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리처드 호프스태터
역자 - 유강은
출판사 - 교유서가
쪽수 - 680쪽
가격 - 35,000원 (정가)
지적 황폐화에 대한 지적 도전
정치의 타락은 지성이 타락한 결과다!
'트럼프 현상'을 이해하는 핵심 개념인 미국의 반지성주의
미국의 반지성주의는 오늘의 한국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 1964년 퓰리처상 넌픽션 부문 수상작
- 미국의 지적 전통이란 무엇인가, 지식인은 민주주의 실현에 기여할 수 있는가?
- 정치, 종교, 기업, 교육, 문학을 소재로 한 400년의 미국 지성사
- 미국인의 정신문화와 가치관을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
- 이 책은 미국의 지성이 건재함을 역설적으로 시사한다
"정치의 타락은 지성이 타락한 결과다. 미국의 반지성주의 역사는 오늘의 세계 문명을
성찰하게 해주는 휼륭한 교과서다."
- 김동춘 /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현대 지성사의 고전인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미국의 반지성주의]가 원서 출간 후 반세기 만에 국내 초역되었다. 1964년도 퓰리처상 넌픽션 부문 수상작이다. 이 감동적인 넌픽션에서 호프스태터는 미국의 반지식인 전통의 저류에는 복음주의 신앙에 입각한 민중의 반권위주의적 심성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핵심에는 지식을 독점하는 엘리트에 대한 뿌리깊은 반감이 자리잡고 있음을 지적한다. 1952년,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는 '지성'과 '속물'이 대립하는 구도였다. 결국 아이젠하워가 압승했고, 이로써 미국 사회가 지식인을 거부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런 분위기는 미국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어, '반지성적'이라는 말은 미국인들이 자기평가에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형용어가 되었다.
저명한 역사가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이런 정치적·지적 상황에 촉발되어 '반지성주의'라는 개념을 축으로 미국사를 되짚는다. 청교도주의와 건국의 정신을 재검토하고 18세기 중반 식민지 아메리카에 확산된 신앙부흥운동에서 20세기 후반의 빌리 그레이엄에 이르는 계보, '전문가'의 등용을 둘러싼 지식인과 정치의 갈등, 경제계에 스며든 실용주의, 존 듀이의 교육사상, 마크 트웨인이나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문학 등을 자세히 살핀다. 저자는 이 책에서 미국의 이런 정신 풍토를 비판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인이란 무엇이고 지식인은 민주주의의 실현에 기여할 힘이 될 수 있는지 묻는다.
미국의 지적 전통이란 무엇인가? 이 책은 미국의 역사를 '반지성주의'라는 개념으로 분석한 현대 지성사의 고전이다. 미국의 건국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정치, 종교, 경제, 교육, 문학 등을 소재로 삼는다. 이 책의 목표는 미국인의 삶에서 지성에 대한 멸시를 묘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사회에서 하나의 세력인 지성이란 과연 무엇이며 무엇일 수 있는가에 관해 발언하는 것이다. "내가 '반지성적'이라고 일컫는 태도나 사고에 공통되는 감정은 정신적 삶과 그것을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의심이며, 또한 그러한 삶의 가치를 언제나 얕보려는 경향이다."
반지성주의란?
