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혼란스러웠다. 뜨거운 여름 간만의 친구들과 목욕, 산 속에 심한 일을 당한채 버려져 있던 카라스 텐구, 갑작스럽게 난입한 카라스 텐구들,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 머리속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너무 뜨거운 장소에 오래 있어서 더위를 먹어버린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건 지금 나는 죽을 위기를 모면했다는 것. 속이 갑작스럽게 울렁거리기 시작해서 아침부터 낮까지 먹었던 모든것들을 게워냈다.
"역겨운 놈이군..."
근처의 카라스 텐구가 불쾌하다는듯이 말했다. 그러고는 아야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아야님. 당주님께서 아시면 저나 아야님이나 큰일이 나게 됩니다!"
"알게 뭐야! 어차피 아버지는 나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는걸?"
내놓은 자식이라는건가? 하긴 지난번에 사메이마루가 말했던걸 들어보면 확실히 부잣집 아가씨와는 조금 동떨어져 있는 모습이긴 했다. 신문 기자가 되겠다느니 그러기 위해 조금 더 바깥을 알고 싶어서 돌아다닌다느니...아마 귀족집 자제분이라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들이겠지.
카라스 텐구는 나의 머리채를 잡고 들어올렸다. 나는 방금전 속에 있던걸 모조리 게워낸데다 뜨거운 태양빛에 지칠대로 지쳐있어 죽어가는 신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머리가죽이 벗겨질듯 고통스럽고 괴로웠지만 딱히 비명을 지른다던가 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하여튼...이번 일은 당주님께 비밀입니다..."
"알았으니까 빨리. 내가 알아서 해결한다니깐"
카라스 텐구는 이건 또 무슨 귀족집 아가씨의 장난일지 속이 터져 미칠 지경이였지만 아야는 그저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나 또한 정신이 왔다 갔다 하는 와중에 아야의 의도가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을 했다.
"녀석을 샤메이마루 가문 주관 감옥으로 이동시켜. 감시는 그쪽 집안에서 하겠다고 하니...믿지는 못하겠지만...너희들은 그쪽으로 이송시킨 다음 신속히 복귀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나는 머리채가 붙잡힌채 땅바닥에 질질 끌려가다 간신히 다리에 힘을 주어 걸음걸이를 옮길 수 있었다. 비틀거리는 내 모습을 보며 아야가 빙그레 웃고는 손가락을 입에다 가져다 살며시 가져다 댔다. '쉿' 하는 희미한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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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안에서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말이 감옥이랬지 생각보다 시설이 좋았다. 사극에서 나오는 감옥은 나무로 만들어진 창살에 볏짚을 이불과 배게 삼아 자는 그런데가 아니였나? 어쩐지 묘하게 교도소나 형무소같은 곳에서 볼수 있는 꽤나 좋은것같은 시설이였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말동무 할 사람이 없었지만 어느정도 버틸수는 있었다. 애당초 말이 많은 성격도 아닌데다 혼자서 생각하는것으로 몇시간이고 시간을 떼울수 있었기에 이런 시설에서 지내는것도 꽤나 만족했다.
가끔 간수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상황이 썩 좋지 않게 흘러가는듯 했다.
"이야기 들었어? 백랑 텐구와 화친을 맺기로 한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전쟁이 터질것 같다는데"
"어쩌면...안그래도 높으신 분의 자제분이 그렇게 됬는데 안그러고 배겨?"
"아야마리님께서는 최대한 이 상황을 좋게좋게 흘러가게 하려는 모양인데...그게 귀족들 사이에서는 좋게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모양이야"
"그럴수밖에. 카라스 텐구 귀족 대부분이 다 1000년동안의 전쟁에서 큰 공로를 인정받아 올라온 사람들이니까 말이야...백랑 텐구와의 관계는 말 하지 않아도 알걸?"
또각또각. 높은 게다 소리가 복도 안을 메웠다. 문 앞의 보초 2명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목례를 했다.
"샤...샤메이마루 아야님!"
"안녕? 고생이 많아요"
아야가 해맑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두 손에는 작은 반합이 들려있었고 반합 안에는 차가운 차가 두 잔 들어있었다. 아야는 싱긋 웃으며 차를 건네주었다. 간수들은 고개를 바닥에 쳐박을 기세로 꾸벅 숙인다음 차를 마셨다.
"여러분들이 꽤 고생하는거같아서 제가 직접 제조한 차예요. 맛이 어때요?"
