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의자와 철제 책상뿐인 황량하기 그지없는 방에서 다음 인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녹음기의 배터리는 아직 충분했지만, 아까부터 볼펜에서 잉크가 잘 나오지 않는 게 신경 쓰였다.
나는 요즘 같은 시대에 뭐하러 손으로 적고 다니냐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가짐을 강조해왔었다. 형식적인 질문과 대답만을 주고받아선 진정한 인터뷰를 할 수 없다. 듣는 사람이 집중하는 태도를 보여주면 상대방에게 더 진솔하고 성의 있는 답변들을 받아낼 수 있단 걸 꼭 말해줘야 아는 걸까? 상대방이 인형이더라도 그들에게 감정이 있다면 이 원칙은 절대로 깨지지 않는다. 그리고 형식적인 건 재미가 더럽게 없는 법이다.
나는 수첩에 볼펜을 마구잡이로 그어보면서 지금까지 써온 내용을 정리해보았다. 이곳의 인형들은 대부분 발랄하고 근무에 성실했다. 시설은 잘 관리되어 있고 여태까지 주어진 임무들도 우수한 성적으로 끝마쳤다. 본사에서 나를 이곳으로 보냈을 때만 해도 그 이유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항상 문제를 찾아다니는 나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여기 지휘관의 인상이 귀신 같다는 점만 빼면 문제랄 게 없었다.
지휘관은 키는 나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데도 앙상하고 빼빼 말라서 성냥개비처럼 보였다. 제복은 단정하게 잘 차려입었지만, 옷이 그를 질질 끌고 다니는 것 같았다. 응접실로 가는 동안 내 쪽으로 늘어진 그림자마저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책상에서 그와 마주 본 뒤부턴 불쌍한 감정은 사라지고 무서운 인상만이 남았었다. 그의 눈에는 먹구름보다 진한 다크써클이 드리웠고 이마 한가운데엔 고속도로처럼 주름살 두 줄이 나란히 패여 있었다. 홀쭉 들어간 양쪽 볼과 메마른 입술엔 생기라곤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서 실제 나이보다 열 살은 더 먹은 것처럼 보였다. 수염이라도 길게 길렀으면 영락없는 거지꼴이었겠지만 다행히 면도는 깨끗하게 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인형들의 프로필을 받아보는 동안에 말없이 나를 지켜보기만 했었다. 양손으로 턱을 괸 채로 규칙적으로 눈을 깜빡거리던 얼굴이 오늘 잠자리에 튀어나올 것 같아서 무서웠다. 끔찍한 피로와 맞서 싸우면서도 관록을 잃지 않은 두 눈동자에서 내 마음을 비춰보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는 프로필을 옆구리에 끼고 지휘실을 서둘러 빠져나왔다. 그의 밑에서 일하는 상상을 해보니 등골이 오싹했지만 여기 인형들은 거기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다만 모두가 지휘관을 걱정해주고 있었다. 그들은 처음엔 나처럼 무서워했지만, 그가 일하는 모습을 보다 보면 불쌍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말해주었다.
자세한 사항들은 부관에게 물어볼 생각이었다. 인형들이 느낀 바를 한가운데에 있는 지휘관과 직선으로 연결해놓고 동그라미를 여러 번 그려서 강조해두었다. 노크 소리가 들리고 나서 부관이 들어왔다. 그녀는 깔끔한 메이드 복장과 어울리지 않게 묶지 않은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삐쳐 나와 있었다. 내게 가까이 올수록 인상을 잔뜩 찌푸려서 프로필에 나와 있는 이쁜 눈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화난 얼굴로 은쟁반을 들고 차분하게 걸어오는 걸 보고 있자니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내 앞에 찻잔을 내려놓는 동안에도 인상을 피질 않았다. 코로 올라오는 홍차 향은 향긋했지만, 이미 불편해진 뒤였다.
