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괴 중에서도 가장 고도화된 사회를 이루는 무리인 텐구는 대개 높으면서도 골짜기가 깊은 산을 거처로 삼아 생활한다. 그 영역은 산봉우리 하나, 둘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넓게는 산맥 하나 통 채로 자신들만의 영역으로 삼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런 텐구들도 유일하게 소유하지 못하는 장소가 있는데, 바로 산의 정상. 산봉우리이다. 산봉우리는 예로부터 산신의 영역으로 신성시 되어왔고, 지금은 오니의 영역이었다.
달빛만이 은은히 밝히는 밤. 산 정상에 위치한 암벽 위에서 그 아래 붉게 물든 텐구들의 마을을 내려다보며 술잔을 기울이는 오니가 있다. 그 옆엔 마다 못해 어울리고 있는 미천한 요괴가 한 명. 생전 처음으로 내려다본 광경에 요괴는 묘한 감흥에 젖어 있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모르지만, 내려다 보이는 텐구들의 마을 풍경이 절로 「절경」이라고 칭할 정도로 아름다워, 어쩌면 자신은 이 풍경을 보기 위해 필사적으로 살아왔는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텐구 정도 되는 요괴는 저런 절경 속에서 살아가는 구나.
그것이 마냥 부러운 요괴는 저도 모르게 잔에 담긴 술을 단숨에 목 안으로 흘려 넘겼다.
"너 의외로 잘 마시네."
"저도 제가 이렇게 잘 마시는 지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 이렇게 느긋하게 마셔본 적도 없을 테니, 오늘 밤 실컷 마셔 놓으라고."
비워진 요괴의 술잔에 오니는 흥겨운 얼굴로 술을 채워 넣는다. 요괴는 흔쾌히 술잔을 받아들며 시선을 암벽 아래에 고정한 채 텐구들의 마을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어때? 평소엔 너같은 요괴를 천시하며 내려다 보던 오만한 놈들을 반대로 내려다 보는 감상이?"
오니가 묻자, 요괴는 피식 웃으며 솔직한 감상을 뱉어냈다.
"기분 죽이는데요."
따라주는 족족 마셔대더니, 만취해버린 요괴였다. 원래 체내의 피가 옅었기에 겉보기로는 멀쩡한 것인지 취했는지 쉬이 알기 힘든 그다. 게다가 취한 본인조차 자신이 취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니, 오니로서는 술에 강하다고 착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일.
술기운과 운치에 취해 자신이 대단한 놈이라도 되는 양 하염없이 텐구들을 내려다보던 요괴가 불현듯 오니에게 물었다.
"오니님. 그런데, 오니님은 왜 저 같은 미천한 요괴에게 관심을 가져 주는 겁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그.. 제가 텐구에게 죽임을 당하려 할 때, 구해 주셨잖습니까?"
"그건 까마귀 놈들이 거들먹거리는 게 거슬렸던 거뿐이야."
"아..아무튼 결과적으로 구해준 거 맞잖아요."
"어 그래."
"텐구를 쫒아내기 까지 하셨고... 그게 이해가 안 갑니다."
"그게 왜?"
"보통은 상관하지 않잖습니까. 오니님 같이 강한 요괴가 처음보는 약한 요괴에게 신경 써주는 거 말입니다."
그렇게 당돌하게 물으며 보내오는 시선에 오니는 잠시, 침음을 흘리며 턱을 쓸었다.
관심을 가진 이유? 특별한 이유 같은 게 있겠나.
그저 변덕일 뿐이다. 심심했던 것뿐이고.
허나, 그렇게 얘기해서야 요괴가 납득할 것 같지 않겠지. 뭐 좋은 말이 없을까? 짧게 고민하고는 콧방귀와 함께 입을 연다.
"그냥 술 상대가 필요할 때, 네가 보였을 뿐이야."
"술 상대라면 저 말고도.."
"아니, 텐구새끼들 하고는 되러 술맛이 떨어져서 안 돼."
오니는 요괴의 반문을 자르고 말했다.
