요. 가능하시다면 부디.”
“기사의 명성이 닳아버리겠네요.”
마리아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상냥하게 웃고 있었다. 레미의 손바닥에 자신의 손을 갖다 댔다. 그 모습은 마치 동화 속의 기사와 공주님 같았다. 레미는 마리아의 손을 공손하게 받들었다.
레미가 눈을 감고 마리아에게 손을 맡긴 것도 한 순간. 그는 바로 다시 일어나 방금 전처럼 마리아의 손을 붙잡고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돌바닥에서 둔탁한 소리가 울린다.
“서두릅시다. 마리아 각하. 저희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없습니다. 적어도 저희만으로도 다가올 날을 위해 준비를 갖춰야지요.”
그의 발걸음은 힘찼다. 레미는 아델스리드 성백작국의 멸망을 앉아서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가능한 방책은 전부 다 취할 것이라고 방금 전의 어전 회의에서 선언했다. 패전을 거듭해도 레미의 마음은 꺾이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건가요.”
“일단 저희에게 필요한 건 병사의 정예화 입니다. 늘릴 수 있는 병사의 수는 한정 돼있으니까 말이죠. 그럼 그 병사의 질을 끌어 올릴 수 밖에 없습니다.”
아델스리드 성백작국군을 구성하고 있는 건 대부분 용병이다. 스웨덴군처럼 국민으로 구성 되어있는 군대가 아니다. 그러면──.
“용병 대장, 빌헬름 라벨을 설득 하러 갈겁니다.”
빌헬름 라벨. 그의 이름엔 폰이라는 문자가 없다. 즉 그는 귀족 출신이 아니다. 스위스에 있는 장인 가문의 출신이다.
──성벽에 감싸져 있는 성채는 겉으로 보면 하나의 건물같이 보이지만 내부는 용도에 따라 다르게 만들어진 건물로 이뤄져 있다. 성주와 신하들이 모여 회의나 회식을 하는 회의실, 신께 기도를 바치는 예배당, 주방, 경비병들이 머무는 대기소, 식당, 그리고 지금 같은 전시에 중요한 병영이다. 전쟁이 격화 되어 있기에 출진 이외에는 병영엔 항상 아델스리드 성백작국군을 구성하는 용병들이 모여있다.
그 용병들을 이끄는 것이 자신을 순수한 용병이라 부르는 빌헬름 라벨이다. 이전엔 이름도 못 떨치던 기병이었지만 브라이텐펠트와 프라이부르크라는 2개의 전장에서 그의 활약과 지휘관들의 전사로 인하여 지금은 레미의 바로 뒤인 서열 제 2위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거절한다.”
그의 나이는 38. 키도 레미나 마리아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다. 그런 그가 적의를 드러낸 말을 하니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위압감이 있었다. 레미가 왈라키아의 기사라면 라벨의 별명은 강력의 라벨이다. 그 별명은 허세가 아니라는 것을 라펠과 대치하고 있는 레미의 뒤에서 지켜보던 마리아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느끼고 있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병영의 안에서도 가장 넓은 장소, 즉 병사들에게 개방 되어있는 공간인 1층의 홀이다. 군의 서열 1위와 2위, 그리고 섭정 마리아가 한 곳에 모이게 되면 소문을 들은 구경꾼들이 모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왜지? 귀공도 우리 군의 훈련 부족은 통감하고 있을 것 아닌가? 그리고 이번의 손실을 메꾸기 위해 모병을 하게 되면 전체의 숙련도는 더 내려가게 된다고.”
“샤라크 경, 그건 알고있지만 말이죠. 우리 군은 프라이부르크의 격전에서 이미 만신창이가 되버렸다고. 병사들의 사기는 이미 바닥을 기고 있는데 지금 격한 훈련을 해버리면 우리 군은 바로 붕괴해버립니다.”
