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가 기적소리를 낸다. 기차에 타기 위해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 피곤한 몸을 이끌고서 절망에 찬 표정의 사람들. 그토록 많은 사람이 몰려 들었음에도 활기는 없다. 오로지 절망과 어떻게든 탈출하고자 투쟁하는 아수라장 뿐. 기차가 차례차례 움직이며 사람들을 실어 나르지만 이 많은 사람들을 태우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이번에도 열차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은 속을 태우며 거대한 인파 속에서 옴짝달싹 못한채 기약 없이 기다린다. 그 와중에 견디지 못하고 결국 쓰러지는 노인들. 주저앉아 우는 아이들. 희망 없이 서 있는 어른들. 그리고 완전무장한 상태로 그들을 통제하는 군인들. 역사 방송에서 본 흑백필름의 풍경이 그대로 펼쳐져 있다.
똑같은 음악인데도 왠지 음울한 기차역의 음악소리가 흘러간다. 질리도록 본 그 풍경을 이제는 감상마저도 무뎌져버린 그 풍경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을 때 귀를 찢는 소음이 사방에 깔린다. 그 소리와 동시에 사방에서 비명이 튀어나온다.
귀를 찢는 사이렌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군인들이 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간다. 밖에는 건물들의 잔해 사이로 빼곡히 설치된 방공 화기들이 일제히 하늘을 향한다.
지평선 너머에서 점처럼 빛나고 미사일이 비처럼 쏟아내린다. 동시에 지상에서도 미사일과 대공포탄이 하늘을 가득 매울듯 날아갔다. 마치 이 공허한 평원을 수놓듯이 허공에서 수없이 빛나는 불꽃과 폭음. 그 때마다 몇의 생명이 사라지는가. 쏟아지는 미사일이 어디에 떨어지든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로지 모든 이가 이 순간만큼은 자신만을 지키기 위해 그 어떤 순간보다도 집중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모두의 머릿속에는 그것만이 있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대공포를 쏘던 중 빛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처럼 느꼈을 때, 분명 소리보다도 몇배는 빨라 눈으로 볼 수 없을 그것들이 슬로우 모션처럼 자신에게 천천히 날아오는 것처럼 느꼈을 때.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제서야 역사가 폭격에 이미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난 무엇을 생각했을까. 멍하니 서서, 먼저 죽은 이들을 부러워 했을까.
……모르겠다.
"……님. 소대장님!"
흔드는 느낌에 꿈에서 깨어났다. 급하게 깨어났는데도 눈조차 떠지지 않았다.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피로함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으으 x발…하고 중얼거리면서 다시 웅크린다.
"소대장님. 일어나셔야 합니다."
며칠을 못 잤는데 이놈은 어찌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떠지지도 않는 눈을 어거지로 뜨며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본다.
"소대장님.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본부에서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명령, 그래. 지금 우리가 여기서 이런 짓을 하고 있어야 하는 아주 뭣 같은 상황을 만들어낸게 명령이지. 잠에서 덜 깬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하는군.
"뭐래?"
"후퇴하라는 명령입니다."
지금껏 한 일들이 전부 무의미한 일이라는 뜻이다. 더더욱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7월의 뙤양볕 아래에서 군장을 챙긴 채 행군한다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다. 특히나 끝 없어 보이는 동유럽의 평원을 걸어가면서 온몸을 가리는 보호구와 외골격을 덕지덕지 붙인 채로 걸어간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기름칠이 덜 되어 삐걱거리는 것은 없었지만
심지어 주변에서 엄호해주는 일도 없이 언제 어디서 적군이, 혹은 괴물들이 튀어나올 지 알 수 없는 곳을 겨우 다섯명 남짓으로 지나간다면 더더욱 유쾌하지 않다.
대부분은 상황이 어찌 되었든 상관 없다는 듯 어딘가 영혼이 빠져나간 표정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일행 중에서 그나마 그는 아직 영혼을 붙잡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던 하나가 나한테 다가왔다.
"소대장님 어떻게 된 겁니까?"
어찌 된 것인지 그들에게 숨겨봐야 득 될 것도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현상에 대해 감춰야할 의무도 없었다. 들었던 얘기를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전황 불리. 러시아군이 비스와 강을 도하하였음. 바르샤바를 위협 중. 비스와 이동(以東)의 부대들은 각자 알아서 비스와 이서(以西)로 후퇴할 것."
말을 하자 부대원 전원이 실소를 흘린다. 사실 이 명령을 들었을 때는 나도 어이가 없었으니 이해 한다.
"이거 무슨 2차대전 때도 아니고. 이대로 가다가 러시아 애들이 베를린까지 밟는 거 아니랍니까?"
참으로 동감되는 얘기였다.
"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 그랬다간 우리 중에서 살아남을 사람이 하나라도 있을 거 같아?"
다른 하나가 그 얘기를 듣고서 그에 대해 반박하지만 나를 비롯해서 다른 이들은 그런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다른 부대원들은 괜히 더 힘을 빼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얘기에 대해 반박할 만한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겠지만. 그나마 기운이 나던 거 같던 그도 곧 정오의 햇볓에 질려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섯명이 안 되는 부대원들은 모두 한결 같은 침묵을 유지한채 그저 서쪽으로 서쪽으로 터벅 터벅 걸어갔다.
