쵸가 알려준 정보를 토대로 센라와 코우가 투귀암을 향한 여정을 시작한지 열흘이 지나갈 무렵이었다. 시나노국에서 고우즈케국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을 걷던 둘은 별안간 들려온 소란에 이끌려 그 진원지로 발을 옮겼고, 거기서 어떠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왕래가 잦은 사실을 알려주는 잘닦여진 길 한복판에서 산적떼가 상인을 습격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소가 끄는 짐수레 주위로 몰려든 산적들이 안에 실린 궤짝과 보따리를 들고 나른다. 그 주위로 같은 복장을 한 여섯 구의 시신이 어지럽게 쓰러져 있었다. 시신 근처에 칼이 누워있는 것을 보면 아마 상인을 호위하던 무사였을 것이다. 그 무사들이 산적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하고 자신의 목숨마저 위험하게 된 상인은 몸을 웅크린 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일련의 광경을 풀숲 사이에서 말없이 지켜보던 센라는 정했다는 듯 서슴없이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런 센라의 돌발행동에 코우도 덩달아 따라 나서는 꼴이 되었고, 곧 산적들의 눈에 띄게 되었다. 산적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아가며 센라가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산적분들 잘 들으시오. 나는 시소우 센라라고 하오!"
갑자기 튀어나와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어서 의아하게 바라보던 산적들은 이내, 눈을 크게 뜬 채 침을 꿀꺽 삼켰다. 어째 덩치가 너무 크다 싶더니 머리의 커다란 한쌍의 뿔을 발견하고는 경악한 것이었다. 겉모습으로 판단하건데, 요괴. 그것도 오니로 보이지 않은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산적들은 서로 수군거리며 뒷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간만에 호사를 누려보나 싶었더니, 오니와 마딱트리게 되다니. 오늘은 운수가 있다가도 없는 날이었다. 산적들은 불만과 아쉬움을 토로하듯 저마다 입가를 비틀며 달아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고, 그에 앞서 센라가 그들을 향해 말을 건넸다.
"한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대답해 주시지 않겠소?"
갑작스럽게 물어오는 오니의 모습에 산적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의아해했다. 그리고 질문이 이어졌다.
"고우즈케란 곳에 가고 싶은데, 이리로 쭈욱 가면 되오?"
질문을 마치고 입을 다문 센라는 산적들의 모습을 훑으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 중 선듯 대답을 들려주는 이는 없었다.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어떡해야 할지 눈빛으로 의논할 뿐. 기다리다 답답해진 센라가 호통을 쳤다.
"이리로 가면 고우즈케란 곳이 나오냐고 물었는데, 왜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거야?"
점잖은 척 떨던 가면이 벗겨지고, 본 성격이 나온 센라가 사나운 눈으로 산적들을 노려봤다. 그런 그의 모습에 섬뜩함을 느낀 산적들은 그제야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하고 부리나케 도망치기 시작했다. 산적들은 조금이라도 살아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모두 다른 방향으로 사방팔방 흩어졌다. 대답 대신 도주를 택한 산적들의 모습에 센라는 이마에 핏대가 서는 것을 느끼며 이를 갈았다.
"저것들이 감히, 날 무시하고 도망쳐?!"
기어이 화가난 센라의 모습에 코우는 속으로 산적들의 명복을 빌었다.
*
산적들 중에서 무사히 살아 남은 자는 없었다. 각자 다른 방향으로 도주하는 건 좋은 판단이었지만, 상대가 너무 안 좋았다. 화가난 센라의 각력은 단 한번의 도약으로 도망치던 산적을 따라잡을 정도였고, 그렇게 한 발자국 내딛을 때 마다 산적들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고갯길 곳곳에 생겨난 산적들의 시체는 온전한 것이 없었다. 머리가 터져버린 시신, 가슴 아래가 터져있는 시신, 반신이 흔적도 없이 날아간 시신, 하나 같이 끔찍한 몰골이었다.
아까까지 자신의 호위를 죽이고 짐을 뺏어가던 산적들이 비명만 남기고 전부 죽어버리자, 상인은 극도의 공포를 느끼고 그 자리에서 웅크린 채 굳어져 있었다. 그가 방금 일어난 일이 믿기지 않아하며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을 때, 커다란 그림자가 그의 몸을 가렸다.
"거, 물어볼 사람이 이제 당신 밖에 안 남아서 그런데.."
산적들을 전부 비명횡사하게 만든 자의 목소리였다. 상인은 공포심으로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 많던 산적들을 순식간에 죽여버린 자라면 요괴가 분명하다. 그렇다면 자신 역시 산적들과 같은 운명이 될거라 쉽게 짐작되었다. 상인은 절망을 느끼며 흐느끼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사..살려 주시오! 짐은 다 가져가도 되니 제발 목숨만은!"
그렇게 애원한들 무슨 소용이겠나만은 상인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심정이었다. 센라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상인을 내려다보며 무릎을 굽혔다.
"당신 까지 죽이면, 누구한테 물어보라고? 그러니까, 안심하고 내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슈!"