"정말 맛있습니다!"
"와! 정말요?"
아야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기뻐했다. 그때 간수의 몸이 흔들리는것같더니 이내 두명 다 바닥으로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그야 특별히 제가 만든 차니까요"
아야가 바닥에 쓰러진 간수들을 보며 말했다.
"죽...인거야?"
"아니요. 그냥 수면제를 살짝 탔을뿐이예요. 늦어져서 미안해요. 적어도 2~3일밖에 안걸릴줄 알았는데 이걸 구하는데 꽤나 시간이 걸렸어요. 사과 드릴게요"
아야가 감옥 문을 열면서 말했다. 감옥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나는 천천히 밖으로 걸어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 마을만 빠져 나가면 될거예요. 외모도 카라스 텐구 비슷하게 보이니 누가 봐도 카라스 텐구처럼 보일거예요. 그래도 당신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조심하고요. 이 옷이랑 가면을 받아요"
아야가 준 옷은 카라스 텐구의 복식이였다. 현대식으로 개조한 옛날 옷 같은게 지금 당장 밖에서 입고 다녀도 무리가 없을정도로 깔끔하고 예쁜 옷이였다. 가면은 하얀 여우 가면이였다. 그리고 근처에 굴러다니는 칼 하나를 쥐어주며 아야가 말했다.
"이렇게 입고 다니면 꽤나 어엿한 장수처럼 보이겠네요. 카라스 텐구 장수들은 혼자 돌아다니는걸 좋아하니 누구도 용무를 쉽게 묻지 않을거예요. 말단 초계 텐구라던가 신참이 검문을 하지만 않는다면요"
내가 옷을 입자 아야가 말을 했다. 허리에 칼을 차는것까지 완벽히 끝나자 아야가 서둘러 손짓을 했다.
"동문쪽이 저희 마을로 나가는 문 중에서 제일 가까워요. 마을도 그렇게 많지 않다보니 쉽게 빠져나갈수 있을거예요. 어서 빠져나가세요!"
"고맙긴 한데...왜 나를?"
아야가 휙 돌아보았다. 입가에는 해맑은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지난번에 제가 했던 말 기억하죠? 이 은혜는 언젠가 갚겠다고...그것도 있고...조금 당신에게 관심도 있어서요...인간인 당신에게요"
"알고 있었어?!"
"그야 카라스 텐구와 인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이건걸요"
아야가 자신의 귀를 가리켰다. 마치 엘프의 귀처럼 끝이 살짝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카라스 텐구의 귀 또한 그랬다. 아마 다른 카라스 텐구들이 내가 카라스 텐구인줄 알았던 이유라면 덥수룩하게 자란 내 머리 때문이겠지. 그런 와중에도 내 귀를 보고 인간인걸 알아내다니 관찰력이 뛰어난 아가씨였다.
"신문 기자가 되려면 이정도 관찰력은 필수니까요. 자 어서 가세요! 언젠가 다시 만나길 빌게요..."
아야는 이 말을 끝으로 서둘러 감옥 밖으로 빠져나갔다. 나또한 지체하지 않고 서둘러 감옥 밖으로 나와 마을의 인파 사이로 천천히 스며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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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짓이지...?"
아야마리는 자신의 방으로 침입한 4~5명의 카라스 텐구를 보며 불만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이미 5명은 가슴께가 베여 바닥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아야마리 또한 온 몸에 날카로운 상처를 입은채 가쁜 숨을 쉬어대고 있었다.
자신을 모시던 식솔들은 손목 도는 머리가 달아난채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이미 아야마리의 처소 안의 모든 요괴들은 정체불명의 침입자에 의해 목숨을 잃은 뒤였다.
"죄송합니다. 이 모든것은 텐마님의 뜻...당신은 더 이상 카라스 텐구를 이끌 자격이 없습니다"
카라스 텐구의 말에 아야마리가 호탕하게 웃어버렸다. 잠시동안의 웃음에 카라스 텐구들은 서로를 쳐다보았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침묵에 다시 검을 겨누었다.
"그래...텐마라...그래서. 너희의 뜻이 나와 맞지 않아서 나를 죽이려 한다? 내가 고작 백랑 텐구와 화친을 맺으려 했다는 이유로?"
"저희의 존재는 백랑 텐구와의 싸움에 있습니다. 저희는 둘중 하나가 사라질때까지 이 싸움을 멈추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랬다간 우리 텐구 모두가 사라지게 된다!!"
