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관은 여러 인형을 좋아하지만, 인형에게는 지휘관 하나뿐이다.'
스텐은 언제부턴가 이 말을 아침마다 되새기곤 했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그냥 어쩌다 보니 버릇이 돼버렸다.
매일 똑같은 임무만 반복한 부작용일까? 인간은 지겨움을 느끼면 기행을 벌인다는데 인형도 다를 바 없나보다.
어쨋든 스텐은 이불을 뒤집고 일어났다. 왜냐하면 벌써부터 기행이 시작되어서이다.
"큰일났어요, 스텐!"
히익.
스텐은 기겁을 하며 M14를 맞이했다. 파들파들 다리마저 떨자 M14가 신경질적이게 물었다.
"내가 무슨 귀신이라도 되나요? 뭘 그리 무서워해요."
"아니, 순간 M14의 목이 엄청 길어보여서요."
"말도 안돼는 소리말아요. 기껏 개장할텐데 재수없게시리."
M14는 거울을 보며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그 모습에 스텐도 같이 거울을 보았다.
그렇다. 오늘은 개장을 하는 날이다. 이벤트를 위해 결정된 개장.
기다리고 기다리던 끝에 스텐과 M14에게도 새로운 시간이 찾아왔다.
얼마나 이 날을 고대했는지 둘은 몰래 옷을 미리 입을 정도였다.
이전까지의 칙칙했던 - 물론 진심은 아니다 - 스킨은 이제 화사하고 세련되게 바뀌었다.
특히 M14는 고급스러운 코트가 마음에 드는지 흥얼거리며 몸을 이리저리 돌렸다.
그녀의 얼굴은 처음 지휘부에 왔을 때처럼 자신감에 휩싸여 있었다.
"이걸로 남은 건 지휘관을 붙잡는 것뿐이네요. 어서 가죠, 스텐!"
"하지만 벌써부터 가는게 맞을까요? 전 제대진형부터 꼬였다는 소리가 있던데."
"그러니까 가야죠! 지금이 아니면 언제 지휘관이 쓰겠어요!"
과연 일리가 있군. 스텐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휘관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벤트 때문인지 인형들은 아침부터 지휘관에게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자, 지휘관! 이번에야말로 날 데려가는거야!"
맨 처음 대쉬한 인형은 DSR이었다. 그녀는 능숙하게 단추를 풀며 지휘관에게 다가왔다.
그 기세에 지휘관이 입술을 떨며 DSR을 말렸다.
"아니, 넌 죽창이잖아! 거신은 여럿인데 누가 널 데리고 가겠어."
"그럼 침대에라도 데려가든가!"
"카리나! 카리나!!"
허나 막무가내로 돌격하던 DSR은 결국 카리나에게 끌려갔다.
M14는 그 모습에 '음, 안되겠군'이라며 벗었던 상의를 다시 입었다.
아무래도 똑같은 생각을 했었나 보다.
여튼 DSR이 퇴장하자 다른 인형이 도전에 나섰다.
그녀는 어디서 났는지 화려한 웨딩스킨을 입고서 요염하게 손을 내밀었다.
"지휘관, 손을."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여성스런 매력에 도도함을 더하니 지휘관이 자기도 모르게 다가왔다.
저런 방법이 있었다니! 스텐과 M14는 속이 쓰려 주먹을 쥐었다. 헌데 조금 이상하다.
그냥 잡으면 될 것을 웨딩옷 인형은 어째선지 마지막에 주저하고 있었다.
"손.. 손.. 손..."
급기야 그 인형은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고개마저 푹 숙였다.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한 것일까?
결국 지휘관이 먼저 손을 잡으러 다가갔다. 그 순간 인형은 참았던 감정을 폭발시켰다.
"손치워!!"
짝.
아, PK였구나. 스텐은 그 광경을 가자미눈으로 납득했다. PK는 자신의 행동에 화들짝 놀랐지만 배는 이미 떠난 후였다.
미안하다며 도망가는 지휘관을 보며 PK는 자신의 손을 다른 손으로 마구 때렸다. 이래서 부관대사가 중요하다.
예쁘기만 하면 뭐 하나. 며칠만에 저럴텐데. 뭐, 그건 그거대로 좋다는 지휘관도 있지만… 어쨌든 스텐은 자신의 대사를 되짚으며 다시 지휘관을 쫓았다.