그런다고 안심하기 만무한 상인. 그래도 용기를 내어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보니. 세상에! 그는 너무 놀라서 까무러칠뻔 했다. 산적을 죽인 자가 요괴인 것을 알았지만, 설마 오니였을 줄이야. 그제야 도망가던 산적들이 한명도 남김없이 죽은 것이 이해되는 그였다.
오늘은 정말로 불운한 날이 아닐 수 없었다. 산적을 만나질 않나, 거기다 오니를 만나다니. 자신의 운명이 다한거나 다름이 없었다. 센라는 상인의 대답을 기다리며 노려보고 있었지만, 절망에 빠진 상인이 태연히 응해줄 리가 없었다. 대답이 들려오지 앉자 센라가 다그치듯 말했다.
"안 죽일거니까, 이제 그만 좀 고개를 들지 그래?"
상인도 가만히 웅크리고 있어봤자, 산적들처럼 죽임을 당할 거라는 것을 알기에 간신히 고개를 들고 센라의 말에 응했다.
"네! 뭐든지 물어 보십시오! 알고 있는 건 전부 얘기해 드리오리다!"
"그래, 그 기세야. 좋군!"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이해한 상인의 태도에 센라는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묻겠는데. 이 길을 따라 가면 고우즈케란 곳이 나오는지?"
"그럼요! 이 길을 쭉 따라서 이틀 정도만 가다보면 나옵니다요. 실은 저 역시 고우즈케국으로 가던 길이라.. 틀림 없습니다!"
"흠.. 그런가?"
상인의 대답에 코우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눈을 반짝였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게 어때? 어차피 동향이니, 날 호위 삼아 동행해보지 않겠나?"
"네..네에?!"
갑작스런 제안에 상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기더러 오니를 호위로 삼으라니. 엉뚱한 것에도 정도가 있지. 요괴 그것도 오니가 상인의 호위를 한다는 얘기는 들어 본적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런 제안을 해오다니, 대체 저 오니는 무슨 생각인 거지? 상인은 센라의 의도가 도저히 알 수 없어 혼란해했다. 어떻게 생각해봐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호위라뇨? 그건 왜입니까?"
"그냥. 심심해서!"
"그.. 심심해서입니까!?"
센라가 상인의 호위를 맏으려 한 것은 결국은 단순한 변덕 때문이었다. 목적지의 방향을 알았으니, 상인은 내버려 둔 채 후배와 둘이서 이동하는 것이 훨씬 빠를텐데도 아무런 이득도 없는 상인의 호위를 자처하는 건 그저 심심풀이. 그것은 사실 상인에게 있어서 나쁜 제안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오니의 변덕에 편승하여 고우즈케까지 안전하게 가는 편이 좋을지 모를 일이었다.
두려움 그 자체인 오니를 호위로 삼는 것에 저항감이 적잖았지만, 상인은 재빨리 머리를 굴려 자신에게 최대한 도움이 되는 쪽으로 판단했다. 그리고 만에 하나에 대한 불안을 떨쳐내어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좋습니다! 오니는 뱉은 말을 지킨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나중에 딴 말 하지 마시고, 고우즈케까지의 호위를 부탁 드리겠소!"
"물론이지! 오니는 두 말 하지 않으니까."
뒤에서 그래도 되냐는 코우의 걱정섞인 물음이 들려왔지만,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 묵살당할 뿐이었다. 아무 문제 없다는 듯 호위 하며 동행하기로 한 센라. 그리하여 상인은 다소의 불안감은 안고 센라의 호위를 받으며 고우즈케로 향하는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
센라와 상인이 기묘한 동행을 한지 반시진 지나갈 무렵였다. 가파른 고갯길이 점차 내리막으로 접어들 때, 센라가 불쑥 물어왔다.
"거 목 좀 축이고 싶은데, 술은 없는 거요?"
"그게.. 수레에 실린 건 명주와 육포가 전부인지라."
"정말 없어?"
"네! 정말입니다요."
상인이 거짓을 고하는 것 같지 않기에 센라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기로 했다. 소가 끄는 수레는 보기엔 많이 실려 있어 술도 있을 것 같았는데. 아쉬워하며 입을 쩝 다시는 센라. 그는 팔짱을 끼고 무언가 골몰히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가 다시 물어왔다.
"그럼, 이 근처에 마을 같은 건 없는가?"
"마을이라..."
확실히 이길로 반나절 정도 걸어가면 나오는 마을이 있었다. 그리고 원래 여정도 날이 저물기 전에 그 마을에 들려 하룻밤 지낼 예정이었고. 상인은 불안함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길을 따라 가다보면 날이 저물기 전에 마을이 보일 겁니다."
"그렇다면 걸음으로 두시진 정도 거리겠군."
"그렇습죠."
"선배. 뭔가 좋지 않은 일을 꾸미는 건 아니겠죠?"
무언가 불길함을 느낀 코우가 미심쩍은 눈으로 물었고, 센라는 태연하게 되받아쳤다.
"너 내가 음험한 놈으로 보이냐? 좋지 않은 일이 아니니까, 쓸데없는 걱정 마."