이 책에 등장하는 'Anti-intellectualism'이라는 말은 '반지성주의(反知性主義)' 혹은 '반주지주의(反主知主義)'로 번역되는데, 지성 일반(intellect)에 대한 회의, 또는 엘리트로서의 지식인(인텔리, intellectuals)에 대한 일반 대중의 적대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적 권위나 엘리트주의에 대해 회의적 입장을 취하는 주의나 사상을 가리킨다. '반지성주의'라는 말은 본서 [미국의 반지성주의]에서의 관련 논의를 계기로 일반적으로 통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저자는 미국에서 반지성주의적 현상은 이미 식민지시대부터 나타났고 1950년대에 두드러졌다고 본다. 대개는 "데이터나 증거보다 육감이나 원시적인 감정을 기준으로 사안을 판단하는 태도나 그런 사람"을 가리키는 반지성주의는 실제로는 좀더 다의적인 관점을 내포한다. 또한 저자는 이 말이 반드시 부정적인 뉘앙스만 가지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지적 권위나 엘리트의 문제를 생각하는 경우에는 반지성주의적 관점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지성과 권력이 결합되는 것에 대한 반발이 반지성주의의 원동력이며, 반지성주의가 부정하는 것은 '지성' 자체가 아니라 '지성주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반지성주의는 '반-지성'의 사상이 아니라 '반-지성주의'의 사상인 것이다. 반지성주의의 출발은 신 앞의 평등이라는 종교적 확신에 근거하여 지상의 권위에 이의를 제기하는 정신이다. 종래의 지성을 거부하고 새로운 지성을 낳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런 힘은 사회의 쇄신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매카시즘과 1952년 대통령 선거가 논의의 출발선
저자에게 1950년대의 매카시즘 광풍은 참담한 경험이면서도 그 역사적 연원을 추적하고 이론적으로 해명해야 하는 지적 도전의 소재였다. 이 책 초반부에서 보이는 것처럼, 계란머리 지식인 애들라이 스티븐슨과 2차대전의 전장을 누빈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대결한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서 대중은 스티븐슨에게 조롱과 야유를 퍼부었다. 호프스태터는 같은 시기에 벌어진 매카시즘과 이 선거의 밑바탕에 흐르는 대중의 정서를 반지성주의라는 개념으로 포착했다. 반공산주의를 표방한 매카시즘은 반지성주의에 가까운 운동이었다. 미국식 평등주의를 기반으로 한 잭슨 민주주의 이래 대중은 어쨌든 주체로 인정을 받았는데, 이제 권력과 대중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반면에 권력과 지식인은 가까워졌고, 대중의 눈에 둘은 동일시되었다. 한편 2차대전 이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전문가로서의 지식인과 대조되는 이데올로그로서의 지식인은 체제를 전복하려는 위협 세력으로 느껴졌다. 호프스태터가 보기에, 매카시즘은 이 두 부류의 지식인에 대한 원한과 분노가 폭발한 운동이었다.
1960년대의 지식인과 권력의 관계
이 책이 출간된 때는 1960년대에 케네디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지식인과 권력의 관계가 다시 화두가 된 시점이다. 저자가 보기에, 미국은 건국 초기에 지식인과 보통사람의 거리가 멀지 않았고, 지식인과 권력도 독특하게 결합되었다. 무엇보다 초기 청교도 목사들은 지성주의자였다. 하버드와 예일, 프린스턴 등 뉴잉글랜드에 처음 세워진 대학들은 원래 청교도 목사를 양성하기 위한 기관이었다. 청교도 성직자들과 건국의 아버지들은 지성을 발휘해서 사회와 국가의 기풍을 만들어낸 최초이자 최후의 지식인 집단이었다. 청교도 목사들은 일상적으로 대중과 접촉하면서 지적 자극을 주었고, 토머스 제퍼슨이나 제임스 매디슨 같은 건국의 아버지들에게 국가 행정과 철학적 논쟁은 분리된 게 아니었다. 미국의 독특한 철학인 실용주의는 지성과 실용의 결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18세기 미국의 세속화 물결
18세기에 들어 미국에서는 세속화의 물결이 번져나갔다. 아메리카로 밀려드는 유럽의 근대에 대한 반발이 복음주의의 신앙부흥운동이었다. 서부의 거친 황야에서 고되고 외로운 개척 생활에 지친 농민들은 열광적인 대각성운동에서 위안을 얻었다. 사실 부흥운동은 학식 있는 종교 지도자만이 아니라 지식인 일반에 대한 반발이었다. "복음주의자들이 마음의 지혜나 하느님과의 직접 교섭을 중시하고 학문으로서의 종교나 형식적으로 제도화된 성직자 집단을 거부한 것처럼, 평등주의 정치를 주창하는 이들도 보통사람의 타고난 현실적 감각과 진리와의 직접 대면을 중시하고 훈련된 지도자들을 배제시키자고 제안했다. 보통사람의 지혜를 중시하는 이런 경향은 민주주의적 신조를 과격하게 선언하는 가운데 서민들에 의한 일종의 호전적인 반지성주의로서 꽃을 피웠던 것이다." 이런 복음주의적 반지성주의는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진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1925년의 스코프스 재판 등 과학과 복음주의가 떠들썩하게 맞붙은 대결이 몇 차례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과학의 승리였지만, 반지성주의는 저류처럼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반지성주의와 극우 보수주의 정치의 결합
