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루리웹 애니메이션 유저 칼럼 시리즈입니다. 일정기간 동안 루리웹 애니갤러리 상단 공지로 노출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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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우연찮게 보게 된 극장판 애니메이션 <목소리의 형태>는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었다. 본 글은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목소리’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작품의 주제의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제부터 구분을 쉽게 하기 위해 음운을 가리킬 때는 <>기호를, 음성을 가리킬 때는 ‘’기호를 사용하도록 하겠다.)
두 개념의 차이점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예시를 들어보자면, <가게>라는 단어에서 <가>의 <ㄱ>과 <게>의 <ㄱ>은 실제로는 다른 소리이지만 같은 <ㄱ>으로 인식된다. 앞의 <ㄱ>은 ‘k’(무성음, 성대의 진동 無), 뒤의 <ㄱ>은 ‘g’(유성음, 성대의 진동 有)이다. 한국에서는 유성음과 무성음의 구분이 없기에 이러한 차이가 우리에게 인식되지 않는 반면, k와 g의 구분이 뚜렷한 외국인들의 경우 이러한 차이를 인식한다. 그래서 외국인들이 <고기>를 ‘코기kogi’라고 발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들의 귀에는 <고기>가 ‘코기’로 들리는 것이다.
(반대로 한국어에서는 'p', 'ph'를 구분하지만(<발>/<팔>), 영어권에서는 구분하지 못한다. 즉 스파이의 'p'와 파이의 'ph'가 같은
로 인식되는 것이다. 출처 : https://slidesplayer.org/slide/14417935/)
즉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타인의 목소리(voice)를 듣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것은 목소리(‘k’,‘g’)가 아닌 언어(<ㄱ)>이다. 실제로 사람들의 발음은 전부 똑같지 않다. 어떤 한국인은 <고기>를 발음할 때 ‘코기kogi’보다 ‘고기gogi’에 더 가깝게 발음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수많은 ‘고기’ 혹은 ‘코기’를 전부 <고기>로 인식한다. 우리는 목소리의 세계가 아니라 언어의 세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목소리는 어떤 무정형의 덩어리이다. 음성과 음운의 관계는 무지개와 색상의 관계와 유사하다. 실제의 무지개 안에는 무한대에 가까운 색들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가지의 색으로 인지한다. 물론 감각이 뛰어난 소수의 몇몇은 더 많은 색(=음운)으로 분류를 하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것은 실제의 무지개(=목소리)는 아니다. 음운을 통해 음성으로 다가가려는 시도는 무한히 소급될 뿐이다.
재미도 없는 언어학을 설명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시 <목소리의 형태>로 돌아가자. 위의 언어학적 지식을 참고하면 이 애니메이션은 ‘언어’가 아니라 ‘목소리’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가닥이 잡히리라 생각된다. 한편 <목소리의 형태>의 정식 영어판 제목이 어째서 ‘A Silent Voice’라는 역설적인 제목인지도 알 수 있다. 목소리(Voice)는 들리지 않는다(Silent). 우리가 듣는 것은 오직 언어뿐이다.
“목소리의 형태'에는 사실상 세 종류의 언어가 등장한다. 종이에 적은 글씨로 소통하는 필담, 손짓이나 몸짓으로 의사전달을 하는 수어(수화), 그리고 음성을 사용하는 구어가 그것이다. 쇼코에게 구어는 친구들의 언어이고 수어는 자신의 언어다. 필담은 그 둘 사이에 놓여 있는 제3의 언어이고, 상대의 화법을 익히려는 노력 없이 가능한 임시적 소통방식이다. [] 위기가 다 지나간 후 둘은 다리 위에서 다시 만나 함께 무릎을 꿇은 채 절절하게 사과하며 소통한다. 그때 두 사람 모두 수어와 구어를 함께 쓴다. 상대의 언어와 자신의 언어를 동시에 사용해 온 몸으로 곡진하게 대화한다. 그 대화의 끝에서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맞잡는다.”([이동진의 어바웃 시네마] '목소리의 형태' 끝내 살아라, 고쳐 살아야 한다. 中)
이런 의미에서 보면 영화 평론가 이동진은 이 영화의 주제의식을 캐치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는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언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목소리’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에 목소리가 있는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잠정적인 결론을 말하자면, 목소리가 들을 수 없는 것일때 역설적으로 목소리는 그 들을 수 없음을 통해 자신을 전달한다.
