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누구죠?"
물음에 대한 답변이 아닌 뜬금없는 질문에 여성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나타의 질문을 이해할 수 없었던 여성은 아나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뇨."
여성은 이번엔 자신을 가리켰다.
"네."
여성의 표정이 한 층 더 어리둥절해졌다. 차라리 아나타가 그 자신이 누구냐고 물어보았다면 그보다 더 어리둥절해졌을 지도 몰랐다. 여성은 잠을 자기 전에 이미 에이린에게 아나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기억을 잃어버린 남자. 혹은 틈새의 요괴, 야쿠모 유카리로부터 저주에 걸린 인간. 그래서 여성은 어이없다는 말투로 말했다.
"에이린이나 이나바에게 내 이야기를 듣지 못했니?"
아나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성은 한참동안 고민을 한 후에야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아, 그럴수도 있겠구나. 에이린이라면 깜빡할 수도 있지. 아무래도 이런 사소한 건 신경쓰지 않을테니까……."
"사소한 거라니요?"
"예의나 예절 말이야."
예의나 예절? 왠지 모르게 카구야는 반말로 말하고 있고, 아나타는 존대를 하고 있었지만 그걸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나타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자 카구야는 정말 모르겠냐는 듯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굳이 그걸 설명해주지는 않았다. 귀찮았다. 아나타는 뭔가 눈치챈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고개를 휘휘 젓더니 말했다.
"아무래도 기억과 함께 망각의 저편으로 날아갔나 봅니다. 예의나 예절은."
"그래? 그것 참 편리하구나. 기억상실증. 근데 그래서 어디까지 알고 있지? 혹시 아무것도 모르는 거니?"
"레이센이 달에서 온 토끼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 사실 달에서 온 건 이나바 뿐만이 아니야. 에이린도, 나도 달에서 왔지. 물론 나나 에이린이 이나바처럼 토끼인 건 아니야. 우린 달의 인간, 너희 지상의 인간들이 부르기를 월인(月人)이라고 한단다. 그리고 나는 호라이산 카구야. 한때 달의 공주였던 몸이지."
"지금은 아니라는 소리인가요?"
카구야는 웃음만 지어보일 뿐 답해주지 않았다. 아나타는 별 기대없이 이어서 말했다.
"그렇다면 '달'의 인간이 왜 여기있는 지도 안 알려주시겠죠?"
"그래."
카구야는 그렇게 답하며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그리고 하품을 하며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근데 아나타는 진짜 재미없는 남자구나."
"말했다시피 취미가……."
"그건 거기까지하는 게 어때?"
카구야가 질린다는 듯이 말하자 아나타는 입을 다물었다. 아나타가 다시 뭐라 말하려고 했을 때 아나타는 카구야가 무언가 생각 중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카구야는 방긋 웃어보였다. 아나타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의 웃음에서 불안감이 느껴졌다. 에이린과 레이센이 그랬던 것처럼 저렇게 웃었을 때는 항상 뒤가 좋지 않았다. 그리고 카구야가 그런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나타는 생각했다. 달은 사실 지옥이었나보다. 웃기만해도 악의가 품어져나오는 악마같은 토끼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걸 보니.
아나타는 늦기 전에 말려야될 거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카구야, 무슨 짓을……."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영원정에 카구야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아나타가 당황하지 않은 이유는 어디까지나 당황하는 법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나타는 무슨 말을 해야될 지도 몰랐고, 무슨 행동을 취해야될 지도 몰랐다. 그저 바보처럼 멍하니 서있었다. 마치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침착하게 대응하기 위해 그런 것처럼. 물론 아나타는 어떤 사태인지 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곧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고 레이센이 놀란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공주님! 무슨 일이신가요!"
"저, 저 남자가 나를……!"
아나타가 잠시 레이센에게 시선을 돌린 동안 카구야는 어느새 방구석으로 물러나 이불로 몸을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전신을 가리지는 못해 하늘하늘한 잠옷이 흘러내린 어깨가 보였다. 아나타는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했다.
이런거군.
아나타는 크게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했다. 침착하게 진심을 담아 정황을 설명한다면 레이센도 이것이 장난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렇기에 아나타는 침착하게 우선 상황을 설명하려고 했다
"레이센, 이건 그러니까…… 아?"
쿵!
그러니까 말할 수 있다면 말이다. 아나타가 말하는 사이 레이센은 아나타의 옷깃을 잡고 그대로 메쳤다. 아나타는 영문도 모른채 땅바닥에 쳐박혔다. 아나타가 신음을 흘리는 사이 레이센은 그런 아나타를 깔고 앉아 왼팔을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았다.
"더이상 말하지 마세요! 이 파렴치한! 변태! 색마! ㅁㅁ범!"
말할 기회도 주면 모른달까 이런 식으로 나오니 조금 억울합니다만. 아나타는 그렇게 생각하며 앞으로도 해명할 기회가 없을 거 같다고 생각했다. 이러니저러니 당황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해탈이라도 한 듯이 엄청난 평정심의 소유자가 아니라 어떻게 대꾸해야 될지도, 그리고 당황해야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아나타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기로 했다. 레이센이 그렇게 시켜서가 아니라 말을 해도, 아니 입을 열기만 해도 오해가 더 심해질 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나타는 여전히 실감나는 연기를 펼치고 있는 카구야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뭐, 내가 잘못한 건 없으니까.
아나타는 '진실은 밝혀진다!'라는 기억 속의 단편을 굳게 믿고 에이린을 기다렸다. 에이린이라면 이 귀찮고 마음에 들지 않는 장난을 금방 해결해줄 것이다.
곧 에이린이 도착했다. 아나타는 에이린이 금방 이 사태가 카구야의 장난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해결해줄 거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아나타는 에이린이 아나타 자신을 레이센 보듯, 그러니까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듯이 내려보았을 때 레이센이 된 듯한, 그러니까 세상에 둘도 없는 얼간이가 된 듯한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아나타? 그렇게 굶주렸니? 독방이라도 마련해줄까? 휴지도 같이?"
경멸하는 듯한 에이린의 말투에 아나타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상황을 되짚어보는 대신 그냥 다 포기해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