2차대전 이후에 반지성주의가 반공산주의의 모습으로 드러났다면, 오늘날에는 반지성주의가 극우 보수주의 정치와 단단하게 결합되어 나타난다. 최근에도 미국의 유권자 대중은 반지성주의에 열광하면서 부시와 트럼프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트럼프는 이 책에서 호프스태터가 미국의 반지성주의의 특징으로 꼽는 원시주의, 지성에 대한 경멸, 성공 일변도의 사업가 정신을 체현한 인물이다. 남부의 백인 하층 노동자들과 중서부의 농민들만이 아니라 자신은 엘리트와 거리가 멀다고 여기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트럼프를 지지했다. 1960년대 민주주의와 경제가 번성할 때 지식인과 잠시 좋은 관계를 이루었던 대중은 신자유주의가 득세한 결과로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다시 분노의 화살을 지식인에게 돌리고 있는 것이다. "반지성주의는 이 나라의 민주적 제도나 평등주의적 정서에 바탕을 둔다. 그러나 지식인 계급은 엘리트로서의 특권을 많이 누리든 어떻든 간에, 생각하고 기능하는 방식에서 엘리트일 수밖에 없다. 1890년 무렵까지 미국의 지식인 대다수는 유한 귀족 계급 출신이었다....... 다만 1890년 이후에는 정체성 문제가 지식인들을 또다시 괴롭히게 되었다. 그들의 감수성이나 관심이 일반 대중으로부터 어느 때보다도 떨어져 있던 바로 그 시기에 그들은 특수 이익에 반대하는 민중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정치적 대의를 지지하려고 특히 노력했기 때문이다."
평등주의와 엘리트주의의 이분법
호프스태터는 또 미국 문화에서 평등주의와 엘리트주의의 이분법이 두드러지게 전개된 과정을 돌아보면서 대중과 엘리트의 분리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다. 지식인에 대해서는 지식인과 권력의 관계를 다시 성찰할 필요가 있음을 호소한다. 그러면서 권력의 도구로 전락한 기술자·전문가 집단과, 사회를 위해 지성을 활용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자신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소외를 자처하는 지식인 집단으로 갈라져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평등주의의 정념과 민주주의의 열정이 지식인 공격이라는 손쉬운 출구를 찾을 때 오히려 대중에게 불리한 결과를 자초했음을 상기시킨다.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복음주의 부흥운동을 이끈 인물들에서부터 존 듀이의 혁신주의 교육 철학의 모호한 양면성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서술, 미국의 독특한 교육 풍토와 '생활적응 운동'에 대한 비판, 나아가 미국 문학과 문화의 갖가지 흐름과 그에 대한 통렬한 비평 등도 오늘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목 차
추천사
서문을 대신하여
1부: 서론
1장 우리 시대의 반지성주의
2장 호평 받지 못하는 지성
2부: 마음의 종교
3장 복음주의의 정신
4장 복음주의와 부흥운동가
5장 근대성에 맞선 반란
3부: 민주주의 정치
6장 젠틀맨의 쇠퇴
7장 개혁가의 운명
8장 전문가의 부상
4부: 실용적인 문화
9장 기업과 지성
10장 자조와 영적 기술
11장 주제의 변주
5부: 민주주의 사회의 교육
12장 학교와 교사
13장 생활 적응의 길
14장 어린이와 세계
6부: 결론
15장 지식인: 소외와 체제순응
감사의 말
주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추 천 사
모든 사람이 지성적이 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성은 문명이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막아주는 제동장치가 될 수는 있다. 특히 정치의 타락은 반드시 지성이 타락한 결과이다. 1950년대 미국의 반지성주의가 결국 레이건 이후 지금까지 지속되는 미국의 금권정치와 '전쟁 중독'의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지구 패권국가인 미국의 반지성주의와 미국 정치의 타락은 국제사회를 고통과 혼돈에 빠뜨렸다는 점에서, 미국의 반지성주의의 역사는 오늘의 세계 문명을 성찰하게 해주는 휼륭한 교과서이다. 오늘의 미국과 세계, 그리고 한국을 알기 위해서는 미국 사회의 정신 풍토, 특히 미국이 경제적으로 가장 번영하던 시기에 왜 반지성주의가 판을 치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 김동춘 /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이 책은 미국의 반지성주의의 역사적 흐름과 그 이면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비판한다. 정치, 종교, 경제, 사회, 교육 등 다방면의 반지성주의의 속살을 읽으면서 지금 한국 사회가 직면한 반지성주의를 냉철하게 성찰해야 하는 역사적 당위를 일깨운다.
