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니 갤러리에 올렸던 글이 삭제되서 이 쪽으로 다시 올립니다.
- 분쟁요소가 있다는 걸 먼저 밝혀두는 바입니다. 제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 하겠다는 분들은 그저 한 꼰대의 헛소리로 치부하시면 됩니다.
올 해 7월, 국내에서 발행된 라이트노벨의 숫자가 60권을 기록했다. 정확히 4년전에 45권이 발행되었던 것에 비해 30%대비 늘어난
수치였다. 일본에서는 7월, 12개의 주요 브랜드 문고에서 총 101권이 발간되었고 통계에 집계되지 않은 다른 문고들의 발간부수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어마어마하게 늘어난다. 1997년, 한국에서 지금의 NT노벨의 전신인 판타지노벨이 대원에서 창간될 때 창간작은 단 2권 (<슬레이어즈>.<마술사 오펜>), 익스트림 노벨의 전신인 어드벤처 노벨이 학산문화사에서 창간될 때 단 1권(<철없는 이방인>) 이었던 것을 떠올리면 17년만에 무려 20배가 늘어난 것이다. 바야흐로 라이트노벨 전성시대다. 애니메이션의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긴 세월동안 끊임없이
많은 작품들을 선별해가며 발행해온 국내 출판사들의 노력이 바야흐로 결실을 맺은 것일까. 물론 그런 면도 있다. 동시에 일본에서도
라이트노벨의 지위는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해 지금은 매분기마다 나오는 애니메이션의 절반이 라이트노벨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내가 오늘 글을 쓰는 이유는 단순한 성찬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근래 나오는 라이트노벨의 제목이 지나치게 길어지고 문장형으로 변형되었다는 지적은 최근의 산물이 아니다. 근 몇 년간 지겹도록
반복된 해묵은 논쟁거리 중 하나다. 당장 이번 달에 발매되는 신간 목록만 살펴봐도 3음절 이상 이어지는 문장형 제목들이 판을 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옳은 지적이 아니다. 제목이 긴 라이트노벨은 이미 라이트노벨 초창기부터 존재해왔고 그 숫자는 결코 적지 않았다.
<부기팝은 웃지 않는다>.<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반쪽 달이 떠오르는 하늘> 등 이 바닥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 굵직굵직한 작품들이 상당한 길이의 제목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 알고 있다. 이 주제를 희석시키지 않고 제대로 수면 위에 띄우기 위해서는 단순히 길이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요는 모양이다.
과거와 현재의 라이트노벨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제목의 형식이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수많은 라이트노벨들이 소위 '문장형'
제목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 논란의 핵심이다. 문장형 제목들은 필연적으로 2~3음절 이상의 제목을 차용할 수밖에 없다.
이 현상을 비판하는 이들의 논리를 요약하자면 대략 이러하다. 라이트노벨들이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변하면서 자신을 광고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목까지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시장이 거대해지고 나오는 레이블의 숫자도 비정상적으로 급증하면서
소비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자극적이고 일차원적인 제목이 판을 치고 이것이 곧 질적 저하로 연결된다는 지적이다.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그리고 어느정도 핵심을 찌르는 이 지적은, 그러나 제대로 그 현상을 알기 위해서는 결국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대체 왜? 대체 왜 라이트노벨의 제목은 길어지기 시작했나.
2000년대 초반, 소위 (나 같은) 라이트노벨 1세대의 팬을 자처하는 자들이 황금기라고 부르는 시절이 있었다. 그 때는 아직 라이트노벨이라는 명칭이 대중적으로 쓰이지 않았다 (2004년부터 라이트노벨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이 명칭이 정착되었다). 라이트노벨과 애니메이션
사에 있어서 중요한 작품들의 태반이 이 시기에 탄생했다. 1998년, <부기팝> 시리즈가 시작되었다. 2000년에는 <키노의 여행>과
<트리니티 블러드>가 등장했다. 2001년, <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이 등장했다. 2002년, <작안의 샤나>와 <풀 메탈 패닉!>이 발간되었다. 그리고 2003년, <스즈미야 하루히>시리즈와 <반쪽 달이 떠오르는 하늘>이 탄생했다. 전격,후지미,카도가와, 패미통 문고가
주도하던 라이트노벨 시장에 후발주자들이 대거 탄생했다. 질적, 양적으로 급성장을 이루었으며 많은 작품들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고 2006년에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본격적으로 라이트노벨들이 애니메이션 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라이트노벨이 애니메이션 시장에 지분을 늘려간 것이다.
