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네는 죽었다. 하지만 죽기전에 그녀는 많은것을 남기고 갔다. 수많은 역사서들. 서당에서 늠름하게 자라 환상향을 책임지는 어엿한 어른이 된 학생들, 덧없이 요절한 아큐와 함께 만들어놓은 수많은 환상향의 정보들, 그리고 결혼후 남겨놓은 자녀까지.
케이네가 세상을 떠난지 10년이 되던 날. 케이네의 자녀들이 학생들과 이미 서당을 떠나 환상향을 위해 힘쓰던 자들까지 모두 불러와 케이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한때 케이네가 지내던 서당에서 위령제를 지내기로 했다. 나 또한 하쿠레이의 자손의 도움을 받아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고, 환상향 또한 수도 없는 이변과 격변을 거치며 점점 굳건히 성장해 나가고 있었다. 요괴와 인간이 공존하며 살아가는 이곳은 사람들의 생활이 윤택해질수록 점점 발전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윽고 환상향으로 들어가기 전에 보았던 그 모습과 점점 비슷해져가고 있었다. 복장은 간소화 되고, 건축양식은 예전의 거대한 모습과는 달리 점점 간략해지고 단순해지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케이네가 말했던 '근대화'라는것이 이런것일까.
"선생님은 참 대단했지. 그 사고뭉치 야마토를 이렇게 큰 사람으로 만드실줄 누가 알았겠어?"
"그치? 야마토 녀석...정신머리 바로잡고 마을의 대지주가 되겠다고 농경에 관해선 모든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고 다녔었잖아. 결국 원하던대로 지금은 환상향의 대지주가 되어 마을의 경제를 책임지고 있고 말이야"
"그것도 그거지만 하나마라도 환상향에선 나름 알아주는 행상객이 됬잖아. 어딘가의 도구점 주인이 도움을 많이 주고 있다고 했나?"
"그랬지. 가끔 얼굴 마주치는데 여태껏 보지 못했던 신기한 물건들이 많이 보여. 뭐. 지금 당장 쓸수 없는 물건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거나 용도를 알아내면 사용하는것도 가능하겠지"
어른이 된 학생들은 저마다 예전에 기억에 남았던 아이들을 되새기며 추억에 잠기곤 했다. 케이네의 자손인 카미시라사와 바라 또한 그 모습을 즐겁게 지켜보고 있었다. 케이네를 위한 술잔이 들린 이후 저마다 이야기꽃을 피우며 추억에 젖어있었다.
'나와 함께한것만이 추억은 아니구나'
케이네가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인연을 만났는지, 그것이 이런 결실을 맺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케이네가 말한 역사는 오직 땅에서만 이뤄지는것이 아니라 사람에게도 생긴다는것이 이해가 갔다. 이것이 케이네의 역사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의 역사는?
끝도 없이 이어져 나아가는것일까?
갑자기 마음 한켠이 답답해진 나는 술잔을 들고 연회가 한창 이뤄지고 있던 장소를 떠나갔다. 대청마루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달을 바라보았다. 저주받을 정도로 미워했던 인간이 살았던 그 곳을 바라보고 있자니 또 다시 한번 추억에 잠기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나가서 무엇을 하려 하시나 했더니 그저 고독을 즐기고 계신것이었습니까?"
"넌..."
카미시라사와 바라였다. 케이네의 첫번째 아이로 어머니쪽보다는 아버지쪽을 많이 닮은 반요였다.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만월이 되면 백택이 되어 방문을 걸어잠그고 역사를 먹어치우거나, 만들어내곤 했다. 20살이 되던해에 어머니를 여의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젓하게 상주의 역할을 다 했었다. 그리고 지금 나를 보며 생긋 웃고 있는 이 반요의 모습은 생전의 케이네의 성격과 쏙 빼닮았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로 기묘한 느낌을 불러왔다.
"어머니는 생전에 당신과 친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많이 친했어. 내가 여기서 유일하게 사귀었던 친우니까"
"그렇군요. 어머니께서는 당신의 그 성격에 의지를 많이 했다고도 하셨습니다. 자신과는 다른 쾌활한 성격이 마치 대조된 모습을 보고있는듯해서 재미있다고도 하셨고..."