"그놈들 지/랄에 주변엔 다른 요괴라곤 눈을 씻고 찾아 볼 수 없고 말야."
입을 삐죽 내민 오니의 눈은 짜증을 담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불만이었던 모양. 자신들이 정한 영역에서 다른 요괴가 발을 들이는 꼴을 절대 못 보는 텐구의 습성상 산은 텐구 아니면 야생 동물만이 득실거리는 꼴이다. 예외라면 불만을 내비치는 오니가 유일할까.
기분이 별로 안 좋아진 오니는 벌컥벌컥 한입에 큰 술잔을 비워내고는 크게 쓴 숨을 토해냈다.
"하여간, 맘에 안 드는 놈들이라니까. 만만한 놈들에게는 신이라도 되는 줄 거들먹거리면서 내 앞에서는 꼬리를 만 똥개인 주제에."
"..허어..."
오니의 말에 공감이 가는 한편 그런 텐구의 태도에도 이해가 가는 요괴였다. 거들먹거릴 수 있는 상대가 없으니 그렇지 당장 자신이 텐구여도 비슷하지 않을까? 반대로 오니같이 강대한 요괴라면 누구를 상대하던 같은 태도겠지.
빈 술잔을 채우는 오니를 보며 요괴는 한 가지 의아한 점을 묻는다.
"그렇다면 오니님은 왜 이곳에 머무는 겁니까? 오니님이라면 머물 장소 따윈 달리 많을 텐데."
"그 말대로 어디라도 엉덩이를 붙이면 내 집이긴 한데.."
도중 말을 끊고, 오니는 술로 채워진 잔에 비친 자신의 얼굴과 달빛을 응시하다 이어 말했다.
"저 놈들이 가진 술이 일품이라서 말이야."
그 말 한 마디에 요괴는 바로 이해가 갔다. 오니는 예외 없이 애주가라는 정설처럼 눈앞의 오니 역시 상당한 애주가 아닌가. 일품이라 평할 정도의 술을 쉬이 포기할 애주가가 있을 리 없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오니가 따라주는 술이 유독 잘 넘어가는 요괴다. 틀림없이 텐구가 가진 일품인 술.
술을 들이키며 그 맛의 여운을 느끼던 오니는 불현듯 잊고 있었다는 얼굴로 말했다.
"맞다. 아직 서로 이름을 모르는 군. 같이 술을 마시는 사이인데, 이름도 몰랐다니!"
손등으로 입가에 흘려 내리는 한 줄기 술을 닦아내며 오니는 자신을 소개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 세상, 삼라만상을 탐구하는 오니. 시소우 센라다! 네 이름은 뭐냐?"
"슬프게도 저는 이름이 없습니다. 좋을 대로 불러주세요."
이름 없는 요괴. 태어나고 지금까지 누군가와 관계를 가져본 적이 없으니, 이름 따윈 아무래도 좋았던 요괴였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로 무어라 불리던 상관이 없다. 하지만,
"그건 안 되지."
"안 된다니요?"
"나와 같이 술을 마신 사이인데, 이름으로 부르지 못 한다니. 그건 아니지!"
오니는 상관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럼, 이름도 없는 요괴를 뭐라 불러야 한단 말이지.
요괴를 보는 오니의 시선이 사뭇 뜨거워졌다. 그 강렬한 시선에 움츠려들던 요괴에게 던져지는 단어.
"코우!"
무슨 말인지 추측해 보기도 전에 설명이 이어졌다.
"내 후배라는 의미에서 코우다."
"제가 후배라고요?"
"그래. 앞으로 내가 네 인생의 선배니까."
오니가 선배고 요괴가 후배.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요괴는 모르지 않았다.
"오니님. 그 말은..."
"오니님이 아니야. 앞으로는 선배라고 불러!"
"아니, 선배님.."
"'님'자는 빼고."
"그럼, 선배. 그 말은 앞으로도.."
"그래 임마, 넌 이제부터 내가 돌볼 테니까, 그렇게 알라고!"
이제부터 좋든 싫든 오니와 같이 행동하게 된 요괴.
이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지금의 그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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