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애니 게시판이라 인랑을 타이틀에 넣었습니다만...애니판 인랑에 국한되지 않고 붉은 안경, 견랑 전설을 모두 포함한 케르베로스 사가 전체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볼까 합니다.
첫 작품인 붉은 안경은 자세한 설정이 잡히기 전의 물건인지라 배경이 근미래로 되어 있습니다만...
코믹스판 견랑전설이 나오면서 '60년대의 일본을 모델로 한 가상 역사'라는 설정이 정립되지요.
그리고 애니로 나온 인랑은 조금 특이한 포지션에 속하게 되는데...견랑전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견랑전설과는 양립할 수 없는 또다른 평행세계의 이야기가 되어버립니다.
비유하자면 마크로스 TV판과 극장판, 패트레이버 OVA판과 TV판의 관계 같은 거죠. 앞으로의 글은 일단 가장 기본이 되는 세계관-견랑전설을 중심으로 써보려고 합니다.
제가 케르베로스 사가를 처름 접한 건 90년대 초에 나온 해적판 견랑전설 1권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이걸 우리나라 배경으로 만들어도 괜찮겠다.'라는 생각을 계속 했었지요.(20여년이 지나서 실현되기는 했습니다만...쩝...그건 그거고요.)
일단 한국으로 배경을 옮기기 위해서는 등장하는 집단에 대한 약간의 분석이 필요하지요. 그 작업을 먼저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반정부 조직인 섹트가 등장합니다. 얘들의 모델이야 뭐 뻔하죠.
원작자인 오시이 마모루도 몸 담았던 학생운동 조직, 전학 공투 회의-통칭 전공투가 섹트의 모델이 되었지요.
당장 섹트라는 단어 자체가 전공투 내부의 각 파벌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니까요. 전공투의 섹트들은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각자 조직별로 통일된 헬멧을 쓰고 가두 투쟁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조직.
주인공이 속한 조직인 특기대는 무엇을 모델로 한 것일까요? 전공투와 싸우던 기동대?
그건 아니지요. 경찰 기동대는 극중에서 자치경으로 등장하니까요.
그렇다면 특기대는 특정한 모델 없이 그냥 만들어진 캐릭터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그 시절의 일본에는 특기대와 비슷한 길을 간 조직이 있었어요.
1. 시대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고 과격화됨.
2. 지나친 무장화를 추구하고, 같은 진영으로부터도 경원시됨.
3. 결국 가망 없는 무력 항쟁을 벌이다가 조직이 와해되고 도태됨.
위의 3가지는 견랑전설에 등장하는 특기대의 괴멸 과정입니다. 그리고 실제 역사에서 저 과정을 그대로 따라간 조직은 바로...
네, 바로 섹트의 모델이 된 전공투입니다.(뭔가 비쥬얼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전공투 출신이었던 오시이 마모루가 왜 투쟁 세력이 아닌 진압세력을 주인공으로 삼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차피 섹트나 특기대나 둘 다 전공투가 모델이었던 거죠. 오시이 마모루는 전공투를 둘로 쪼개서 하나는 특기대로, 하나는 섹트로 만든 겁니다. 역사적 사명을 마치고 도태되는 녀석들끼리 물고 뜯고 싸운 거죠.
견랑전설에 등장하는 특기대 대장 타츠미 시로는 도대체 어떻게 저 자리까지 올라갔나 신기할 정도로 앞뒤 꽉 막힌 고집불통의 꼴통인데요, 말기 전공투의 지도부가 딱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같은 편인 공안부가 특기대에 학을 떼는 것처럼 좌파 시민단체나 공산당도 전공투와 손절해 버렸고요. 민중의 지지? 그런 건 진작에 사라졌지요. 고도 성장으로 배부르고 등 따신 세상이 됐는데, 전공투는 여전히 무력 투쟁, 정부 전복 노선을 버리지 않았거든요.
그렇게 생각해보면 특기대 반란 사건은아사마 산장 사건을 모티브로 한 것일 지도 모릅니다. 처음부터 열세인 상황에서 가망 없는 무력 투쟁을 벌이다가 진압되고, 그것이 조직에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결정타가 됐으니까요.
