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따윈 살아가면서 딱히 필요하다 생각지 않았던 요괴. 그러나 오니를 만나는 것으로 '코우'라는 이름이 생겼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이름을 지어줄 줄은 꿈에도 상상해 보지 못 한 일.
"언제까지고 '야'나 '너'로 부를 순 없잖아. 그리고 이름이 있어야 인상에 남는다고. 그러니까, 후배. 이름을 소중히 생각해."
오니, 시소우 센라는 이름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그간 요괴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이름이 중요한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커다란 술병은 텅텅 비어버렸고, 만취한 요괴는 이미 한계인듯 제 몸 가누기 힘들어 보였다.
빈 술병을 노려보며 암벽 아래, 산 중턱에 위치한 텐구 마을로 내려가 한 두병 더 들고 올까 고민하던 센라는 결국, 고개를 저으며 그러지 않기로 했다. 아쉽긴 하지만, 오늘 밤은 이걸로 끝. 쓰러진 상대를 앞에 두고 혼자 마셔봐야 술맛이 좋을 리가 없지.
"그 동안 이름이 없었다는 건 피해 다니느라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했다는 거 아냐?"
입안에 남아있는 술의 잔향을 느끼며 입을 쩝 다신 센라는 요괴, 코우가 그간 이름 없이 지내온 내막에 대해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집단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약한 요괴라면 그럴 수밖에 없을 거다. 힘을 키울 기회조차 없이 인간에게, 다른 요괴들에게 쫓기다 보면 타인과의 관계는 요원한 법이고, 자연히 부모 없는 그가 이름이 없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다르지.
왜냐면 센라, 자신이 옆에 붙어 있기 때문에.
"그러다보니 이름만 없는 게 아니라 식견도 짧고 말이야."
도망만 치는 인생만 살아온 요괴가 경험해봤자 얼마나 많은 경험을 했겠는가. 그렇기에 후배의 짧은 식견 또한 당연하다. 높은 경계심과 저자세인 것 역시 마찬가지.
"네가 얼마나 살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나와 세상구경 하면서 많은 걸 배우게 될 거다. 뭐, 그때 가서는 네 자신이 얼마나 좁은 세상에서 살아 왔는지 깨달게 되겠지."
센라는 입을 쩝 다시며 목을 축일 것을 찾았지만, 주변에 보이는 것은 온통 빈 술병 뿐. 역시, 아래로 내려가서 몇 병 더 가져와야 했었나 하고 조금 후회는 되지만, 이제 와서 그러는 것도 귀찮은 그였다.
입 안이 마르니 더는 입을 열고 말하는 것이 싫어진 센라는 빈 술잔을 내려다보다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어느 사이엔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후배'가 보인다. 센라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쳐다보고는 자신도 잠을 청하기로 했다.
*
동이 트기전의 새벽. 짙은 안개 속에서 센라와 코우, 두 요괴는 이르지만 산을 떠나기로 하고 하산을 하는 중이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이지만, 센라는 익숙한 길처럼 발에 걸리는 것 없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을 내려간다. 그 뒤를 따르는 후배는 그렇지 못해서인지 지친 기색이었다.
"잠깐, 쉬다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코우는 빠르게 내려가는 선배의 발길을 멈춰 세웠다. 등 뒤로 고개만 돌린 센라가 한심하다는 어조로 답했다.
"이거야 원, 그렇게 비리비리해 가지고 여태 어떻게 살아온 거야?"
"제가 비리비리 하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어요. 헌데, 선배의 발이 너무 빠르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게 빠르다고? 내 딴에는 너 생각해 가며 천천히 움직인 건데."
"그 천천히 움직인 것도 저한테는 빠르다고 생각합니다."
"니미.. 알았어. 좀 쉬다가 가자!"
하는 수 없다는 얼굴로 센라는 코우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 자리에서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주변에 적당히 앉을 만한 돌을 찾아 그곳에 걸터앉은 코우는 호흡을 진정 시키고 나서 아무데나 엉덩이를 깔고 앉아 있는 센라에게 물었다.
"저기, 선배는 왜 하필 오늘 산을 내려가기로 한 겁니까?"
그에 센라는 눈을 가늘게 뜨며 답했다.
"안 그래도 근 시일에 떠날 참이었어."
"텐구들 술이 일품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거기에 얽매여 있다 보면 평생 눌러 앉게 되서 안 돼."
지금 떠나는 산에 사는 텐구들의 술은 어디 가서 쉽게 맛 볼 수 없는 일품인 것은 자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술만을 탐해서야 되겠는가.
"아무리 맛 좋은 술이라 해도 언젠가는 질리기 마련이거든. 뭐, 아직 질리진 않았다만."