하늘에서 작렬하는 태양에 땅이 이글거린다. 주변에는 한 때는 번영했지만 지금은 잿더미만 남은 채 버려져 모래먼지에 덮여가는 도시들도 숱하게 보인다. 인세의 번영이란 이리도 빠르게 스러져 버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모든 것들이 과연 의미가 있는가. 그에 대한 의문이 머릿속을 맴돈다. 온 몸을 가린 첨단 방호복과 방독면으로 온 몸을 가린 채 무거운 몸을 외골격에 의지해 가며 걷는 첨단 기술의 집합체의 배경은 마치 세상이 멸망한 듯한 풍경이다. 이러한 괴리를 방독면 렌즈로 바라보며 뭐라 표현하면 좋을 지 고민하고 있었다.
저 멀리서 우호적이지 않은 듯한 사람의 형상을 발견하기까지는.
전방에 심상치 않은 것이 보이자 바로 손을 올리고 그 자리에 앉았다. 내 모습을 본 다른 부대원들도 사방을 주시하며 은폐한다.
사방은 별달리 숨을 곳도 없는 평야라는 것이 모두들 방독면에 가려서 표정이 보이지 않지만 초조함을 읽어낼 수 있었다. 육안으로는 사람의 형상이라는 것만 알 수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망원 조준경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다. 경우는 여러가지지만 만약 그것이 러시아군이라면 우리가 예상했던 것 중 최악의 사태인 것이다. 그 사태는 피하고 싶다. 방호복 안으로 식은 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조준경을 향한다. 배율은 24배율. 이 정도면 해당 인물의 눈동자까지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확대할 수 있다. 조준경으로 확인하면서 부디 저것이 러시아군이 아니기를 빈다. 아까도 말했듯이 러시아군이라면 우린 살아남기 힘들 테니까.
"뭡니까?"
긴장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어 온다. 저것의 정체가 무엇이냐에 따라 이 자리에 있는 다섯명의 운명이 갈린다. 망원조준경으로 그대로 저 인간 형태를 주시하며 말했다.
"E.L.I.D. A형 내지 B형이로군."
그 말과 동시에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ELID, 좀비라고도 부르는 이 시대의 붕괴액 피폭에 의해 만들어진 괴물들이지만 우리에게는 정말 다행스럽게도 그 숫자는 굉장히 적고, 현재 우리의 무장으로도 충분히 대응이 가능한 수준이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내가 지금 방아쇠를 당겨 14mm 고폭철갑탄을 급소에 박는다면 충분히 일격에 끝낼 수 있다. 서로간의 거리는 500m 미만. 탄낙차를 계산할 필요도 없다. 크로스헤어에 들어오는 모습을 주시한다. 한 때는 사람이었고, 지금도 사람으로서 존재할 수도 있는 저것의 고통을 끊어주는 것은 지금 내가 검지손가락을 당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됐어. 우회해서 지나가자. 주변에 러시아군이 있을 지도 몰라."
부대원들은 그러한 내 판단에 동의를 보낸다. 아직은 인간의 편린을 지니고 있을 지도 모르는, 따라서 스스로의 인격과 이성이 파괴 되어가는 그 상상 못할 고통을 끊어주는 것이 윤리적으로 나은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 안식을 주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전원이 고통에 던져질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다.
재빨리 저격소총을 수습하고 계속 움직이기로 결정한다. ELID 감염체를 우회하여 걸어간다. 그것이 다시 점점 시야에서 멀어져가 이윽고 사라져간다.
그것들은 분명 앞으로 점점 침식 되어가며 진행 되다가 결국 인간으로서의 형태마저 잃고 죽을 때까지 이 땅을 떠도는 추악한 괴물이 될 테지.
이 시대의 사람들은 그런 이들을 두고 스스로가 파괴 되어가는 고통이라 표현한다.
글쎄. 스스로가 파괴 되는 고통이란 무엇일까. 그런 것을 내가 상상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지금까지 한나절 동안 멍하니 걸어왔듯, 다시 무작정 서쪽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간다. 또다시 끝 없이 펼쳐지는 풍경들-끝 없는 평원, 숲, 흔적만 남은 도시-이 지나간다.
그와 함께 머릿속에서 방금 그것이 다시 떠올랐다.
ELID. 완전히 침식되고 말아 원래의 형태를 전혀 남기지 못한 채 결국 완전한 괴물이 되어 죽을 때까지 이 땅을 헤메여야 하는 추악한 괴물.
그리고 지금 걸어가는 나는 다를 수 있을까. 과연 나는 죽는 그 순간까지 이 삶과 죽음 중 죽음에 가까운 세상을 헤메이며 천천히 죽음에 침식 되어가는 게 아닐까. 지금 몸을 움직이는 '삶'이 완전히 사라지고 '죽음'에 먹혀, '나'가 '죽음'이 되는 그 순간까지. 붕괴액 피폭으로 결국 완전한 괴물로 변이 되는 것처럼.
계속 끝이 보이지 않는 동유럽의 평원을 걸어간다. 때는 한여름인 작렬하는 7월의 낮. 우리의 에너지를 빼앗는 햇빛은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지상을 달구고 있다. 문득 돌아봤을 때에는 계속 날 따라오고 있는 4명의 부하들만이 있다. 지나오면서 본 그 감염체는 이미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하고 다시 가던 길을 걷는다. 무작정 서쪽으로. 집결지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에는 끝이 없다. 그리고 이어져 있다.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구름을 따라 쭉 가면 어디로도 가지 못한 채 되돌아 올테지. 그렇다면 내가 발을 붙인 이 땅에는 끝이 있을까. 내가 가는 곳에는 그것이 무엇이든 끝이 있을까.
"정말 뜨겁군."
내 넋두리에 말 없던 부하들도 호응한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야속한 한여름의 길을 재촉한다. 단지 여기에는 끝이 있을까. 자문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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