쇼코는 쇼야에게 ‘스키(좋아해)’라고 말하지만 쇼야는 그것을 ‘츠키(달)’로 듣는다. 이 순간의 쇼코의 목소리(voice)는 쇼코 자신에게는 <스키>로 들리지만, 쇼코의 심정을 알 수 없는 쇼야에게는 <츠키>로 들린다. 하지만 이 둘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우리에게는 그것은 <스키>도 <츠키>도 아닌 그 사이의 어떤 것으로 들린다. 여기서 방점은 ‘둘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에 찍혀 있다. 우리가 만약 어느 한 쪽에 설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쇼코의 목소리를 <스키> 혹은 <츠키>로 듣게 될 뿐이다. 하지만 쇼코와 쇼야 양자를 동시에 바라보게 될 때, 그래서 쇼코의 <스키>가 쇼야에게 닿지 못한 채 미끄러지며 <츠키>가 되어버릴 때, 우리는 쇼코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 이 때 쇼코의 목소리(<스키>와 <츠키>의 사이에 있는 ‘스(츠)키’)는 들을 수 없는 것이면서 동시에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쇼코의 목소리는 감각을 아무리 동원해도 들을 수 없는 것이지만, 다른 입장에 서 있는 쇼코와 쇼야 양자가 빚어내는 강력한 시차(視差)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들을 수 있게 된다. ‘들을 수 없는 목소리(A Silent Voice)’란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고 해도 좋다.
사실 쇼코가 쇼야에게 구어로 ‘좋아해’라고 말하는 장면을 처음 봤을 때 나는 의아했었다. 왜 익숙한 수화나 필담 대신 익숙하지 않은 구어를 사용하는 것일까? ‘좋아해’라는 그토록 중요한 말이 오해될 위험을 무릅쓰고서 구어를 사용해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비단 이 장면뿐만이 아니라 쇼야가 난간에서 떨어져 입원하고 난 뒤에 재회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어째서 쇼코는 구어를 계속 사용하는 것일까?
여기서 ‘목소리-언어’라는 대립관계는 언어학의 영역을 넘어 인간의 세계 전체로 확장되어야 한다. ‘언어’란 우리 자신이 갇혀 있는 하나의 ‘세계’를 가리킨다고 봐도 좋다.(이 세계를 ‘폐쇄세계’라고 부르자) 하지만 이 ‘폐쇄세계’는 진정한 세계라고 말할 수는 없다. ‘폐쇄세계’란 단지 나의 관점에서 바라본 세계일 뿐이다. 이 폐쇄세계는 무한히 많다. ‘동양인의 세계’, ‘서양인의 세계’, ‘노동자의 세계’, ‘여성의 세계’, ‘아이의 세계’, ‘지식인의 세계’, ‘미치광이의 세계’, ‘백인중년남성의 세계’, ‘수학의 세계’, ‘철학의 세계’ 등등. 더 확장하자면 인간 개개인은 그 나름대로의 ‘폐쇄세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쇼코의 세계, 쇼야의 세계 등의 형태로 말이다.
‘폐쇄세계’와 대비되는 세계, 즉 ‘개방세계’란 어느 한쪽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기에 필연적으로 배타적이고 편협한 ‘폐쇄세계’를 넘어서있는 세계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만약에 모든 인간이 ‘개방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면 인간사에서 나타나는 모든 논쟁과 분쟁은 종식될 것이다. 노사간의 갈등도, 인종차별의 문제도, 오해로 인한 친구와의 싸움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논쟁과 분쟁은 결국 나의 세계를 공유하지 않는 배타적 존재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 폐쇄세계를 넘어서 있는 개방세계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자는 신의 위치로 인간을 올려놓고자 하는 자이거나, 반대로 신을 인간의 위치로 끌어내리고자 하는 인간이다. 어느 쪽이든 오만하기는 마찬가지다.