- 김경집 / 인문학자, 전 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
호프스태터가 펼쳐 보이는 매혹적인 역사는 계란머리(egghead)와 멍텅구리(fathead)가 노골적으로 드잡이하는 싸움이 아니다. 현실적 성공이라는 이상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정신이 어떤 삶을 영위하는지를 풍부하고도 변화무쌍하게 포착한 그림이다.
- 로버트 필(Robert Peel) /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
존 듀이에서 빌리 선데이까지, 데이비 크로켓에서 헨리 애덤스까지, 조너선 에드워즈에서 우드로 윌슨까지 여러 인물들을 다루는 믿음직한 서술을 따라 역사를 훑어보는 그랜드투어는 아찔한 경험이다. 호프스태터는 분명 반지성주의를 미국이라는 에덴 동산을 타락시킨 뱀으로 보지 않는다. 그가 보여주는 것처럼, 오히려 반지성주의는 애초부터 미국의 국민 문화에 깊이 박혀 있었다.
- 니컬러스 레먼(Nicholas Lemann) / 컬럼비아 대학 퓰리처-무어 언론학 특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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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서 반지성주의를 대안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던데, 이는 해당 개념을 오해함에 따라 나타나는 위험한 인식입니다. 반지성주의는 사실 엘리트주의의 또다른 이름입니다. 반지성주의의 선동 주체는 대개 일반 민중이 아니며, 그 의도 역시 대의나 정의에서 비롯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지성주의는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의 권력찬탈, 기득권 수호, 사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선동이란 무기를 이용해 대중을 휘두르는 방식입니다. 따라서 반지성주의의 주체는 아이러니하게도 나름 특정 권력이나 지식을 기반하고 있는 계층인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반지성주의자인 나치의 히틀러, 매카시즘을 만든 매카시, 그 외에 트럼프나 르펜 같은 사람은 대중영합주의를 내세우지만, 실질적으로 일반 대중에는 속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반지성주의를 내세울 당시에는 이미 어느 정당에 특정 권력을 차지한 엘리트나 기득권에 가까운 인물이지, 우리와 같은 일반 대중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들의 집권전략이나 권력수호 전략에 대중을 이용할 뿐인 거지요. 대중이란 다수의 힘을 얻기 위해 단순하고 공격적인 선동전략을 이용하고, 결집을 유도하고 구심점을 만들기 위해 외부의 적을 산정하는 경우가 많슥니다. 반지성주의에 휩쓸리기 쉬운 대중은 복잡한 구조 문제를 어려운 단어를 써가며 해설해주는 사람보다 설령 그것이 오답이더라도 문제를 단순화 시켜서 속시원하게 해결해주는 사람을 선호합니다. 현재 홍준표가 모든 복잡한 문제를 단순히 강성노조탓으로 돌리는 데도 지지율이 떨어지기는커녕 오르는 이유기도 하지요. 반지성주의가 만연한 사회가 되면 홍준표의 지지율이 크게 올랐을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는 현재 그 단계까지는 아니 생각하는 시민들이 많아서 다행입니다. 반지성주의 전략은 지금 당장의 이익과 승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설령 그 주장이 시간이 지나면 잘못된 주장으로 밝혀지거나, 오류나 거짓말이 들통난다고 하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당장 이익을 얻는다면 어떤 선동도 불사하기 때문에 반지성주의의 특징은 무시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지성) 당연한 이야기지만, 반지성주의를 이용해 대중 선동을 등에 업고 승리한 지도자들은 절대로 대중을 위한 정치를 하지는 않습니다. 애초에 목적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권력욕이나 사익추구에서 나오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매카시즘이나 나치와 같은 반지성주의의 산물들은 그에 동참하지 않은 시민은 물론이며 이를 따르던 대중까지도 피해와 고통을 받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반지성주의는 목적이나 촉발지점에서부터시민의 권력투쟁인 민중혁명과는 전혀 다르며, 일부 엘리트를 적으로 산정한다지만 결국 최종 성과를 소수만이 독차지한다는 점에서 엘리트주의의 다른 이름이고, 오히려 엘리트주의보다 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도 높습니다. 위의 저자는 반지성주의를 촉발하게 만드는 권력의 추종자로서의 엘리트를 비판하고, 역으로 복잡한 문제를 대중을 위해 보다 쉽게 해설해주고 대안을 제시해주는 역할을 할 일부 바른 지성인들이 스스로를 격리시켜 자신만의 언어와 세계로 천착하는 문제를 지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권력 엘리트주의와 소엘리트주의 양측을 모두 비판하고 보다 대중과 가까운 행동하는 지식인의 필요성을 촉구하는 거 같아요. 