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장에 매달린 야간등이 깜빡거렸다. 선풍기 바람을 타고 스카치위스키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퍼져 나갔다. 찜통 같은 더위에 술기운이 더해져서 그냥 드러눕고 싶었다. 그러나 내 눈앞에 있는 골칫거리를 해결하기 전까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술잔들을 의자 위에 올려놓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새로 꺼내온 위스키가 벌써 반이나 비어 있었다. 주변에 있는 어떤 술고래를 불러오더라도 내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그녀를 이기진 못할 것 같았다.
"지휘관…지휘관도 한 단 더 해요…."
HK416이 말했다. 혀 꼬부라진 목소리는 이제 익숙해져서 뭐라고 하는지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다. 헝클어진 은발 머리카락이 가슴 위를 덮고 있었다. 그녀의 정신 상태를 대변해주듯 머리 끄트머리에 걸쳐진 베레모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양쪽 볼에는 눈 밑에 새겨놓은 눈물 모양의 문신처럼 홍조를 띠고 최면에 걸린 듯한 눈빛으로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웃옷의 옷깃 사이에서 김이라도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 그녀는 이미 비워진 지 오래인 커다란 사케 병을 품 안에 꼭 끌어안고 있었는데 입에서는 사과 향이 섞인 달콤한 벌꿀 냄새가 났다. 나는 그녀의 손에 들린 물잔을 내려놓고 빈 병들을 살펴보았다. 내가 잠깐 정신을 놓은 사이에 그녀만의 뷔페를 벌인 모양이었다.
"지휘관…아직은 안 대요."
HK416이 말했다. 그녀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내 목을 끌어안고 버둥거렸다. 손을 머리 위로 뻗어봤지만 무시무시한 집착을 피할 순 없었다. 그녀는 나를 드러눕히고 정성스럽게 손가락을 풀어가며 물잔을 되찾았다. 웃옷 너머의 감촉을 통해 그녀의 몸이 지금 얼마나 뜨거운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바로 코앞에서 맡은 입 냄새가 토할 것 같이 지독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변기 앞에 데려다 놓고 싶었다. 노란색과 분홍색 얼룩으로 물들인 방바닥을 보는 건 남자끼리의 술자리면 충분했다.
그녀는 물잔을 다시 치켜들면서 빈 병을 이것저것 집어 들었다. 빈 병임이 확인되면 볼링공처럼 병을 방 끝으로 굴려 보냈다. 나는 그녀가 병을 깨뜨리기 전에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위스키를 건네주었다. 그녀의 눈이 핑핑 돌고 있었다. 눈에 비치는 모든 게 두 개에서 세 개로 보이겠지. 그런데도 술병은 용케 낚아채며 실실 웃고 있었다. UMP45의 경고를 무시했던 게 후회되었다.
나는 두 시간 전에 HK416과 그녀의 소대원들을 모아놨었다. 굉장히 까다로웠던 작전을 별 탈 없이 처리해줘서 그녀들에게 한턱 쏠 생각이었다. G11은 언제나처럼 잠에 푹 빠져 있었고 UMP9와 HK416은 책상 위에 나란히 늘어선 술병과 짭짤한 안주들을 반기는 눈치였다. 그녀들 중에 가장 주량이 많을 것 같은 UMP45만은 얼굴이 굳어 있었다. 그녀는 방구석으로 나를 끌고 갔다.
"지휘관, 왜 저한테 미리 말해놓지 않은 거예요?"
"그럼 재미가 없잖아. 예고 없이 접하는 술이 더 달달하다고."
내가 말했다.
"저거 다 마실 생각이에요?"
"아니, 그냥 다양하게 마셔보려고 꺼내본 것뿐이야. 넷이서 저걸 어떻게 다 마시겠어?"
G11은 자고 있을 게 뻔하니 계산에서 제외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UMP45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416이라면 충분히 가능해요."
"설마…."