“앞에서 말했듯이 플라톤의 ‘대화’는 대화로서 쓰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흐친이 지적하듯이 기본적으로 자기 대화(monologue)인 것이다.”(가라타니 고진, 이신철 역, 『트랜스크리틱』, 도서출판 b, 2013. 107쪽
소크라테스의 대화법 혹은 산파술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배움이란 상기(anamnesis)하는 것이다. 즉 모르는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이끌어내면 된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바로 ‘폐쇄세계(언어)’의 사고방식이다. 하나의 폐쇄세계 내부에서는 분쟁이나 전쟁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화를 충분히 한다면 우리 모두 정답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대화는 마치 스도쿠를 하는 것과 같아서 최초에는 빈칸에 여러 답이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론적으로는 답이 하나인 것과 같다. 그래서 가라타니 고진의 말처럼 폐쇄세계(언어) 내부에서의 대화는 아무리 해도 근본적으로 ‘자기 대화’이다. 그것은 토론을 가장한 자기독백이다. 그것은 타인과 대화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혼자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분쟁은 어떤 하나의 폐쇄세계 내부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분쟁은 어떤 한 ‘폐쇄세계’와 다른 ‘폐쇄세계’ 사이에서만 일어난다.
‘폐쇄세계’를 언어의 은유로, ‘개방세계’를 목소리의 은유로 받아들인다면, ‘개방세계(쇼코의 목소리)’란 어떤 실체적인 시공간이 아니라 ‘폐쇄세계 A(쇼코의 언어)’와 ‘폐쇄세계 B(쇼야의 언어)’ 사이에서 섬광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세계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장소 없는 장소’이자 ‘들을 수 없는 목소리’이다.
(고립된 쇼야의 시계視界는 희뿌옇게 좁혀져 있다)
(검열로 인해 suicide로 표현하겠습니다.)
쇼야는 어릴 적 왕따를 당한 뒤부터 사람들의 얼굴에 X표를 붙인다(혹은 그렇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세계 안에 갇혀 있다. 그것도 매우 협소한 세계 안에. 쇼야는 이러한 폐쇄성에 질식당할 것 같은 기분으로 인해 suicide를 결심한다. 하지만 강가로 뛰어들려는 순간 다리 밑의 폭죽 소리가 그의 suicide을 막는다. 후에 그는 쇼코를 만나러 가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으려하고, 토모히로와 친해져 영화를 보러가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절대 다수의 얼굴에는 X표가 붙어있다. 이 단계에서 쇼야는 단지 자신의 ‘폐쇄세계(언어)’를 확장하고 있을 뿐 진정한 ‘개방세계’를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쇼코와 대화하기 위해 배운 수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비장애인이 수화를 배운다고 해서 결코 장애인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수화를 배우는 행위 자체가 자신을 미화하는 기만행위일 수 있다. 쇼코의 동생이 쇼야에게 역겹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청각장애인인 쇼코의 폐쇄세계는 수화를 배운다고 해서 이해되는 가벼운 성질의 것이 아니다. 쇼코의 폐쇄세계가 지닌 폐쇄성의 근본은 바로 자기 자신이 모든 불행의 원인이라고 보는 쇼코의 자기혐오이다. 그래서 쇼야가 강가에 뛰어들려던 찰나에 작은 폭죽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린 것과 달리 쇼코는 폭죽놀이가 한창인 때에 suicide를 시도하는 것이다. 쇼야에게 폭죽소리(타인)는 살아갈 원동력이 되지만 쇼코에게 폭죽소리(타인)는 바로 자신이 살아가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런 폭죽소리가 가장 강렬하게 느껴질 때, 타인들과 전례없이 가까워졌을 때, 쇼코는 자신의 목숨을 끊고자 결심한다. 그녀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행의 원인을 자기에게로 돌린다. 쇼야가 기껏 친해진 친구들과 멀어지는 것 역시 모두 자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수면 위에 이는 잔잔한 파면은 영화 내부에서 목소리의 형태를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이미지로 사용되고 있다)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기표(표현)는 기의(의미) 위에서 끝없이 미끄러진다”고 말했다. 인간은 타인 앞에서 끝없이 미끄러진다. 이 애니메이션을 지배하고 있는 이미지 중 하나는 떨어짐, 혹은 미끄러짐이다. 쇼코의 목소리는 <스키>와 <츠키> 사이에서 미끄러진다. 쇼야 역시 타인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려 하지만 미끄러진다. 하지만 그 미끄러짐 속에서 목소리는 불현 듯 나타난다. 한 세계와 다른 한 세계가 서로 맞물리지 못할 때, 그래서 인간이 절망하고 괴로워 할 때 우리는 비탄에 빠진 어린 양의 목소리를 듣는다. 몰락하는 것에서 에티카를 찾아주는 것, 타인의 목소리를 듣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역할이며 또한 예술의 역할이다.