2008년을 기준으로 순수소년을 대상으로 한 라이트노벨의 문고에서 1년간 발매되는 책은 800권이 넘었다. 다른 모든 레이블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천 단위를 넘어갔다. 매 달 적어도 100권이 넘는 라이트노벨이 소비자에게 공급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참고로 2008년에
국내에서 발간된 라이트노벨의 월 평균 권수는 33권이었다. 그리고 이 수치에는 일본 라이트노벨만이 아닌 국내 레이블인 시드노벨도
포함되어 있다) 과잉공급의 기미가 나타났다. 경쟁은 치열해졌다. 그러나 이 때 혜성같이 등장한 작품이 있었다. 2008년 8월,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 (이하 내여귀) 라는 당시로서는 매우 충격적인 제목과 함께 등장한 이 책은 그 해 최고의 판매부수를 올리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문장형으로 된 제목에 배덕감마저 느끼게 하는 파격적인 제목과 왠지 모르게 미끈미끈한 느낌을
보여준 칸자키 히로의 일러스트는 무지막지한 시너지를 발산했고 이는 그대로 판매부수로 이어졌다.
<내여귀>는 여러모로 라이트노벨 역사에 중요한 작품 중 하나다. 일단 그 때까지 별다른 소재거리로 취급받지 못 했던 오타쿠라는
소재를 전격적으로 내세웠고 그 당시에는 오히려 드물기까지했던 평범한 일상물이었다. 문장형 제목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소위 '대놓고' 자신의 내용을 까발리면서 광고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방식의 제목은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고 또 제대로 적중했다.
말 그대로 새로운 트렌드를 시장에 제시했다.
이 센세이션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레이블이었다. 물론 당장 제목이 길어지거나 일상물이 범람하기 시작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2008년을 기점으로 안 그래도 많았던 라이트노벨 발행 권수는 점점 늘어났다. 2009년에는 주요 레이블의 권수가 900권을 넘겼고 2011년에는 결국 1000권을 넘어갔다. 물론 합계되지 않은 숫자를 합치면 그 수치는 배로 불어났다. 대표 레이블인 전격문고에서만 2011년 한 해에 무려 200권에 달하는 노벨을 내놓았다. 시장의 크기는 커져갔다. 모두가 좋은 현상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늘어나는 수치만큼 애니메이션으로 이어지는 작품의 숫자도 커져갔다. 등용문도 넓어졌다. 웹소설이라는 형식이 부각되면서 인기를 얻은 작품들이 그대로 라이트노벨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소드 아트 온라인> <마오유우 마왕용사> <엑셀 월드> 등등) 전문 소설가뿐만이 아닌 일반인들도 시장에 뛰어들었다.
여기까지 오면 라이트노벨의 시장이 엄청나게 커진 것을 보면서 우리는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부터 위에서 수없이
나열한 수치보다는 좀 더 주관적인 견해에서 이야기를 이어나갈려고 한다. 그리고 가장 궁극적인 질문을 던질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각자 개인이 판단해야 할 영역이다. 다시 맨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오겠다. 왜 라이트노벨의 제목이 길어졌나. 2011년, 출판사인 GA문고에서 주관하는 제3회 GA문고 대상에서 기대상을 수상한 <아테레코> (アテレコ.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성우더빙 정도의 어감이다) 가 출판을 앞두고 제목을 바꾸는 일이 일어났다. 출판사의 요구 때문이었다. 원어제목을 우리말로 대충 번역하자면 <햇병아리 성우가 내 여자친구였던 것 같습니다 - 팬티 속에 든 것은 중요합니다!> 이다. (声優のたまごが、俺の彼女だったようです。 ~ぱんつの中身は大事です!) 보기만 해도 조잡하게 느껴지는 이 제목에서 원 제목 '아테레코'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바뀐 이유는 밝히지 않았지만 누구나 그 이유를 대강이라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이 더 시장에서 잘 팔리기 때문이다. 드문 일이 아니었다. 출판사는 조금이라도 대중의 흥미를 더 끌 수 있는 제목을 요구했다.