"뭐,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으시다면 말리진 않겠어요. 하지만 책임은 지휘관님 혼자 지셔야 해요."
그녀는 내게 주의를 줘놓고 소대원들에게 돌아갔다. 나는 그녀의 말을 반신반의하면서 도수가 낮은 술부터 집어 들고 HK416부터 차례대로 술잔을 채워주었다. 예상대로 G11은 방 한구석에 틀어박혀 총을 부둥켜안고 있었다.
"이거 향이 참 좋네요."
HK416이 말했다. 그녀는 양손으로 잔을 받쳐 들고 술을 조금씩 음미하고 있었다. 정작 더 화끈하게 마시는 건 UMP 자매 쪽이었다.
"오늘 마음껏 달려도 되는 거지, 지휘관?"
UMP9가 술잔을 치켜들면서 물었다. UMP45가 곁에서 동생의 잔을 채워주고 있었다.
"당연하지. 내일 너희 스케줄은 하나도 없으니까 얼마든지 마셔도 돼."
UMP45가 내 말을 듣고 기분 나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를 흘깃거리는 눈빛이 '감당할 수 있겠어요?'하고 묻는 것 같았다. 그때까지 HK416은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나는 그녀와 마주 보고 앉아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적당히 즐겼다 싶으면 다른 병을 들고 와서 이미 쓰고 있던 잔에 그대로 들이부었다. 그녀는 그동안 잘해줘서 고맙다는 내 칭찬에 가볍게 웃어 보이면서 앞으로도 자기만 믿어달라며 호언장담을 늘어놓았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가 취하는 모습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얼굴이 달아오른 것도 내가 먼저였다. 목 넘김이 부드러워지면서 습관처럼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한동안 HK416의 차분한 목소리엔 변함이 없었다. UMP9는 내 기대와 달리 일찌감치 의자에 기대어 뻗어버렸다. UMP45는 가끔 내 쪽으로 잔을 내밀면서 처음과 같은 속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우리가 잔을 비우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지만, 그때는 알아채지 못했다.
G11의 코 고는 소리가 커질 무렵 HK416이 책상이 흔들릴 정도로 잔을 세게 내려놓았다.
"지휘관! 얼른 따라주지 않고 뭐해요?"
HK416이 나보다 더 얼굴을 붉힌 채로 으르렁거렸다. 작전 중에만 나오는 사나운 목소리였다. 나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아채고 UMP45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는 술잔을 흔들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음주를 멈추지 않았다. 자랑이라기엔 뭐하지만, 주정뱅이를 상대하는 일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머리가 아플 때 보드카에 아스피린을 섞어 마시는 정신 나간 녀석과도 술자리를 여러 번 가져봤던 터라 토사물만 없다면 여자 한 명쯤은 혼자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성의 목소리가 그녀가 진짜 사람이 아니라고 속삭여줬지만 한 귀로 흘려듣고 말았다. 샛노랗고 진하고 투명한 술병들이 빨리 열어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듯했다. 나는 원 없이 병뚜껑을 땄다.
HK416은 잔을 비울 때마다 탄성을 내지르면서 의자 뒤로 넘어갈 듯이 비틀거렸다. 잔을 내려놓고 항복을 선언할 것 같다가도 눈을 부릅뜨고 내게 잔을 내밀었다. 나는 부글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면서 계속 그녀의 잔만 채워주었다. 얌전히 뻗으면 숙소에 업어다 줄 계획이었는데 자꾸 아슬아슬하게 버티고만 있어서 따라주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UMP45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이성의 줄다리기를 느긋하게 지켜보았다. HK416의 목소리가 한결 누그러지면서 그녀답지 않게 우는 소리가 나왔다.
"분명히 제가 더 나은데 어째서 채용되지 않았던 걸까요, 지휘관?"
