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새로운 타입의 범죄자가 나타났다. 그 외에도 다른 무슨 짓을 저질렀을지 모르고, 앞으로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를 놈이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했다. 특히(중략) 젊은 여자들과 그 부모들에게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대처할 방법이 없는 공포였다. 아무리 두렵다고 외쳐도, 경찰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고 격분해도, 사회의 규범이 흐트러지니까 그런 범죄가 일어나는 거라고 한탄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남의 집에 난 불도 아닌데 자신의 손으로는 아무 대처도 할 수 없는 그런 사건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럴 때 적당히 빠져나갈 샛길을 만들어낸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철저히 구경꾼으로서 호기심을 불태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사건의 바깥에 두고, 그 사건에서 철저히 멀어지는 것이다. 또는 형사나 탐정이 된 기분으로 사건을 추리하면서 범인을 추적해본다. 또는 희생당한 여자를 폄하하면서, 그런 무서운 사건에 휘말려든 것은 피해자들 쪽에도 어떤 문제가 있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자신에게는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꽤 합리적인 논리를 만들어냈다.
그보다 더 단순한 '망각'이라는 방법도 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일들은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는 것이다.]
-2권 초반부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접하면서 한 가지 느낀 점이 있었다. 피해를 입은 여성들과 비슷한 연령대의 딸이나 손녀를 두고 있는 사람들은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때 거의 예외 없이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한 표정을 짓는다는 것이었다. 지금 유미코의 어머니 같은 저런 표정.
그것은 아마도 정말 안됐다는 생각과, 우리집 딸이나 손녀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같은 농도, 같은 온도로 섞인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그 혼합물 속에는, 이런 범죄자에게 살해당한 여자 쪽에도 어떤 문제가 있지 않을까, 그러니 우리 딸은, 여동생은, 손녀는 괜찮을 거야, 하는 생각이 한두 방울 첨가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속마음을 밖으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저런 표정을 짓게 되는 것이 아닐까.
자신이 피해자가 되었을 수도 있었고 또는 앞으로 될지도 모를, 피해자들과 동년배의 여자들은 심한 불안과 슬픔과 분노를 드러냈지만, 때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밝은 표정으로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겁도 없이 낯선 남자를 따라가니까 저렇게 되는 거야, 하고 희생자들을 매도함으로써 안도하는 경향이 있다. 유미코는 그런 심정을 알 것도 같았다. 다들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남자들은 묘하게 객관적인 태도를 보인다. 동정하거나 화를 내거나 기분 나빠하는 표정이 아니다. 물론 커다란 관심을 보이기는 하지만, 그 관심이 절실한 감정을 동반하는 경우는 피해자들과 같은 또래의 딸을 두고 있는 아버지들뿐이다.
유미코는 생각해보았다. 지극히 기본적이고 소박한 의문이었다. 왜 남자는 여자를 죽일까. 얼굴도 모르는 여자를.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여자를. 여자이기 떄문에 언젠가는 죽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2권 중반부
(강조는 제가 한 것입니다)
참....역시 사회파 미스터리의 대가 미야베 미유키 여사다운 대단한 통찰이네요;;
뭐랄까...이해가 되면서도 너무 씁쓸해요. 정말 비열한 심리이지만 저라고 예외라는 장담을 할 수 없다는 점이....
특히 두번째 인용문은, 여자들이 여자이기에 피해자인 사건에서 그 일을 바라보는 남녀의 시각차를 너무 잘 대변해주고 있어서 소름이 끼칩니다; 예를 들면 잠재적 피해자or가해자 관련 논란으로 꽤 화제가 되었던 강남 화장실 살인사건이라든가, 그런 사건에서 여자들은 '남자들은 왜 저렇게 공감능력이 없어!'하고 매도하기도 하지요. 그야 자기가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없으면 절실하지가 않으니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3권에서 더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들 여자는 거의 항상 살해당하는 측에 있어."
다케가미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렇기 때문에 범죄나 사건을 바라볼 때 남자와는 다른 관점을 가지는지도 몰라.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일 거야. 이번에도 내가 아는 한 남자 피해자는 기무라 쇼지 한 사람뿐이잖아."
그럴 것이다. 운이 나빴다면 자신도 그 범인의 손에 걸려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전율하면서 뉴스를 바라보는 것과, 자신의 내면에 그런 폭력적인 부분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뉴스를 바라보는 것은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
이 대화는 부녀의 대화입니다. 책을 보신 분이라면 알겠지만 연쇄 여성 납치&감금&ㅁㅁ&살인&사체유기에다 피해자 유족에게 전화를 걸어 가지고 놀고,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범행을 자랑하기까지 하는(!)흉악범을 수사하는 형사 다케가미와 수사를 도와주기도 하고 조언도 해주는 그의 딸의 대화죠.
아버지는, 심지어 직업이 형사이면서도 자신이 남자이기에 깨닫지 못했던 사실을 딸의 한마디를 듣고서야 겨우 깨닫고 아차합니다. 남녀의 차이란, 아니 자신이 잠재적 당사자가 될 수 있느냐 아니냐에 따른 절실함의 차이란 그런 걸까요.
아무튼...과연 대단합니다, 미야베 여사. 이 작품 96~01년에 연재되어서 02년에 출간된 작품인데, 시대를 초월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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