그녀는 내 맞은편에 앉고 나서 프로필과 같은 얼굴로 돌아왔다. 정신 사납게 삐쳐나온 머리만 빼면 곱상한 얼굴이었다. 그제야 프로필에 있던 지휘관의 문구가 떠올랐다. '심한 원시, 겉보기엔 엄청 화나 있음. 하지만 상냥하고 친절함.' 그렇다면 안경 좀 끼고 다닐 것이지.
G36은 양손을 가지런히 무릎 위에 올려두고 질문을 기다렸다. 그녀의 눈가에 번져 있는 잔주름이 지휘관의 것과 비슷하게 보였다. 홍차 맛은 향기 못지않게 기가 막혔다. 내 질문에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Q : 지휘관의 첫 상은 어땠는지.
첫인상이요? 당연히 무서웠죠. 지휘관님이 이곳에 처음 오셨을 땐 모두 그분이 환자인 줄 알았어요. 제가 공문을 받아보고 난 뒤엔 마음이 여린 몇몇 인형이 제 치마를 붙잡고 글썽거리기까지 했었죠. 그분이 지휘실에 들어가고 나서 모두에게 표정 관리 잘 하라고 신신당부를 해뒀어요. 챙겨온 짐이 얼마 없어서 방 정리는 금세 하셨어요. 저는 지금 내온 것과 똑같은 홍차를 갖고 가서 첫인사를 했죠. 그분은 인사 대신에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셨는데 그것마저 힘겨워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또 금세 지휘관이 바뀌어버릴 것 같아서 많이 불안했어요. 로비에서 모두 한 줄로 서서 사열을 받았는데 키가 어찌나 크시던지 제 동생마저 고개를 올리고 있느라 고생했어요. 지휘관님은 뒷짐을 지고 저희를 쭉 훑어보셨는데 저희 마음속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아서 바짝 긴장한 채로 있었어요.
나도 같은 시선을 느꼈다고 말해주었다.
당신도요? 인형에게나 사람에게나 지휘관님의 인상은 모두 똑같나 보네요. 아무튼, 그분은 차트를 전부 확인해보고 나서 처음으로 입을 여셨어요. 작지만 차분하고 근엄해서 어쩐지 믿음이 가는 목소리였죠. 우리가 자기를 어떻게 보는지 짐작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정말로 마음을 들춰본 것 같아서 흠칫했죠. 그런 다음에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을 테니 자기 모습이 못 미덥더라도 잘 믿고 따라와 주길 바란다고 하셨어요. 시계를 보면서 몇 마디 더 붙이다가 부관을 고르겠다고 하셔서 제가 나섰어요. 제가 경험이 많은 점도 있었지만 다른 인형은 보내두면 그분과 눈도 못 마주칠 것 같았거든요.
지휘관님은 저를 지휘실에 불러놓고 남은 짐을 마저 푸셨어요. 선반에 약병이 많았는데 척 보기에도 몸에만 쓰는 약은 아닌 것 같았어요. 서재엔 전술 교본이 빼곡히 꽂혀 있어서 적어도 지휘만은 믿을 만하겠다고 생각했었죠. 마지막으로 액자를 꺼내실 땐 굳은 얼굴로 골똘히 생각하시다가 코트 주머니에 넣어놓고 저를 뚫어지게 쳐다보셨어요.
Q : 액자엔 무슨 사진이 있었는지.
거기에 있는 사진에 관해선 나중에 대답할 때가 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서로 눈을 마주 보고 있는데 하마터면 식은땀을 흘릴 뻔했어요. 예, 숨이 턱턱 막혔죠. 저는 분위기를 풀어볼 겸 해서 기지와 관련된 서류들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알려드렸어요. 지휘관님은 제가 맡은 가사 업무와 전투 능력을 듣고 나서 좋은 부관을 두게 돼서 다행이라고 말씀하셨어요. 보기보다 인정 많은 분인 것 같아서 속으로 안도하고 있었죠. 그런데 대뜸 혼자선 잠들기가 어렵다면서 같이 잘 수 없겠냐고 물어보셨어요.
