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입니다. 제 상황과 비슷해서이기도 하고 사실 분량이 짧아서 금방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친척한테서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집안에 틀어박혀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던 주인공은 공무원으로 임용되고 나서도 잘 적응하지 못하고 툭하면 히스테리를 일으킵니다. 스스로도 '자신은 병들었다'는 걸 인정합니다. 병원에 가려고 해도 의사가 자신을 치료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라고도 합니다. 지하에서 있기 싫다고 하면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다가도 자신은 남을 상처입히는 데에서 우월감과 기쁨을 느낀다며 모순적인 심리를 보입니다. 소설은 이런 주인공의 심리를 정말 집요하게 묘사합니다. 앞부분 몇십 페이지가 주인공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을 정도입니다.
'역내청'의 주인공 하치만도 남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있는 걸 좋아합니다. 물론 나중에 나아지긴 합니다만 기본적으로 남을 온전히 믿지는 않는 걸로 보입니다. 소설은 이런 주인공의 심리를 독백으로 지속적으로 나타냅니다.
실은 여기서부터가 본론인데요. 요즘 일본만화가 오덕들을 위한 리그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아싸들을 위한다고요. 그런데 제가 보기엔 오히려 그 반대인 거 같습니다. 아싸들을 '위하는 척'하기만 한다는 겁니다. 우선 아싸라고 다 방에만 틀어박혀 있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먹고 살아야 하니까' 최소한의 활동은 해야 합니다. '지하로부터의 수기'주인공도 공무원이었고 하치만도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 빼고는 멀쩡하게 활동합니다. 근데 요즘 일본만화를 보면 주인공이 아싸면 능력도 부족하고 인싸가 되어가는 과정에서의 심리묘사도 잘 나타내지 않습니다(연애물,하렘물이 특히 그렇습니다). 사람을 믿는 걸 너무 금방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마치 인싸들이 '아싸는 이러이러할 거야'라고 애초에 단정지은 거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싸를 묘사할 거면 심리묘사를 좀 늘렸으면 좋겠습니다. '지하로부터의 수기'처럼 망설임과 갈등을 집요하게 묘사하거나 아니면 '역내청'에서처럼 사람을 믿어가는 과정에서의 변화를요. 일개 독자인 제가 이런다고 뭔가 바뀌진 않겠지만요. 만화를 보면서 대리만족은커녕 허무함을 느끼는 이유를 생각하다 적게 됐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