소위 '코드'가 시장을 좌지우지 했다. <내여귀> 광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 수많은 여동생물들이 새싹처럼 자라났다. 오타쿠들을
히로인과 주인공에게 그대로 투영하기 시작했다. 선배들이 정립해놓은 코드와 법칙들을 무차별적으로 이용했다. 츤데레. 쿨데레
얀데레부터 시작해서 오토코노코라고 불리우는 '여장남자'는 이제 어느 작품을 집어들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일상과 학원에
이세계를 투영하는 일탈 형식의 작품들이 나왔다. 그 다음은 마왕용사물이었다.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모에요소들이 라이트노벨에
투영되었고 이는 그대로 애니메이션에 반영되었다. 너무 많았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질문에 대한 답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왜 제목이 그렇게 길어졌나. 왜 제목이 그렇게 변할 수 밖에 없었나. 간단하다.
제목이 생존전략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작품의 내용을 포괄하거나 함의하는 수단이 아닌, 제발 나를 봐달라고 고함을
치는 확성기의 역할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책을 펼쳐보기도 전에 내용을 먼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독자들은 제목만 보고서도
작품을 고를 수 있게 되었다. 그랬다. 너무 많은 책이 진열대에 있다보니 독자들은 도저히 무엇을 선택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역으로 책이 독자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취향에 맞는 작품만 선별할 수 있도록 제목부터 자신을 구별해버리기 시작했다.
역효과는 금방 나기 시작했다. 너무 비슷한 코드의 작품들이 범람하다보니 차별화를 위해 제목을 자극적으로, 좀 더 직접적으로
바꾼 것인데 모두가 똑같은 방법을 취해버렸기에 결과적으로 효과가 전무한, 얄궃은 아이러니가 연출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소위 '제목 사기'라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니다. 굳이 위화감이 드는 제목을 붙여넣고 시작부터
임팩트를 연출하면서 제목과 내용이 아무런 상관이 없어져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책의 내용과는 상관없는
제목이 내용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면서 생겨난다. 제목이 내용보다 훨씬 자극적이 되버리는 경우가 있다. <나는 친구가 적다>
라는 제목은 흥미를 유발하기에 충분하다. 그 흥미를 채워주기 위해서 작품은 더 자극적으로 진행된다. 스스로의 노림수를
제목에서부터 노출해버리면서 묘수의 폭을 줄여버리게 되니 남은 것은 자극이다. 여기서 편집부와 작가들은 제 멋대로의
잣대를 앞세워서 독자들의 수준을 가늠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좀 더 흥미를 끌지 자극적으로 보여줄 지 정해버린다.
그 결과 독자의 수준을 낮게 판단해버리는 작가의 작품은 오히려 작품 스스로의 가치를 퇴행시켜버린다.
남은 것은 악순환이다. 이미 독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린 (그렇다고 착각하는) 작가와 편집부는 비슷한 작품들을
쏟아낸다. 모두가 그렇게하니까 조금이라도 더 돋보이기 위해 제목부터 자극적으로 바꾼다. 일단 끌어들이기만 하면
반은 성공한거나 다름없다. 그들이 처음에 상정했던 기초수익에서 떨어지지 않으면 그들은 안심한다. 고정팬층을
확보한 창작자들은 더 이상 모험을 할 이유가 없다. 안정적인 팬층만 확보하면 그 다음부터는 물량공세가 시작된다. 비슷한
부류의 작품들을 쏟아내는 것이다. 작가들도 이에 편승하기 시작했다. 코드와 모에요소들만 잘 섞고 버무리기만하면 어느정도의
완성도와 인기를 끌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말초적인 자극에 익숙해진 독자들은 그 책을 집어든다. 끝나지 않는 시지포스의 신화다.
이런 경향은 애니메이션으로도 이어진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은 줄어든다. 고정적인 팬층이 형성된 원작 라이트노벨과 만화책은
왠만큼의 흥행을 끌 수 있으리라 믿는다. 대신 1쿨이어야만 한다. 2쿨로 했을 때 실패할 경우 그 부담은 버겁기 때문이다.
라이트노벨과 애니메이션의 공모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모든 일련의 쳇바퀴같은 과정에는 무엇이 있나? 자본이 있다.
자본의 논리대로라면 안정적인 이익창출은 미덕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옛날부터 모든 예술의 뒤에는 자본이 존재했었다.
단지 지금은 그 자본이 좀 더 쉽게 이익을 끌어들이는 방법을 터득한 것 뿐이다.