Q : 첫날부터 동침을 부탁했다고?
네, 정말로요. 저는 그때 잘못 들은 줄 알아서 그냥 멍하니 있었어요. 설령 첫눈에 반했다 하더라도 그건…좀 아니잖아요? 한 시간 같이 느껴지던 수 초가 지난 뒤에 다시 물어보셨는데 목소리에 장난기가 없었어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답니다. 평소의 저였다면 단박에 거절했을 텐데 그분 앞에선 그게 안 되더라고요. 나중에 취침 시간을 알려줄 테니 그때 침실로 찾아오라고 말씀하셨어요.
방에서 나온 다음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어요. 뒤늦게 엄청난 변태가 아닐까 싶은 걱정이 밀려왔죠. 누가 그 말만 듣고 정말 자기만 하는 걸 생각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그날 업무들은 되는 대로 처리해놓고 언제 거절할까 고민만 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지금 엉큼한 생각 하고 계신 건 아니겠죠?
지휘관님은 저와 함께 다니면서도 별 내색을 보이지 않으셨어요. 창고와 식당, 숙소를 둘러보는 동안 계속 붙어 다녔는데 저만 불안해하고 있었어요. 동생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땐 있는 그대로 털어놓고 싶었죠. 하지만 이런 일은 저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나중에 소문이 퍼지는 건 막지 못했죠. 그때보다 시간이 빨랐던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취침 시간에 지금 옷을 그대로 입고 지휘실 앞에서 기다렸어요.
Q : 그런 일들을 예상하고도 같이 잘 생각이었나?
물론 거절하고 싶었죠. 그런데 지휘관님의 얼굴이 오후 때보다 훨씬 지쳐 보이셔서 그럴 수가 없었어요. 결국, 입 한 번 뻥끗해보지도 못하고 지휘관님을 따라갔어요. 그분은 잠옷 차림으로 침실에 들어가면서 처음부터 무리한 부탁을 해서 미안하고 들어줘서 정말 고맙다고 말씀하셨는데 안도와 괴로움이 뒤섞인 것 같았어요. 침대가 세 명은 누울 수 있을 만큼 컸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잠버릇 때문에 그런 거였어요. 그땐 그걸 몰라서 옆자리에 눕는 동안에 가슴이 뛰는 걸 진정시켜야 했죠.
지휘관님은 침대에 눕고 나서 스탠드를 켜놓고 책을 읽으셨어요. 그렇게 이십 분 정도를 읽기만 하다가 스탠드 옆에 책을 내려놓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지셨어요. 숨도 안 쉬는 것 같아서 손가락을 코에 갖다 대봤는데 숨소리까지 작으셨어요. 믿기지 않겠지만 그게 다였어요. 혹시라도 나중에 일어나는 건 아닐까 싶어서 계속 자는 시늉만 했는데 아침까지 움직이지도 않으셨어요. 뜬 눈으로 참새 소리를 듣고 나서야 망상들을 떨쳐낼 수 있었죠.
제가 먼저 일어나서 창문을 열었어요. 지휘관님은 햇살을 받고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나더니 제게 화났냐고 물어보셨어요. 그때 피곤해서 눈을 찡그리고 있었거든요. 제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니까 덕분에 오래간만에 잘 잤다면서 처음으로 웃는 얼굴을 보여주셨어요. 아주 잠깐뿐이었지만요. 앞으로도 부탁한다는 말에 또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죠.
Q : 그 뒤에는?
숙소로 돌아가자마자 모두 제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봤어요. 동생까지 저처럼 잠 못 든 눈을 하고 있었죠. 아무 일도 없었다는 제 말을 아무도 믿지 않았어요. 하긴 저 같아도 거짓말인 줄 알았을 거예요. 동생만은 따로 불러서 제가 진짜로 무사하다는 걸 알려줘야 했어요. 음…이런 이야기만 계속해도 되나요?