그 후로 몇 기의 인형이 지휘관에게 왔는지 모른다.
Mk23은 '달링~'이라 부르며 팔짱을 꼈지만 딱 거기까지였고, G11은 베개를 들고 달라붙기만할뿐 진전이 없었다.
스텐과 M14는 꿋꿋이 자기차례를 기다렸다. 하지만 지휘부에는 워낙 인형이 많았기에 둘이 지휘관을 만났을 때는 저녁이 되고나서였다.
스텐은 쇼파에서 자고 있는 지휘관을 보았다. 얼마나 지쳤는지 흔들어도 일어나지를 못한다. 그걸 보고 있자니 쓸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언제나 이런 법이다. DSR처럼 달려들기엔 용기가 부족하다. 그렇다고 PK처럼 성숙한 매력도 스킨도 없다.
레벨이라도 높아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군수도 못가 잊혀졌을 것이다. 결국 개장도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일뿐이었다.
스텐은 먼산을 보듯 지휘관을 보았다. 그때 M14가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면 말이죠."
그리고 그녀는 스텐의 마음을 대변했다.
"그냥 주제에 맞게 사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송충이는 솔잎을 먹으라 하잖아요."
M14의 입가에 스텐의 미소가 지어졌다. 씁쓸하면서 만족감이 섞인 미묘한 웃음이었다.
그녀 또한 스텐처럼 초창기 멤버지만 지금은 만년 군수과장.
그래서 지금도 친구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둘은 같은 위치에 섰으면서 같은 사람을 좋아하니까.
"근데 그거 알아요? 지휘관이 반지를 샀대요!”
"정말요? 그럼 이따가 훔치러 가죠!"
그리고 둘은 장난을 치며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이었다.
스텐과 M14는 전날과 똑같은 광경을 보았다. 또다시 웨딩스킨을 입은 채 PK가 도도한 자세를 취해보였다.
사실 어제뿐만 아니라 그 전부터 쭉 이어져온 일이었다. 아마 자기들도 다를 바 없겠지.
스텐은 그리 생각하며 침을 삼켰다.
"지휘관. 손, 손을..."
덧붙여 말더듬는 것마저 똑같았다. 하지만 이번엔 지휘관은 다가오지 않았다.
이것이 PK의 매력이자 단점이다. 도도한 태도가 차가운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어제처럼 차이는 것은 싫은지 그는 보고서로 얼굴을 가린채 천천히 돌아갔다.
그때였다.
"손 내놓으라고!!"
PK는 난데없이 망나니처럼 그를 붙잡았다. 그리고 다른 인형들이 멍한 틈을 타 밖으로 달아났다.
놀라운 변화였다. 인형은 인간과 다르다. 그녀들은 태어날 때부터 첫 설정대로 움직이는 기계다.
갓 태어난 아기보다 훨씬 더 단순한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성장하듯 그녀들도 바뀔 수 있다. 만약 누군가가 키워준다면 말이다.
"너희도 이리와!"
어정쩡한 포즈로 끌려가는 와중 지휘관이 스텐의 손을 붙잡았다. 그 바람에 스텐을 잡고 있던 M14도 덩달아 끌려갔다.
둘 또한 어안이벙벙한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휘관이 먼저 말했다.
"개장은 다 끝냈지? 이번 제대엔 너희 둘도 넣을꺼야."
"그치만 전 RO랑 차이가 없다고 하는걸요. 아니, 오히려 안 좋다고도 하고요."
"그럼 RO를 안쓰면 되겠군!"
흠칫. 멀리서 RO가 지휘관을 노려보자 그는 고개를 돌렸다.
"어쨋든 짜고 싶은대로 짜고! 후회는 그 다음에!"
그러고서 남는 제대를 자기 멋대로 만들었다. 아니, 멋대로라고 했지만 다 어제 만났던 인형들이었다.
그러고보면 지휘관은 자신들을 버리지 않았다. 흔한 말로 애정충 비슷한 것이다. 성능도 결과도 상관않는 지휘조무사.
하지만 그것이 싫지는 않다. 누가 뭐래도 벌써 오래도록 함께한 지휘관이지 않는가.
"그렇다면야 지휘관. 이따가 겁내면 안돼요?"
스텐은 자신에게 입력된 대사로 대답을 대신했다.