대중 역시 사회 문제를 복잡하고 골치아프다는 이유로 무관심하거나, 혹은 이부분을 이용하여 단순 호쾌한 선동을 일삼는 반지성주의에 넘어가지 않는 주체적,주권적 시민이 되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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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현상이니 어느 한 부류만 노력한다고 바뀌지는 않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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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저서는 고전입니다. 매카시즘 광풍이 불던 때에 나타나 반지성주의 최초의 개념을 일깨운 저서지요. 1964년 퓰리처상 수상작입니다. 지금은 반지성주의의 연구도 상당히 다양화되고 현대 사회에 적용되도록 진행되고 있을 겁니다. 이 책의 가치는 고전이나 원류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보니 일정한 한계나 현재 시점과 미스매치 느낌이 드는 것은 감안해야 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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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비론은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으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무책임을 의미하지요. 이 책은 반지성주의와 엘리트주의의 특성을 통찰하고, 그에 따른 문제를 지적하면서 나름의 해결법을 찾는 점에서 무사유나 무책임에서 비롯된 양비론과는 거리가 멀어보입니다. 사실 복잡한 사회구조의 문제는 어느 한 집단만 바뀌고 노력한다고 해결되기 어렵지요. 따라서 각 집단에 대한 변화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론 도출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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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 호쾌한 선동은 힘이 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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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ghtlas
복잡한 현상이니 어느 한 부류만 노력한다고 바뀌지는 않겠죠 | 17.04.29 12:10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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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ghtlas
양비론은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으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무책임을 의미하지요. 이 책은 반지성주의와 엘리트주의의 특성을 통찰하고, 그에 따른 문제를 지적하면서 나름의 해결법을 찾는 점에서 무사유나 무책임에서 비롯된 양비론과는 거리가 멀어보입니다. 사실 복잡한 사회구조의 문제는 어느 한 집단만 바뀌고 노력한다고 해결되기 어렵지요. 따라서 각 집단에 대한 변화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론 도출이라고 생각합니다. | 17.04.29 14:07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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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두 분 다 정론이긴 한데, 제가 보기에는 저기서 더 다뤄야 할 부분이 있는 듯 해서 입니다. 지식인 - 지식인의 영향을 받는 대중 - 반지성주의의 대중 이렇게 말입니다. 문제는 그 지식인과 별개로 지성을 따르는 듯 한 포지션이긴 해도 정작 행태는 지성적이지 않은 대중이라는 포지션이 존재하긴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저 저서의 요약에서 나온 상황 이해가 이분법적으로 보이기에 이런 것이죠. 실상을 들여다보면 지식인들 내에서도 반성이 있는 부류가 있고, 지식인을 따르는 대중에서도 PC 무리들이 있으며 지식인을 따르는 대중에서도 반 PC 성향을 띄어 오히려 반지성적이라고 비판받는 부류에... 그런 문제들이 이 책에서 서두에 지적한 서유럽의 파시즘으로 회귀, 미국의 트럼프현상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저 목차와 요약 내용을 보면 그런 현상까지 파헤쳐서 분석한 것 같지 않네요. | 17.04.29 14:16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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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ghtlas