나는 사소한 점 하나 빠짐없이 지휘관의 일상과 그녀가 느낀 바를 그대로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문제가 될 만한 부분들은 내가 알아서 빼놓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말뿐인 약속에 콧방귀를 뀌지만, 인형들은 믿어줄 수밖에 없었다. 여차하면 마인드 클라우드 맵을 뒤져보면 그만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론 기억만을 들춰볼 수 있을 뿐 그들이 느낀 감정까진 알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늘 약속을 지켜왔었다.
지휘관님은 둘째 날부터 완전히 업무에 빠지셨어요. 저희가 훈련받는 걸 지켜보면서 쉴 새 없이 메모하시고 냉철한 평가를 하셨죠. 그래도 성능에 따라 저희를 구분하진 않았어요. 훈련을 끝마쳤을 때 모두 나름대로 장점이 있다고 강조하셨거든요. 지휘실에서 훈련 성과를 분석하는 동안 한 명씩 불러서 길게는 두 시간씩 면담까지 하셨어요. 제가 점심과 저녁을 챙겨드린 뒤에도 취침 시간이 올 때까지 책상에서 꿈쩍도 하지 않으셨죠.
두 번째 잠자리는 그리 걱정되지 않았어요. 지휘관님은 하루 전과 똑같은 책을 읽다가 주무셨어요. 그땐 저도 한계가 와서 눈을 감자마자 잠들었는데 다시 눈을 떴을 때 지휘관님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Q : 잠버릇?
네, 잠꼬대였어요. 굉장히 괴로운 얼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시다가 몸을 뒤척이기도 하고 갑자기 허공에 대고 팔을 휘젓기도 했어요. 너무 졸려서 제가 꿈을 꾸는 줄 알았는데 그분이 벌떡 일어나는 걸 보고 나서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었어요. 저도 같이 일어나서 무슨 일이냐고 여쭤봤죠. 지휘관님은 제 얼굴을 보더니 알약을 삼키면서 잠깐 집인 줄 알았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때부터 그분의 속사정이 궁금해졌죠.
지휘관님은 잠들기 전보다 더 피곤한 얼굴을 하고도 전날과 똑같이 업무를 보셨어요. 첫 실전을 앞두고 많이 긴장하신 것 같았죠. 실전이라고 해봐야 평상시에 하던 정찰 임무뿐이었는데도 신중하게 투입될 멤버를 정해놓고 밤새도록 전술 지도를 분석하셨어요. 그래서 저도 덩달아 그날 내내 시중을 들었어요. 먼저 자러 가도 좋다고 말은 하셨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결국, 새벽녘에 한두 시간 눈만 붙였어요. 그동안에도 잠꼬대는 잊지 않으셨죠. 소파에서 계속 떨어지는 걸 보고 나서 왜 그렇게 큰 침대가 필요한 건지 알 수 있었어요.
Q : 임무 성과에 관하여.
그렇게 준비를 했는데 실패할 리가 없죠. 다음 임무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평가서를 봤다면 아시겠지만, 그분이 온 뒤부터 저희는 모든 임무를 완수했어요. 그것도 거의 다치지 않고요. 그럴수록 더 어려운 임무들이 쏟아져서 저도 잠을 잘 수가 없게 됐죠. 사실 전 부지런한 체질이 아니라서 한동안 적응하기가 어려웠어요.
Q : 잠버릇은 여전했는지.
지휘관님이 하루 식사를 전부 책상에서 해결한 날엔 잠꼬대가 더 심해지셨어요. 누군가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다가 손으로 머리를 싸매면서 일어나곤 하셨죠. 그때마다 제가 그분과 마주 보면서 여기가 집이 아니란 걸 상기시켜드렸어요. 가끔은 제 품에 안겨 소리 없이 흐느끼기도 하셨는데 눈물은 보이지도 않으셨어요. 어려운 작전을 완수한 다음엔 입에 털어 넣는 약도 그만큼 늘리셨죠.