어쩌면 케르베로스 사가는 오시이 마모루 나름대로의 전공투에 대한 진혼곡일 지도 모릅니다. 제사상에 맛있는 음식 올리는 것처럼, 감독 자신이 무지 좋아하는 강화복과 기관총으로 제사상을 장식해주고, 실제로는 찌질함의 끝을 보여주며 자멸한 전공투를 간지나는 특기대의 반란으로 화장시켜주는 진혼곡 말이지요.
물론 이건 전부 제 개인적인 추측입니다. 오시이 마모루는 전혀 다른 생각으로 만들었을 가능성도 크지요. 그냥 재미로 해본 추리입니다.
그러면...이제 케르베로스 사가를 한국으로 옮긴다면? 이라는 화두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보통 많은 사람들이 70년대나 80년대의 군부 독재시대를 모델로 한 가상 역사를 생각하는데...여기에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섹트는 모델인 전공투처럼 '실패한 조직'이라는 점입니다.
시대의 흐름도 파악하지 못하고, 민중이 무엇을 원하는가도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 멋대로 과격 투쟁을 벌이다가 고립되고 위기에 처한 조직-이게 섹트입니다. 하지만 우리 나라의 군부 독재 시절 민중 투쟁은 그렇지 않았지요.
70년대의 투쟁은 부마항쟁을 낳았고, 4공화국이 끝나는 계기를 만들게 됩니다.
80년대의 투쟁은 6월 항쟁이라는 절정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얻어내고, 5공화국을 끝장냅니다.
이렇듯 우리 나라의 70~80년대 반정부 투쟁은 '빨리 없어지는 게 사회에 도움이 되는' 섹트 투쟁과는 완전히 다른, 역사를 진보시키고 결실을 맺은 투쟁이었다는 거죠. 극중의 섹트를 그 시절 민주화운동과 연결시키는 건 목숨 걸고 싸우신 분들께 죄송한 일이 될 겁니다.
그렇다면 케르베로스 사가를 한국화하는 건 불가능한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케르베로스 사가와 비슷한 일이 벌어진 시기가 있었습니다. 반 정부 투쟁이 민중의 지지를 잃고 교조주의화, 과격화되며 민중의 지지에 자신이 있던 정부는 반 정부 운동에 대규모 공세를 가하면서 한편으로는 우파 내부의 과격파를 숙청하는, 견랑전설 같은 시대가요.
바로 이 아저씨 시대입니다.
(제가 견랑전설 해적판을 읽은 것도 이 시절...)
지금 기준으로 보면 민주화의 정도는 아직 한참 모자른 수준이었지만 당시를 살아가던 민중들 눈에는 엄청난 발전으로 보였습니다. 그들은 전두환 시대와 노태우 시대가 다르고, 노태우 시대와 김영삼 시대는 한층 더 다른 것을 체감하고 있었으니까요.
반면에 운동권 지도부는 큰 실책을 저질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노태우는 12.12 공범이고, 김영삼은 12.12.세력과 결탁한 배신자일 뿐이었으니까요. '노태우는 전두환과 다르고, 김영삼은 노태우와 다르다'고 생각하던 민중들과는 달리 '전부 다 똑같은 놈들'이라는 생각으로 정권 퇴출을 목표로 하는 80년대식 무력 투쟁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결국 지지율을 기반으로 기고만장해진 정부와 궁지에 몰려 눈에 뵈는 게 없는 운동권은 정면으로 충돌했고, 결국 연세대 사태를 기점으로 운동권은 전공투처럼 몰락하고 맙니다. 다만 전공투와는 달리 아사마 산장 사건 같은 짓은 안 저질렀으니 일본보다는 나은 것일 지도...
당시 정부는 과격진압을 하면서 각종 위법행위나 인권 유린, 언론 조작 등을 일삼았지만 운동권이 워낙 민중으로부터 인심을 잃어놓은 탓에 큰 이슈가 되지 못하고 묻혀버렸습니다. 당장 올림픽 이후로 이어진 고도 성장으로 배부르고 등따신 상황에서 정부 전복이라는 구호가 공감을 얻을 수가 없었지요.