아야마리가 외쳤다. 카라스 텐구들은 아야마리의 외침에 움찔했다.
"지금 이 환상향 곳곳에는 텐구들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인요가 넘쳐난다! 그대들은 어째서 미래를 보지 못하고 현실만 보려 한단 말이냐! 이 싸움으로 우리가 약해졌을때 가작 덕을 볼 자는 너희가 아니다! 이 환상향에 있는 다른 세력들이란 말이다!"
"...하실 말씀은 그뿐이십니까?"
"말이 안통하는 외도 녀석들...!"
아야마리가 바닥에 꽃혀있던 노다치를 꺼내들었다. 검의 등쪽에는 나무로 음각이 새겨져 있었다. '무라타' 자신의 아버지의 이름이였다. 어느날 누군가의 손에 끔찍하게 살해당한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의 의지를 잇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반 강제적으로 앉혀진 수장의 자리. 그 이후로 자신을 꼭두각시처럼 부리려는 자들이 주변에 넘쳐났었다.
하지만 아야마리는 그렇게 호락호락하거나 무르지 않았다. 아버지의 죽음을 실감하게 된 순간부터 그녀는 다른 카라스 텐구 귀족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짓을 수도 없이 저질러 왔다. 어쩌면 이번 일 또한 그랬던 데다, 이번 일로 인해 완전히 눈밖에 나버린것이겠지. 자신의 아버지처럼.
그리고 이 순간이 찾아왔다. 자신의 아버지처럼. 어쩌면 혼례를 늦추길 잘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후계자...아니 자식에게 이런 꼴을 보이는것만큼 슬프고 괴로운 일이 어디있겠는가.
"아버지..."
아야마리는 자진의 노다치에 새겨진 아버지의 이름을 보고는 조용히 아버지를 불렀다.
"수백년동안 잊고 살았던 아버지의 얼굴을..."
카라스 텐구들이 순식간에 달려들었다. 문을 박차고 난입한 카라스 텐구들이며, 창문에서 기어오는 카라스 텐구들이며 족히 수십은 될법한 카라스 텐구들이 일제히 아야마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제야 볼수 있게 되었군요..."
아야마리는 노다치를 있는 힘껏 휘둘렀다. 기다란 노다치의 도신에 맞고 2~3명이 비명과 함께 나가떨어졌다. 카라스 텐구들의 공격을 흘려내며 한명씩 한명씩 몸을 베어나갔다.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카라스 텐구들이 낙엽처럼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아야마리의 방 안으로 몰려들어오는 카라스 텐구들의 수를 줄여나갈 수가 없었다.
몸 이곳저곳을 베여가면서도 끊임없이 연무를 계속하던 아야마리는 한 카라스 텐구가 내지른 찌르기에 왼쪽 가슴을 꿰뚫린 다음에야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여기까지인가..."
카라스 텐구 하나가 목을 내려치기 위해 검을 치켜든채로 천천히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정말로...검을 잡을때 빼고는...재미없는 인생이였다"
번쩍 하고 한줄기 빛이 아야마리의 목을 지나갔다. 아야마리의 눈앞의 세계가 한바퀴 회전했다. 그 이후 모든 세계가 천천히 회색빛이 되어가다 어둠으로 한없이 빨려들어갔다.
"...텐마님..."
카라스 텐구가 누군가를 부르자 또 다른 카라스 텐구가 문 옆에서 슬그머니 나타났다.
"성공한것인가?"
"그렇습니다 텐마님. 이제 당신의 뜻대로..."
"좋지..."
텐마는 아야마리의 방의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다. 손에 들린 두쌍의 낫이 위태롭게 빛이 났다. 얼굴은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으며 가려진 천 틈 사이로 빛나는 붉은 두 눈동자는 불길하다 못해 기분나쁜 기운을 풍겨대고 있었다. 두 쌍의 낫의 날쪽에는 생(省)과 사(死) 각각 새겨져 있었다. 머리는 붉은 끈으로 질끈 동여매었고, 근육으로 다져진 두 팔에는 낫에 매달린 쇠사슬이 칭칭 메어져 쩔그럭대며 기분나쁜 소리를 내고 잇었다.
"카라스 텐구 수장으로서 첫번째 명령이다"
텐마는 주변에 정렬한 카라스 텐구에게 '영광스러운' 첫번째 명령을 내렸다.
"저 빌어먹을 시체좀 치워놔. 피도 닦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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