Q : 계속 혼자서 시중을 들었나?
아뇨, 그랬다면 제가 버틸 수 없었겠죠. 지휘관님께 양해를 구해서 며칠에 한 번씩은 다른 인형을 침실에 보낼 수 있게 됐어요. 어린 외형의 인형이 침실에 오면 부담스러워 했지만 거절하진 않으셨어요. 그렇게 모두가 지휘관님의 잠꼬대를 알게 됐죠. 유독 심한 날엔 제가 돌봐드려야 했지만요.
Q : 인형들이 다쳤을 때 그랬나?
잘 알고 계시네요. 지휘관님은 제가 휴식을 권할 때마다 저희가 다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계획을 아무리 잘 짜도 아무도 다치지 않는 건 무리였어요. 지휘관님도 그 점은 잘 알고 계셨지만 저희가 크고 작은 상처를 달고 돌아올 때마다 괴로운 표정을 숨기지 않으셨어요. 헬리포트에서 저희 상처를 확인해보고 수복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셨죠. 그다음 날엔 작전 영상을 계속 돌려보면서 저희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엄하게 고쳐주셨어요.
물론 그분이 항상 엄격했던 건 아니에요. 임무가 없을 땐 숙소를 돌아다니면서 저희의 말에 귀 기울여 주셨거든요. 철없는 부탁이나 건의 사항도 그냥 넘기지 않으셨어요. 한 번은 누가 건의함에 놀이공원에 가보고 싶다고 써놨는데 심각한 얼굴로 절 보면서 어떤 곳이 좋겠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제가 나중에 범인을 찾아내서 꿀밤을 먹여놨죠.
저희의 기량이 향상되면서 다치는 일이 줄어들다 보니 웃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게 됐어요. 그분의 얼굴만 봐도 울먹이던 인형들이 먼저 칭찬을 받으려고 서로 경쟁까지 하더라고요.
주말엔 야외에서 제가 구워드린 소시지를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시면서 인형들이 뛰노는 걸 지켜보셨어요. 노는 중에도 칭찬할 만한 일이 생기면 기꺼이 머리를 쓰다듬어주셨죠. 그때도 어린 인형들을 상대하는 건 어려워하셨어요.
Q : 왜 그랬을까?
이제부터 차근차근 말씀드릴게요. 한 달 전에 대규모 철혈 소탕 작전이 있었어요. 보고서엔 가벼운 피해만 받았다고 적혀 있죠? 아뇨, 축소한 건 아니에요. 중파된 인형은 하나뿐이었어요.
지휘관님은 그 작전을 앞두고 어느 때보다 긴장하셨어요. 잠깐 눈도 붙이지 않으셔서 헬리포트로 마중을 나오셨을 땐 쓰러질 것처럼 보였어요. 다행히 지휘는 잘 해주셨어요. 철혈이 말도 못 하게 많았지만 계획을 잘 짜두셔서 저희 모두 당황하지 않고 싸울 수 있었죠. 하지만 부상을 피해갈 순 없었어요.
낡은 건물 벽을 무너뜨리고 들어가던 중에 P7이 부비트랩을 건드렸어요. 네, 그 말괄량이 꼬마 아가씨요. 팔 한 짝이 날아가는 중상을 입었죠. 저는 P7을 헬리포트에 보내놓고 작전을 마무리 지었어요. 전투가 너무 치열해서 지휘관님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도 하지 못했죠. 그리 걱정하진 않았어요. 무사히 돌아가기만 하면 팔다리 정도는 금세 수복할 수 있으니까요.
작전을 끝마치고 돌아오는 동안에 지휘관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어요. 그전에는 고생 많았다고 한마디라도 해주셨거든요. 헬리포트에 계시지도 않았고요. 그래서 수복실로 달려가 봤어요. 완전히 굳은 얼굴을 하고 서 계셨는데 정신없이 손을 떨면서 신음을 내셨어요.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수복이 끝날 때까지 그분 곁을 지키고 있었어요.