이 저서는 고전입니다. 매카시즘 광풍이 불던 때에 나타나 반지성주의 최초의 개념을 일깨운 저서지요. 1964년 퓰리처상 수상작입니다. 지금은 반지성주의의 연구도 상당히 다양화되고 현대 사회에 적용되도록 진행되고 있을 겁니다. 이 책의 가치는 고전이나 원류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보니 일정한 한계나 현재 시점과 미스매치 느낌이 드는 것은 감안해야 할 것 같아요. | 17.04.29 14:39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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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조언 감사합니다. | 17.04.29 14:39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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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서 반지성주의를 대안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던데, 이는 해당 개념을 오해함에 따라 나타나는 위험한 인식입니다. 반지성주의는 사실 엘리트주의의 또다른 이름입니다. 반지성주의의 선동 주체는 대개 일반 민중이 아니며, 그 의도 역시 대의나 정의에서 비롯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지성주의는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의 권력찬탈, 기득권 수호, 사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선동이란 무기를 이용해 대중을 휘두르는 방식입니다. 따라서 반지성주의의 주체는 아이러니하게도 나름 특정 권력이나 지식을 기반하고 있는 계층인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반지성주의자인 나치의 히틀러, 매카시즘을 만든 매카시, 그 외에 트럼프나 르펜 같은 사람은 대중영합주의를 내세우지만, 실질적으로 일반 대중에는 속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반지성주의를 내세울 당시에는 이미 어느 정당에 특정 권력을 차지한 엘리트나 기득권에 가까운 인물이지, 우리와 같은 일반 대중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들의 집권전략이나 권력수호 전략에 대중을 이용할 뿐인 거지요. 대중이란 다수의 힘을 얻기 위해 단순하고 공격적인 선동전략을 이용하고, 결집을 유도하고 구심점을 만들기 위해 외부의 적을 산정하는 경우가 많슥니다. 반지성주의에 휩쓸리기 쉬운 대중은 복잡한 구조 문제를 어려운 단어를 써가며 해설해주는 사람보다 설령 그것이 오답이더라도 문제를 단순화 시켜서 속시원하게 해결해주는 사람을 선호합니다. 현재 홍준표가 모든 복잡한 문제를 단순히 강성노조탓으로 돌리는 데도 지지율이 떨어지기는커녕 오르는 이유기도 하지요. 반지성주의가 만연한 사회가 되면 홍준표의 지지율이 크게 올랐을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는 현재 그 단계까지는 아니 생각하는 시민들이 많아서 다행입니다. 반지성주의 전략은 지금 당장의 이익과 승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설령 그 주장이 시간이 지나면 잘못된 주장으로 밝혀지거나, 오류나 거짓말이 들통난다고 하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당장 이익을 얻는다면 어떤 선동도 불사하기 때문에 반지성주의의 특징은 무시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지성) 당연한 이야기지만, 반지성주의를 이용해 대중 선동을 등에 업고 승리한 지도자들은 절대로 대중을 위한 정치를 하지는 않습니다. 애초에 목적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권력욕이나 사익추구에서 나오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매카시즘이나 나치와 같은 반지성주의의 산물들은 그에 동참하지 않은 시민은 물론이며 이를 따르던 대중까지도 피해와 고통을 받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반지성주의는 목적이나 촉발지점에서부터시민의 권력투쟁인 민중혁명과는 전혀 다르며, 일부 엘리트를 적으로 산정한다지만 결국 최종 성과를 소수만이 독차지한다는 점에서 엘리트주의의 다른 이름이고, 오히려 엘리트주의보다 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도 높습니다. 위의 저자는 반지성주의를 촉발하게 만드는 권력의 추종자로서의 엘리트를 비판하고, 역으로 복잡한 문제를 대중을 위해 보다 쉽게 해설해주고 대안을 제시해주는 역할을 할 일부 바른 지성인들이 스스로를 격리시켜 자신만의 언어와 세계로 천착하는 문제를 지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권력 엘리트주의와 소엘리트주의 양측을 모두 비판하고 보다 대중과 가까운 행동하는 지식인의 필요성을 촉구하는 거 같아요. 대중 역시 사회 문제를 복잡하고 골치아프다는 이유로 무관심하거나, 혹은 이부분을 이용하여 단순 호쾌한 선동을 일삼는 반지성주의에 넘어가지 않는 주체적,주권적 시민이 되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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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 호쾌한 선동은 힘이 셉니다. | 17.04.29 15:37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