그러나 코우는 의심의 눈을 거두지 않고 센라가 저지를 일을 앞질러 얘기했다.
"술 마시고 싶어서 먼저 마을에 가려는 거 아니에요?"
코우의 말이 너무나 확신에 차있어 센라는 '으음'하고 침음성을 흘리다 솔직하게 이실직고했다.
"그래. 그러면 안 되냐?"
"안 되는 게 당연하죠."
딱잘라 말하는 코우.
'왜?'하고 센라가 이유를 묻자, 코우는 작게 숨을 내쉬고 설명했다.
"그야 저분이 있으니까죠. 고우즈케 까지 같이 동행하기로 해놓고 멋대로 행동하면 곤란하다고요. 행여 선배가 마을에서 행패를 부렸다고 쳐요. 그러면 동행인 저분의 입장이 얼마나 난감해 질지.. 아니, 선배와 동행하는 것 만으로도 오해를 사기 좋을 거에요."
"무슨 오해를 말이야?"
"오니의 앞잡이라던가 말이죠. 까딱하면 인간인 저분도 요괴 취급 받을지도 모를 일이라고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상인은 순간 등줄기가 오싹해왔다. 오니와 같이 다니는 요괴의 지적이 정확했기 때문이었다. 만에 하나 이긴 하지만, 오니와 같이 다니는 것을 목격 당해 인간으로 둔갑한 요괴라는 등의 소문이 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 아닌가. 그저 고우즈케 까지 편하게 가는 것만 생각했는데, 짧은 생각이었던 것이다. 상인은 자신이 저 요괴에 비하면 하나만 알지 둘은 모르는 둔치라고 느껴 스스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헌데, 이를 어쩐다.
상인의 얼굴에 수심이 드리워졌다.
"걱정 되시는 건가요?"
그런 상인의 안색을 읽은 코우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네 말대로 오해 받아 안좋은 소문이라도 돌면 장사 같은 건 접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한숨처럼 뱉어내는 푸념. 상인은 코우가 요괴인데도 대하기 편하게 느껴졌다. 이대로 오니와 동행을 계속 했다간 요괴의 지적이 현실화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약조를 어겼다간 오니의 노여움을 사버릴 게 분명한 일. 이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역시, 오해를 살 위험이 있더라도 계속 동행하는 편이 나으려나.
양자택일을 고민하는 상인.
코우는 그의 걱정을 덜어내는 말을 했다.
"그럴 걱정은 안 해도 되요. 선배가 사고 치지만 않는다면 말이죠."
"그게 무슨 말인가?"
"저와 선배는 어차피 요괴. 인간들 눈이 닿는 마을에 가까워 질 때, 따로 행동하면 그만일 테니까요. 같이 있는 모습만 보이지 않으면 되니 말이죠."
"그럼, 너와 오니님은 마을에 들어서지 않고, 따로 행동한다?"
"적어도 낮엔 말이죠. 선배가 좋아하는 술도 나중이라도 그쪽이 준비해 주시면 될 거에요."
"그거 고마운 소리군."
오니와 행동을 같이 하는 걸로 요괴 취급 당할까봐 걱정이었던 상인에게 달갑기 그지 없는 얘기였다. 즉, 코우는 상인과 동행하기로 한 이상 최소한의 배려를 하려는 것이고, 애초에 요괴인 자신과 선배가 대낮부터 인간마을을 활보한다는 건 사리에 맞지 않는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코우의 말대로 하면 상인은 요괴라고 오해를 살 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탕아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 탕아가 코우의 얘기에 불만을 제기했다.
"뭘 혼자서 다 정하고 있어!"
"그럼, 이분이 무슨 꼴을 당하던 내버려 둘 거에요? 이왕 호위하기로 했으면 끝까지 책임져야 할 것 같은데."
"그건 지나친 생각이야. 저 놈이 어딜봐서 요괴로 보인다는 건데?"
"그렇게 안 보여도 인간들 눈엔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는 거에요."
자신의 말에 또박또박 반박하는 코우의 모습에 센라는 기도 안 차다는 듯 눈살을 구겼다.
"답답해 죽겠군. 그런 거 하나에서 열가지 일일이 눈치봐가며 어떻게 사냐? 어쨌든 저 놈, 고우즈케까지 무사히 동행 시킬거니까, 그런 걱정 하지도 마!"
"그러니까, 제 말은 저분 입장도 생각해 주자는 건데."
"염병하고 자빠졌네. 입장은 얼어죽을! 책임은 너 혼자 실컷 져라. 난 내 멋대로 하련다!"
그렇게 말하고는 센라는 더는 할 얘기 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코우 역시 입을 다문다. 상인을 호위하는 것에 대해 고우즈케까지 신변만 보장하면 된다는 센라와 신변 뿐만 아니라 그의 입장까지 생각해야 한다는 코우. 차이가 큰 둘의 소견은 좁혀지는 일 없이 평행선을 그릴 뿐이었다.
요괴이면서 자신을 그렇게까지 생각해준 코우에게 상인은 고마움을 느끼며 씨익, 미소를 지어보였다.
"뭐.. 어떻게든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