P7은 몇 시간 만에 다시 멀쩡한 팔을 달고 나왔어요. 평소대로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는데 지휘관님이 P7을 안더니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한참을 중얼거리셨어요. 그때만은 그 개구쟁이도 잔뜩 겁을 먹었죠. 저는 그분을 겨우 떼어놓고 침실로 모셔다드렸어요. 잠들기 전부터 약을 드셨는데 잠꼬대는 훨씬 더 심하게 해서 의사를 부르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그때마다 일어나서 괜찮다고 말씀하셨어요. 아침이 됐을 땐…무섭게 슬픈 얼굴을 하고 계셨어요. 그게 어떤 건지는 직접 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Q : 그때도 쉬지 않았나?
제가 말려도 소용이 없었어요. 억지로 몸을 끌고 다니면서 인형들이 모두 멀쩡한 걸 확인하고 해가 저물 때까지 지휘실에 남아계셨어요. 제가 저녁을 챙겨드릴 땐 아까 말씀드린 액자를 꺼내보시더라고요. P7이 잘 놀고 있다고 알려드리니까 그제야 표정을 좀 푸셨어요.
그날 밤엔 책도 읽지 않고 죽은 듯이 천장을 올려다보고 계셨어요. 제가 눈을 붙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동안 항상 피곤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하셨죠. 저는 그때 용기를 내서 그분의 속사정을 여쭤볼 수 있었어요.
G36의 시선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조금 전에 그녀에게 해둔 약속을 일깨워주고 내 무거운 입을 믿어달라고 말했다. 녹음기를 끄고 나서 이야기가 이어졌다.
지휘관님은…제복에서 그 액자를 꺼내오셨어요. 어린 시절에 찍은 사진이었는데 곁에 여자아이가 한 명 있었어요. 말하지 않아도 동생이란 걸 알 수 있었죠. 전쟁이 터지기 일주일 전에 찍은 거였대요. 전쟁 발발과 동시에 집이 폭격을 맞았는데 그때 부모님과 함께 죽었다고 말씀하셨어요. 지휘관님은 잔해 사이에 낀 덕분에 목숨을 건지셨지만 바로 옆자리에서 자던 동생은 사지가 박살 난 채로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대요. 그분은 구조될 때까지 움직이지도 못하고 시체를 계속 보고 계셨겠죠.
목이 쉴 때까지 비명을 지르고 몇 번이나 정신을 잃고 난 뒤에야 병실로 옮겨졌는데 혼자서 자고 있을 때마다 그날 일들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악몽을 꾸셨대요. 그 악몽이 지금까지 지휘관님을 괴롭히고 있는 거죠. 어린 인형들을 볼 때마다 늘 동생이 겹쳐 보이셨던 거예요. 지금도 그날 일이 어제 일어난 것처럼 느껴지신대요.
나중에 퇴원은 하셨지만, 몸만 멀쩡한 상태로 뭘 할 수 있겠어요? 악몽에 시달리면서 방황한 끝에 겨우 정신을 차리셨죠. 이런저런 일거리를 전전하면서 분쟁 지역을 찾아다니다가 군에 지원을 해봤는데 나이도 나이지만 정신 질환 때문에 딱지를 맞고 그리폰에 들어오셨대요. 그때도 거절당할 뻔했는데 실기 성적이 좋아서 간신히 통과할 수 있었다더라고요.
저는 이야기를 듣고만 있다가 그리폰에 들어오기 전에는…그러니까 제가 곁에 있어 드리기 전까진 어떻게 주무셨냐고 여쭤봤어요. 그전까진 북적거리는 곳을 찾아가거나 무엇이든 껴안고 주무셨대요. 그 말을 하면서 너무 고통스러워하셔서 제가 안아드려야 했어요.