(그것과 별개로 정부도 정신 나간 짓을 많이 했지요. 당시 야당이 경찰의 여학생 성추행을 문제삼자 여당 국회 의원이 "국회처럼 품위있는 곳에서 그런 추잡한 얘기를 논의할 수 없다."며 안건 상정을 반대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콧대가 하늘을 찌른 정부가 때려잡은 건 반정부 세력만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우파 내부의 강경파들도 때려잡기 시작했습니다.반 정부건 친 정부건, 좌파건 우파건 간에 위협이 될 만한 놈들은 다 때려부순 거죠. 케르베로스 사가의 일본 정부가 섹트와 특기대를 전부 적으로 삼은 것처럼요. 우파 내에서 "영삼님 충성충성, 할짝할짝."으로 노선을 변경하지 않은 민정계나 하나회는 "네가 누구 덕에 대통령이 됐는데!"를 외쳤지만 "내가 진리고 내가 정의다."를 신조로 하는 김영삼은 가차없이 칼자루를 휘둘렀지요. 케르베로스 사가와의 차이점은 반란 같은 거 없이 순삭당했다는 점.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케르베로스 사가의 배경을 한국으로 옮긴다면 가장 적합한 건 70~80년대가 아니라 90년대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만약 IMF사태가 조금 더 일찍 터져서 정권 교체때까지 시간이 더 걸렸다면 케르베로스 사가에 등장하는 사회혼란이 충분히 벌어졌을 가능성이 있지 않알까요?
뭐, 어디까지나 저 혼자의 망상입니다만...
쓸데없이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원작으로부터 30년만에 한국판 케르베로스 사가가 만들어진 것을 기념(?)해서 한 번 영양가 없는 글을 끄적여 봤습니다.
(그리고 전 그거 안 봤습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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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직접 경험한 사람이 사진을 하나하나 곁들여. 정성스레 쓴 글입니다. 작성자님의 노력에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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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론 액션신만으로 돈값은 했습니다. 막판 일기토는 사족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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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이 박정희, 전두환처럼 정권 잡아서 특기대 같은 조직을 만들어서 숙청 조직으로 이용하고. 섹터는 촛불혁명에 참가했다가 계엄군에게 희생된 이들의 가족이나 친구들로 설정해서 점점 과격해지는 것으로요. 마지막에는 섹터는 몰락. 특기대는 토사구팽에. 정권을 잡은 계엄군 세력만 웃는 결말이 좋을 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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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직접 경험한 사람이 사진을 하나하나 곁들여. 정성스레 쓴 글입니다. 작성자님의 노력에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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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저
개인적으론 액션신만으로 돈값은 했습니다. 막판 일기토는 사족이었지만 | 18.08.05 20:4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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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효주씬만 견디면 만사 오케이입니다. 일본판의 가벼운 갑옷과 대비되는 장갑복의 질량과 배우의 피지컬이 비교됩니다. 원작의 레퍼런스를 무시하지 못해서 생긴 무장의 괴리감은 이해하면 됩니다. <= 프리츠헬멧과 기관총(mg42: 여기서는 7.62밀리버전인 mg3) | 18.08.06 14: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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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션은 인랑인데 내용은 꼴랑이라 영화 끝날때쯤이면 드디어 관객들이 인낭 | 18.08.07 21:5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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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리웹-299339124
남북 통일 중이 아니라 남북 통일 후 낙오된 사람들을 그려내는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 18.08.07 22: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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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와사리
계엄군이 박정희, 전두환처럼 정권 잡아서 특기대 같은 조직을 만들어서 숙청 조직으로 이용하고. 섹터는 촛불혁명에 참가했다가 계엄군에게 희생된 이들의 가족이나 친구들로 설정해서 점점 과격해지는 것으로요. 마지막에는 섹터는 몰락. 특기대는 토사구팽에. 정권을 잡은 계엄군 세력만 웃는 결말이 좋을 거 같네요 | 18.08.06 00: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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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현실적이어서 무섭네요 | 18.08.06 09:09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