이번에야말로 쇼야는 자신의 폐쇄적 세계를 깨부수고자 한다. 그는 쇼코의 손을 힘껏 붙잡지만 점점 힘은 빠지고 쇼코는 미끄러져 내려간다. 그의 힘만으로는 미끄러져 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쇼야는 절망한다. 하지만 그 순간 쇼코는 마음을 바꾼다. 쇼야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 것 만큼, 자신 역시 쇼야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그런 쇼야가 자신에게 살아달라고,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지만 다시 시작해보자고 말한다. 이동진 평론가의 글은 제목만큼은 적절하다. “끝내 살아라, 고쳐 살아야 한다.”
쇼야는 이제 깨닫는다. 세계란, 타인과의 더불어 살아감이란 폐쇄세계의 확장 혹은 이동이 아니다. 그런 것은 아무리 반복해도 여전히 단일한 폐쇄세계의 각편일 뿐이다. 오히려 개방세계란 내가 폐쇄세계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낄 때만 스쳐지나가듯 나타난다. 모든 인간이 결국에는 어느 정도 갇혀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야만 우리는 타인의 얼굴을 볼 수 있다. 혹은 타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목소리의 형태’는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서야만 볼 수 있다.
X표를 아무리 떼어내도 여전히 X표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어딘가에 분명 존재한다.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아무리 늘어나도 여전히 외국인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가라타니 고진이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비판한 것 역시 마찬가지의 이유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과 대화를 해도 그것은 '자기대화(monologue)'이다. 진정한 대화란 나와 언어(세계)가 다른 자와의 대화이다.
사라져야 하는 것이 있다면 ‘X표를 한 사람’이 아니라 ‘X표 그 자체’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서 X표가 일순간에 떼어져 나가는 것은 쇼야가 이제 세계의 목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것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나에게 있어 타인은 언제나 반가운 존재가 아니다. 때로 타인은 나의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치명적인 존재가 된다. 하지만 사하라의 말처럼 세계를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위험이 도사리는 세계 속으로 기꺼이 뛰어드는 것이다. 그 앞에서 아무리 발을 동동 굴려봤자 위험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직 타인을 나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 삼는 자들, 타인을 하나의 대상(노동력, 소비자, 판매자, 성적 대상, 심리적 노예 등)으로 삼는 자들만이 그런 위험이 없다고 떠들어댄다. 하지만 예술가는 석고상처럼 굳어버린 그 같은 ‘대상적 세계’에 균열을 내고 생명을 흘러나오게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느냐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또한 이렇게도 말한다. “실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 이것은 나타난다. 그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진실로 음미할 가치가 충분한 말들이다. 세계가 무엇으로 구성되어있는지, 어떻게 작동되는지는 전혀 신비하지 않다. 오히려 눈앞에 세계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하나의 신비다. 그 ‘신비-세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즉 언어의 너머에 있는 목소리와 같은 것이다. 단지 그것은 나타나며, 그렇기에 신비스럽다. X표가 떨어진 사람들 사이에서 눈물을 흘리는 쇼야의 모습은 그가 자신의 세계의 폐쇄성을 인정하고 그 폐쇄세계를 넘어 타인과 함께 살아가기로 결심했음을 알려준다. 그러한 결심이 섰을 때 세계는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경이로운 신비로서 쇼야 앞에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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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ㅠ 참고로 제 교양철학 점수도 만만치 않습니다... | 18.12.26 22:0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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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ㅠ | 19.02.09 13:3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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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도 없는 긴 글 읽어주샤서 감사합니다!! 저도 다른 분들 글 읽을 때마다 종종 놀랍니다. 이렇게 볼 수도 있구나 하고요 ㅎ 애니메이션이라는 예술을 나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만 저 역시도 아직 멀었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 19.02.09 13:3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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