Q : 그 상태로 왜 굳이 스스로 지휘관이 된 걸까?
저도 그 점이 제일 궁금했어요. 중간에 잠을 자고 일어나서 지휘관님이 제복으로 갈아입으실 때 전쟁터를 찾아다니는 동안 그날 일이 또 떠오르지 않았냐고, 맞다면 왜 굳이 이런 일을 찾아다니냐고 여쭤봤어요. 그분은 그런 끔찍한 고통을 다른 사람은 느끼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방황하는 동안 같은 처지의 아이들을 보고 나서 누구보다 그 고통을 잘 이해하는 자기가 나서서 평화를 가져다주고 싶었대요. 그리고 바깥세상엔 철혈보다 더 흉악한 괴물들이 판치는데 이 정도밖에 할 수 없다는 게 분하다고 하셨어요. 침실을 나선 뒤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업무를 보셨죠.
그날 오후에 제게 했던 말이 신경 쓰였는지 쓸데없이 고민만 털어놔서 미안하다고 하셨어요. 전 그렇지 않다고 말해드리고 싶었지만, 그땐 그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어요. 조만간 그런 기회가 다시 찾아왔으면 좋겠네요.
Q : 지금은 지휘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누구보다 약한 면모를 갖고 계신데도 끊임없이 노력하시니까요. 지휘관으로서도 흠잡을 데 없이 뛰어나고 성실한 데다가 인정도 많으시죠. 그 무서운 얼굴만 빼면 말이죠. 그래도 저희는 이제 지휘관님의 얼굴은 신경 쓰지 않고 있어요. 저만큼은 아니더라도 모두 그분의 마음속에 깃든 진심을 알고 있거든요. 요샌 부쩍 피곤해 보이시지만 좀 더 여유가 생기면 괜찮아지리라 믿고 있어요.
Q : 앞으로도 계속 지휘관 일을 할 수 있을까?
제 말을 듣고도 지휘관님이 못 미더우신 건가요? 그분은 절대로 스스로 꺾이지 않을 겁니다. 설령 이곳을 벗어나게 되더라도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찾아다닐 거예요. 만약 그리폰에서 지휘관님을 내쫓게 된다면…이런 말이 헬리안님 같은 분의 귀에 들어가면 노발대발하시겠지만, 저 또한 그분을 따라나설 거예요. 예전처럼 다시 주무시는 모습은 생각하기도 싫거든요.
물론 그런 일이 무리라는 건 저도 알고 있어요. 허가가 없다면 전 영원히 그리폰에 발이 묶여있겠죠.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반드시 그럴 거예요.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고요?
그분의 숭고한 의지가 꺾이지 않게 지켜드려야 하니까요. 그리고 그게 저희 같은 인형들이 만들어진 이유 아니겠어요?
나는 G36이 나가고 나서 태블릿 컴퓨터로 녹음기의 데이터들을 분류해놓고 수첩에서 그녀가 해주었던 개인적인 이야기를 적어둔 부분들을 찢어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지휘관과 G36의 배웅을 받으면서 기지 밖으로 걸어 나왔다. 지휘관은 여전히 무서운 얼굴이었고 G36은 내가 멀어지기 전까지 계속 인상을 찡그리고 다녔다. 그런데도 나와 악수를 하는 지휘관의 손끝에서 G36이 말했던 그만의 인정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차에 올라타면서 그들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다시 펴진 G36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언뜻 지휘관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끼리도 서로 믿을 수 없는 시대에 그만은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인연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들의 관계가 앞으로도 쭉 이어지리란 보장은 없지만 함께라면 어떤 역경이라도 꿋꿋하게 헤쳐나갈 것 같았다.
가방에서 보고서를 꺼내 마지막 장의 평가 항목을 넘겨보았다. 나는 빈칸에 '문제없음'이라고 적어두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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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도 2랩에...흠.... | 18.06.13 10:0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