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레이센 우동게인 이나바는 달에서 태어났지만 어떠한 사정으로 인해 지구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상에 그 어떤 기반도 없던 그녀는 생활의 대부분을 야고코로 에이린에게 보장받고 있었다. 그것은 레이센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이었다. 레이센에게 에이린은 필수불가결한 존재란 소리다. 하지만 에이린에게 레이센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그래서 레이센은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자신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보통은 하기 귀칞은 잡일을 하면서.
그런 레이센에게 가장 듣기 두려운 말이 생겼다. 필요없다. 쓸모없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어렵지 않다. 자신이 쓸모 없어지면 자신은 버려지고 그 이후로는 암담해서, 너무 암담해서 보이지가 않는다.
아나타의 방을 나온 레이센은 아나타를 걱정하는 한편 스스로에게 매우 만족했다. 에이린에게 자신의 능력을, 즉 필요성을 알려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레이센은 잔뜩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에이린을 찾아갔다. 어쩌면 이제 더이상 잡일을 안해도 될지도 모른다!
레이센은 에이린을 찾아갔고 아나타와의 대화를 말해줬다.
그리고 에이린은 레이센을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정말 쓸모없는 토끼네."
"그렇…… 네? 뭐라고요?"
레이센은 덜도 말고 버림 받은 토끼의 표정을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겁에 질리고, 걱정에 사로잡히고, 또 의문에 짓눌린 달토끼는 제발 자신이 잘못 들었길 빌었다. 에이린의 두 눈동자를 보면 '이 쓸모없는 토끼를 어떻게 해부할까?'라고 고민하고 있는 듯 했다.
졸지에 장기 자랑을 하게 된 달토끼는 자신이 무엇을 실수했는지 알 수 없었다. 에이린은 레이센의 표정만 보고도 그녀의 속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레이센?"
"네!"
"내가 너한테 무엇을 부탁했지?"
"그건……."
기합이 잔뜩 들어간 레이센은 죽을 힘을 다해 머리를 쥐어싸맸다. 에이린이 부탁한 것은…….
"스승님께선…… 그러니까 아나타를 감시하라고 하셨어요……."
"그렇지?"
"예!"
"난 '감시'하라고 했지?"
"예!"
"쓸데없는 걸 물어보라는 소리는 안했지?"
"……예."
레이센은 그제서야 에이린이 왜 화가난 것인지 약간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에이린이 저렇게까지 자신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이유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겨우 그거 물어본 것만으로?
에이린은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숨.
"하아……. 레이센, 다시 말해줄게. 이번엔 제대로 알아들어주길 바라. 아나타를 감시해줘."
"예……."
레이센은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신감이 사라진 레이센의 어깨는 축 쳐졌다.
"어쨌든 아나타가 5초 정도 혼절했었다고? 다른 데 이상은 없고?"
"붕대가 땀으로 잔뜩 젖었던데요. 5초 만에."
"그래? 우선 가봐야겠구나. 레이센, 너는 우선…… 기다리고 있어. 나 혼자 갔다올게. 나머진 갔다와서 이야기하자."
* * *
아나타는 오른손잡이였지만 다행히─대부분 사람들이 그러하듯─ 왼손을 사용할 줄 알았다. 왼손으로 식사하는 건 극히 어색했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아나타는 그걸 깨닫고 어색하게 밥을 먹기 시작했지만 몇 숟가락 푸지도 못했을 때 방문이 열렸다. 야고코로 에이린이었다.
야고코로 에이린은 약사였지만 동시에 무척이나 유능한 의사였고, 광대한 지신을 가진 과학자였으며, 사실 의사나 과학자보단 마법사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녀의 의술은 거의 마법이나 다름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죽기 일보 직전인 아나타를 살려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에이린도 아나타가 스스로 치유를 늦추는 행동엔 트집을 잡을 수 밖에 없었다.
"계속 붕대를 풀면 곤란한데? 완치되기까지 오래 걸릴 수도 있고, 운이 나쁘면 어정쩡하게 회복될 수도 있어."
"에이, 겨우 붕대를 푸는 것 정도로요? 거기다 그래봐야 팔 하나 없어진 것보다 더 하겠어요?"
식사하기 직전 땀에 젖은 붕대를 헤쳐놓은 아나타는 에이린의 꾸중에 어깨를 으쓱거렸다. 에이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다음 아나타의 상체를 샅샅이 살펴보며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갑자기 정신을 놓았다고 했지…… 다행히 몸 상태는 악화되지는 않았네. 정신을 차렸을 때 기억이 돌아오거나 한 건?"
"머리가 지끈거리는 게 어떤 건지는 기억나네요."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했던 아나타는 대답하고 나서야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응? 레이센에게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했나요?"
"기억을 잃어버렸다고 거짓말 했다는 이야기?"
"……예."
"오히려 그게 거짓말이잖아."
에이린은 팔짱을 끼며 그렇게 말했다. 아나타가 놀란 표정을 짓자 에이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아마 레이센이 계속 귀찮게 캐물어서 그렇게 답했겠지."
"정확하군요. 그런데 레이센에게 거짓말했다는 걸 어떻게 눈치채셨죠?"
"잘."
에이린은 설명하기 귀찮다는 듯 짧게 말했다. 더이상 물어봐도 그녀에게서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없을 거라는 걸 짐작한 아나타는 잠깐 동안 생각했다.
"그렇다면 제가 사실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이야기 같은 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기억을 잃어버렸다면서 그렇게 말하는 게 의심스럽지 않으세요?"
"아아, 그거?"
에이린은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레이센도 그렇고 에이린도 그렇고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아나타는 그 점이 궁금했다. 어지간한 것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아나타라도 에이린과 레이센의 태도는 매우 신경쓰였다.
"몸이 기억하고 있을테지. 네가 언어나 몸을 움직이는 법을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아마 이 세계가 매우 어색하게 느껴진다면 스스로 그렇게 생각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어. 거기다가 다른 세계 왔다는 건…… 레이센만해도 달에서 사는 토끼였는데 대수로울 게 있겠니? 달의 도시도 다른 세계라면 다른 세계 이나니?"
"아…… 그러네요."
아나타는 그제서야 레이센이 달에서 사는 토끼고 자신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게 특이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에이린도 마찬가지겠지?
"그래서 여긴 어디죠?"
"환상향. 어느 요괴가 만든 잊혀져 환상이 되어버린 존재들의 도피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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