자. 이제 나는 궁극적인 질문을 던지겠다. 애시당초 이 글을 시작한 이유는 그 질문에서 비롯되었다. 시장은 더할 나위없이
안정되었다. 창작자도, 독자도 별다른 불만없이 이 영겁의 수레바퀴는 문제없이 돌아간다. 하지만 끝까지 나의 머리에서
맴도는 질문이 하나 있다. 과연 그래서 지금 나오는 라이트노벨들이 과거의, 좀 더 모험을 요구했던 시절의 책들보다 질적으로
월등한가 라는 점이다. 지금은 수많은 작품들이 진열대에 널려있고 애니메이션화도 손쉽게 이루어진다. 원하는 캐릭터와 스토리는
언제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다. 과연 그래서 지금 우리는 좀 더 '예술적으로' 풍요로운 환경에 놓여있는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너무나도 많은, 그러면서도 엇비슷한 작품들이 너무 많은 책들이 널려있는 현실이 역설적으로 공포스럽게도 느껴진다. 그 많은
사람들의 머리에서 나온 창작물들이 어찌 이렇게 비슷할 수가 있나!
더군다나, 그렇다고해서 요소에 대한 이해도가 풍부하기라도 한가. 츤데레가 왜 츤데레인가. 처음부터 츤츤대면서 얼굴을 붉히기만
하면 그것이 츤데레인가. 샤나가 과연 일반적인 츤데레라서 츤데레의 정의로 남아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나가토는 일반적인
쿨데레라서 쿨데레의 원형으로 자리잡았나. 나는 요즘들어 수많은 작품에서 등장하는 오토코노코라는 요소가 그렇게나 혐오스러울 수
없다. 단지 배덕적인 만족을 위해서 별다른 활용과 의미도 없이 등장시키면서 유사ㅅㅅ어필이나 일삼는 캐릭터들을 보고 있자면
내가 다 미안할 지경이다. 내 경험상 오토코노코란 요소를 제대로 활용한 작품은 근래 들어 <슈타인즈 게이트> 정도밖에 보질 못했다.
수많은 작품들이 요소를 너무나도 일차원적으로만 써먹는다. 그것이 왜 인기를 끌었는가에 대한 이해도는 바닥을 치면서.
이 문제의 근원은 결국 제목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안일함에서 비롯된다. 제목이 왜 중요한가. 그것은 단순히 한 작품을 소개하는
경구로 끝나는 역할이 아니다. 작품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중의적으로든, 반의적으로든 어떻게든간에 작품의 지향점을 포함하고
함축하는 역할이다. 제목은 또 하나의 예술이다! 그것은 대체불가능한 고유명사로 남아야한다. 작품을 하나의 고유명사로 독자에게
인식시켜야 제목의 역할을 완수하는 것이다. <작안의 샤나>가 다른 제목으로 쓰여진다는 것이 상상이나 가능한가? <사신의 발라드>
처럼 작품을 은유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할 수도 있다. <늑대와 향신료>가 정말 단지 작품 속에서 '늑대'와 '향신료'가 등장한다고
그런 제목으로 쓰인 걸로 알고 있나? 하지만 나는 <나는 친구가 적다>의 다른 버전의 제목을 얼마든지 생각해낼 수 있고 그 행위에
대해 별다른 거부감도 느끼지 못 한다. 그 제목은 이미 제목으로서의 의미를 잃었기 때문이다.
전반적인 환경은 좋아졌다. 출판사의 통제력도 전에 없이 강화되었다. 수요는 넘쳐나고 생산해 줄 창작자들도 널려있다. 다만
그 때문에 책들은 재미가 없어졌다. 지금의 라이트노벨들은 정말로 자기 자신들을 '라이트'하게 바꿔가고 있다. 시류를 명민하게
읽은 것 이외에는 어떠한 미학적 성취나 오락적인 쾌감을 주지 못하는 작품들이 지천에 널려있다. 물론 우리는 취향이라는 것에
따라 자기 입맛에 맞는 작품들을 선택해 볼 권리가 있다. 당신이 어떤 소설을 좋아하건간에 그건 내가 참견할 바가 아니고 오히려
존중해줘야 할 영역이다. 설사 문장형의 길다란 제목의 책을 사랑하더라도. 떠올려보면 우리는 너무 많은 모험을 한 작품들을
봐왔고 그것들이 항상 좋은 결말로만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도 기억한다. 하지만 구조적인 합리화와 동시에 모두의 입 맛을
만족시키려고 고민하는 동안 정작 정말로 우리가 열광했던, 예술로서, 동시에 오락으로서의 라이트노벨이 무엇인지를
망각하고 있던 것은 아닌지 자문해봐야 할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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