지금 이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감정을 지휘관도 느끼고 있을까?
스텐은 웃음을 숨기며 더욱 손을 꼭 잡았다.
***
지휘관은 여러 인형을 좋아하지만, 인형에게는 지휘관 하나뿐이다.
스텐은 다시금 이 문장을 기억하며 아침을 맞이했다.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지휘부 정원은 이제 곧 눈맞을 준비를 한다.
그 뒤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스텐은 한겨울의 추위에 손에다 입김을 불었다.
지휘관은 떠났다. 문자 그대로 영원히 떠났다.
마지막으로 그가 나설 때 했던 말은 '질렸어'라고 한다. 하지만 인형들은 기다렸다. 언젠가 그가 변덕으로 다시 돌아오길 고대했다.
허나 세월이 흐른 뒤 전해진 소식은 그의 죽음이었다. 인간과 인형은 사는 시간도 방법도 다르다. 어찌보면 예견된 결과였으리라.
그날부로 지휘부는 좀 더 쓸쓸해졌다. 인형들은 차츰 전역하거나 다른 곳으로 떠났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이제 이곳을 좋아해줄 사람은 더 이상 없을테니까. 그리고 오늘 오래된 인형이 또 하나 떠나기로 했다.
"스텐....."
이제는 낡아버린 코트를 입은 채 M14는 스텐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스텐은 실망하지 않았다. 둘은 초창기부터 있었던만큼 말하지 않아도 잘 아니까.
"겨울에는 더 껴입도록 하세요. 마인드맵은 생각보다 추위에 약하니까요."
"네. 스텐도 건강히 지내세요."
건강하라니. 인형한테는 모순된 조언이다. 하지만 M14는 그렇게 표현하기로 했다.
그것이 지휘관이 바라던 M14였기 때문이다. 그를 만났던 때도 오늘처럼 추운 겨울이었다.
M14는 지휘부를 나서던 중 돌아서서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면 지휘관은 아마 오래전에 질렸을 거에요."
그녀는 그가 줬던 반지를 보았다. 낡았지만 여전히 소중한 물건이었다. 지휘관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기 싫어서 더 오래 버텼던 것이죠."
스텐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까 말했듯이 둘은 초창기부터 지휘관과 함께한 인형이다. 그래서 더 대답하기 싫었다.
M14가 떠났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그가 오지 않는 이상 아마 영원히 변치 않겠지. 그렇기에 떠난 것이리라.
스텐은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리고 그녀는 꿈을 꾸었다. 물론 인형은 꿈을 꾸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것을 꿈이라 표현했다.
꿈 속에서 그녀는 떠났던 많은 친구를 만났다. 그 안에는 지휘관도 당연 포함되어 있었다.
예전과는 달리 힘없이 휠체어에 앉아 먼산을 바라보는 지휘관. 스텐은 그에게 첫 설정대로 입력된 질문을 하였다.
"애인은 없습니까, 지휘관님?"
그 말에 지휘관은 피식 입고리를 올렸다.
"지금 옆에 있잖아."
오랫동안 기다려온 대답이었다. 하지만 살아있는 동안엔 들을 수 없는 대답이었다. 스텐은 그것을 끝으로 잠에서 일어났다.
머리에는 수북이 쌓인 눈이 지나간 시간을 알리고 있었다. 그녀는 눈덮인 지휘부를 보며 떠나기로 결심했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스텐은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걷고 걸어서 다리의 힘이 풀릴 무렵 그녀는 한 무덤가에 도착했다.
묘비는 지워지고 낙엽이 무수히 떨어진 더러운 묘지. 그곳에는 먼저 온 오래된 친구가 있었다.
"M14."
스텐은 묘비 옆에 앉아있는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감은 모습을 보니 잠을 자나 보다. 아, 그렇다. M14는 지휘관을 만나러 간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스텐보다 한발짝 빨랐으니까. 스텐은 느릿하게 웃으며 M14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옛날처럼 함께 손을 잡았다.
인형은 꿈을 꾸지 않는다. 꿈은 인간이 가진 망상. 인형에게 없는 특권이다.
그래서 스텐은 꿈을 꾸기로 했다. 언젠가 같은 꿈을 꿀 날이 오겠지. 그때가 오면 분명 행복할 것이다.
왜냐하면 꿈에서도 셋이서 함께일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