"그런가. 하지만 나도 예전에는 고귀한 아가씨였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그런 말만 사용하기엔 삶이란게 각박하더라고"
바라는 나의 실없는 농담에 그저 미소만 띈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라는 달을 바라보더니 숨을 내쉬었다. 바람이 불어 우리의 머릿결을 흔들었다. 바라의 짧은 흑발이 바람에 살며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바라는 나를 다시 한번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어머니의 친한 친구인 당신을..."
"...?"
"사랑하는것은 안됩니까?"
나는 화들짝 놀라 술잔을 떨어트렸다. '땡그랑'하는 소리가 나즈막히 밤공기를 뒤흔들었다. 달빛이 뒤덮고 있는 차가운 밤공기 아래에 침묵만이 감돌았다. 당혹스러운 마음을 숨기지 못해 표정마저 어떻게 변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놀란 표정을 지었을지, 화난 표정을 지었을지...바라는 여전히 미소짓고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진중함이 감도는 얼굴에는 이것이 농담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취..."
나는 간신히 떨리는 입술을 움직여 말을 했다.
"취한거면...빨리 들어가서 쉬도록 해..."
"모코우씨. 저는 보다싶이 취하지 않았습니다. 아까전부터 술은 한 모금도 입에 대고 있지 않지 않았습니까"
"...그럼 이게 농담이 아니라는거...?"
바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전조도 없이 뜬금없이?
"너...여자한테 매력 없다는 말 많이 들었지..."
"그것도 아닙니다. 모코우씨야 말로 사람을 보는 눈이 정말로 없으신것같습니다."
바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껄껄 웃어버리곤 술잔에 들린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자. 2시간만에 마신 술입니다. 대답은?"
"...불가능해"
"어째서입니까?"
"...나는 케이네의 가장 친한 친구였어. 목숨보다도 소중한 친구였다고. 물론 나에게 목숨은 끝도 없는거라 무작정 사용하는거라 쳐도. 하여튼! 가장 친했던 친구의 자식과 사귄다니. 불가능해!"
"그렇군요..."
"미안하게 됬어. 하지만 불가능한건 불가능해"
마음이 있다고 해도. 그렇게 되버리면 케이네에게 전혀 면목이 없어진다. 케이네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했던 말. 그 말이 떠올랐다.
'아이들을 잘 부탁해...'
어떻게 그 부탁을 들은채로 그런 관계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전혀 불가능 했다.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생각을 애써 외면한채 바라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바라는 달을 바라본채로 술을 다시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달을 바라본 채 말을 이었다.
"곧 며칠 뒤면 보름달이 밝습니다. 어머니도 보름이 되면 요괴가 되어 역사를 고치곤 하셨죠. 저 처럼 힘드셨겠고."
"..."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
"모코우를 잘 부탁한다고...바보같은 면도 있지만 착한 아이라고. 부디 네가 자라게 되면...그 바보같은 아이가 매일같이 죽림에서 굶지 말고 따뜻한 밥을 매일 먹게 해달라고. 겨울에 추위에 떨지 않게 따뜻한 옷을 입게 해달라고. 늘 움막에서 새우잠을 자지 않고 넓은 방에서 편하게 자라고. 그리고 자신이 죽고 난 후에도 외로워 말고 인연을 찾으라고..."
"케이네..."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설마 케이네는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나에게 부탁을 한걸까?
"어머니는 저의 마음을 꿰뚫어보셨습니다. 일종의 허락이셨죠. 하지만 저도 많이 고민했습니다.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던 당신에게...제가 가능할지...하지만 이렇게 용기를 냈습니다."
바라는 그렇게 말하며 내 손을 맞잡았다. 따스한 온기가 손을 넘어 심장까지 전해진다. 나는 두 눈을 감고 바라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바라는 소리 없이 어깨를 들썩이는 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어쩌면...이런걸 원했을지도 모른다. 원하지 않았을지라도. 케이네라면 이해해주고 허락해줄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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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없어서 부랴부랴쓴 단편입니다.
오랫만에 단편으로 다시 찾아왔습니다.
장편 구상하다가 간만에 이런 전개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시간이 나자마자 곧바로 써내려갔습니다.
모쪼록 마음에 드셨으면 하네요.
그럼 저는 내일 시간이 나는대로 장편으로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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