"그렇다면 왜?"
"내 지론이지만, 술은 가장 맛 좋을 때에만 마셔야 하는 법이거든. 그래야 그 술을 떠올릴 때, 더 즐거우니까. 그게 내 주도(酒道)다."
아직 술에 대한 식견이 짧은 코우로서는 센라가 말하는 지론에 대해 완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젯밤에 마셨던 그 맛있는 술이 언젠가는 맛이 없어질 거라는 사실도 잘 와 닿지 않는다. 하지만, 전적으로 동의하는 부분도 있었다.
주도 같은 건 모르겠지만, 떠올릴 때 즐거울 기억으로 남겨 두는 것.
"좋은 기억으로 남았을 때, 떠난다는 거군요. 거기엔 저도 동의가 갑니다."
"그렇지? 자고로 인(人)이 되었든 요(妖)가 되었든 신(神)이 되었든, 머물 때와 떠날 때를 잘 구분해야 하는 법이야. 그건 어딜 가서든 똑같아."
"정말이지 명언입니다."
선배라는 오니는 생긴 건 오니 그 자체면서 내뱉는 언동은 혜안 깊은 중과도 같다고 느끼는 코우였다. 그 혜안 깊은 중을 직접 만나 본 적은 없지만, 아마 선배와 비슷하지 않을까.
땀이 다 식을 때 즈음, 하산이 재개되었다.
이번엔 후배의 걸음에 맞춰 센라의 발이 느려졌다. 그래도 코우 입장에서는 따라 붙는 것이 겨우지만, 숨이 턱 밑 까지 찰 정도로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어딘가.
*
그렇게 산을 다 내려오는데 반나절이나 더 걸렸다. 해는 중천 걸려 나뭇잎 사이로 뜨거운 햇살을 내리 쬔다. 비탈길이 끝나고 평지에 발을 들인 코우가 문득, 무언가 떠올리고는 앞서가는 센라의 등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선배. 정해진 행선지는 있는 겁니까?"
이제와 묻는 것도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그간 대화를 통해 선배라는 오니가 달리 계획이 있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하지만, 또 모르는 일이었다. 선배는 박식한 요괴이니까.
걸음을 멈추고, 센라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숙였다. 역시나 계획도 없이 움직인 것일까?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이라 해도 최소한 행선지 정도는 있는 법이니, 센라는 이마에 주름을 잡고 고민에 빠진 얼굴이었다.
하지만, 센라가 고민하는 건 단순히 행선지 때문이 아니었다.
행선지라...
전부터 정해 놓은 곳은 있지만, 지금은 혼자가 아니고, 이제부터 무언가 목표을 가지고 움직이는 편이 좋지 않을까?
무엇을 목표로 하는 게 좋을까..
.... 그게 좋겠군!
고민하던 얼굴이 명확한 해답을 떠올린 듯 상쾌하게 맑아진다.
뒤로 몸을 돌린 센라가 담담하게 말했다.
"행선지야 그때그때 정하면 그만이지. 그것 보다 목표를 하나 정하는 게 어때?"
"목표라 하신다면.. 즉?"
"너와 나, 우리 둘의 여행 목표 말이야. 그러는 편이 의미 있지 않으냐?"
"그렇긴 합니다만. 무엇을 목표로 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묻는 코우를 보며, 센라는 이를 드려내며 히죽 웃으며 이렇게 외쳤다.
"불기분방의 요괴를 만난다!"
큰 목소리에 수풀 속에 숨어있던 짐승들이 부리나케 도망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말을 이해 못해 의아해 하고 있는 코우에게 부연 설명을 하는 센라.
"오니들에게 아주 유명한 얘기가 있지. 이즈모에 모인 신들 조차 겁을 먹게 만든 대요괴, 대적할 자가 없어 불기분방. 산을 들고 달을 떨어뜨린다고 일컬어지는 최강의 오니가 존재한다고. 이름은 들어봤나? 슈텐도지라 하는데, 이 몸조차 아직 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그래서 그 녀석을 찾아서 만나 보는 것을 목표로 정하자는 거다."
"슈텐?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들어 보지 못 한 것 같기도 한데... 어째서 만나보려 하는 겁니까?"
"그거야, 최강이라 불리는 놈이 어떤 놈인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봐 두려고 그러는 거지. 꼭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하나?"
최강의 오니. 그것은 즉, 요괴들의 정점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 거물을 만나는 것에 이유가 달리 필요할까? 만난다는 것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절로 경외심을 가지는 센라와 달리, 코우는 걱정만이 앞섰다.
평생을 강한 요괴를 피해 살아온 그에게 있어 그런 강대한 요괴와 만난다는 것은 한마디로 자/살행위와 같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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