정론이었다. 레미는 반론을 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심각한 피해를 입고 게오르크도 전사한 브라이텐펠트에서 2년. 그리고 프라이부르크에서 몇 주. 이 대전쟁을 초기부터 해온 하급병과 지휘관의 다수는 전사하고 현재 있는 병사의 대부분은 경험이 적은 용병들이다. 2년 전만큼은 아니지만 프라이부르크에서도 많은 병사가 죽거나 재기불능의 중상을 입었다,
용병들에게 가장 중요한 의의는 황제군의 승리가 아니다. 돈과 목숨이다. 돈이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다면 다른 고용주를 찾아 현재의 고용주의 밑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번 전투에서 아델스리드 성백작국군은 병사들의 목숨을 소홀히 여겼다.
──눈에 띌 정도로 이탈자가 안 나오는 건 라벨덕분이지.
레미는 눈 앞에 있는 라벨을 째려봤다. 이 스위스의 촌뜨기는 난폭한 용병들의 신뢰를 받고 있는 것 같았다.
“댁이 신하들의 대표자라면 난 용병들의 대표자요. 아무것도 안 주고 훈련하라 할거면 간단히 받아 들이지는 않을 거고. 그리고 드디어 베스트팔렌에서 평화 회의가 시작 된다고 들었는데 이제 와서 훈련에 의의를 둘 자가 얼마나 있을련지?”
작년, 1643년에 신성 로마 제국은 프랑스 및 스웨덴과 평화 교섭을 하자는 안건을 제출했다. 하지만 시대는 이미 외국에 기울어져 있었고, 양국은 회의가 시작하기 전에 완전히 우세를 잡으려는 계획을 세우고 제국으로의 침공을 반복해왔다. 그리고 드디어 프랑스와 스웨덴에게 주도권을 뺏긴 형태이긴 하지만 독일 북부, 베스트팔렌에서 평화 협정이 시작하려 한다.
“아직이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어.”
그러나 레미의 말에선 평화로의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황제가 안건을 낸지 1년이 지났지만 아직 협정은 시작조차 안 했다. 만약에 진짜로 시작 되더라도 쉽게 협정이 맺어질 리도 없을 것이고.”
“……전쟁은 계속 된다는 건가?”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 시작 되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추악한 희극이다. 전쟁의 종언이 올 때까지 이 성백작국에 적군이 도달하지 않을 거라는 건 너무나도 멍청한 낙관론이라고.”
적국은 전보다도 적극적으로 가능한 만큼 제국령을 잠식하려 할 것이다. 점령한 면적이 교섭 재료가 되기 때문이다. 아니면 황제의 본거지인 수도 빈이나 황제 최대의 동맹 영방인 바이에른 선제후국의 수도인 뮌헨을 노릴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그 경로 상에는 아델스리드 성백작국이 있다── 평화 협정의 개시는 단기적으로 보자면 오히려 해롭기만 하다.
“앞으로 몇 년만 극복 해내면 이 땅이 황폐해지는 걸 볼 일은 없을 거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온갖 노력이 필요하지. 고작 소규모 영방 국가인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한정 되어있고. 어떠한 방책을 짜더라도 압도적인 적군 주력 부대의 앞에선 물거품으로 돌아가겠지.”
몸집이 작은 레미가 거대한 라벨에게 겁먹지 않고 밀어붙였다.
“적어도 오는게 예상 될 분견대와 단독으로 맞설 정도의 실력만 된다면 희망은 보이게 될 거야. ……부탁이다.”
레미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주변 있는 자들이 술렁이는 소리가 파도가 치는 것처럼 울러퍼졌다. 기사 작위를 가지고 있는 서열 제 1위의 레미가 평민에 서열도 낮은 라벨에게 도움을 청했다. 마리아조차도 매우 놀랐다.
하지만 라벨은 계속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양팔을 끼고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레미의 부탁에 대답을 했다.
“……즉답은 못하겠으니 시간을 좀 줬으면 좋겠군. 샤라크 경.”
그 대답이 거절을 돌려 말하고 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