그녀의 총에 얽힌 복잡한 과거사였다. 내 앞에선 꺼내본 적 없는 주제였지만 UMP45는 익숙한 듯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HK416은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미간에 주름이 없어서 그 모습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지휘관! 제 말 듣고 계신 거예요?"
그녀는 고장 난 라디오처럼 말끝을 흐리고 있었다.
"416, 지휘관은 그만 괴롭히는 게 어때?" UMP45가 HK416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면서 말했다. "지금까지 관리해오던 이미지를 싹 다 망쳐버릴 셈이야?"
"시끄러, 이 빨래판 같은 년아."
HK416이 그녀의 손을 밀쳐내면서 소리쳤다. 나는 비몽사몽한 와중에도 한순간이나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소름이 돋으면서 등줄기에서 쏟아지던 땀 줄기가 말라붙었다. 나는 눈만 움직여서 UMP45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미소 띤 얼굴은 여전했지만, 초점 없는 눈동자에서 진심 어린 살의를 느낄 수 있었다. HK416의 거친 숨소리만이 정적을 채워주었다. G11이 코 고는 걸 멈추고 몸을 떨면서 일어났다. 때아닌 한기를 느낀 모양이었다.
"지휘관, 아직 안 끝났어…?"
G11이 물었다. UMP45가 빙그레 미소 띤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니, 이제 숙소로 가면 돼. 먼저 가 있을래?"
"으…응, 알았어." G11도 분위기를 알아채고 UMP45의 말을 고분고분 따랐다.
"지휘관, 전 분명히 혼자 책임지셔야 한다고 말했어요."
UMP45가 동생을 부축해 주면서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데려다 놓을게."
"걱정이라뇨. 그 년 그냥 콱 죽여버리세요."
장난 같지가 않아서 더 무섭게 들리는 말이었다. 그녀는 HK416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방을 떠나버렸다. 나는 그때부터 HK416과 단둘이 남아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술병을 곧장 빼앗지 않은 건 나도 너무 무리했던 탓이었다. 술 냄새가 그토록 역겹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도대체 저게 다 어디로 넘어가는 건지…."
"지금 뭐라고 해써요, 지휘관?"
그녀는 인사불성인 와중에도 내가 중얼거리는 것마저 놓치지 않았다.
"너 참 많이 마신다고."
"네? 저 얼마 안 마셔써요."
"그럼 말부터 똑바로 해볼래?"
"저 아직 안 취해써요."
그녀는 술 취한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들을 지껄이면서 책상에 고개를 파묻었다. 이제 끝났나 싶었지만, 손은 여전히 술병을 더듬고 있었다. 나는 간신히 정신을 바로잡고 대책을 궁리했다. 자꾸 생각이 뚝뚝 끊어져서 내가 먼저 쓰러져버릴 것 같았다. 주정뱅이에게 찬물보다 좋은 특효약은 없었다. 제아무리 술에 찌든 사람이라도 찬물을 가득 채워 넣은 욕조 안에서 해수욕을 시켜주면 금세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토하거나 정신을 잃지도 않은 그녀에게 그런 극약처방을 내리고 싶진 않았다.
나는 시원한 공기가 들어오도록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뒷주머니에 처박혀 쭈글쭈글해진 담뱃갑을 꺼내 들었다. 가장자리가 금색으로 밝게 빛나는 구름 사이로 별빛들이 고무줄처럼 늘어났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머릿속의 모든 것이 그녀의 눈처럼 핑핑 돌고 땅은 보이지도 않는 밑바닥 속에 주저앉은 것 같이 느껴졌다. 길게 내뿜은 푸르스름한 담배 연기가 술기운을 타고 몸속을 훑고 다녔다.
"지휘관, 아직 이써요?"
그녀가 소리쳤다. 한쪽 눈을 감고 반대쪽 입가로는 알코올이 섞인 침을 흘리면서 겨우 고개만 올려놓고 있었다. 그래도 더위는 느끼는지 웃옷의 단추를 풀고 셔츠의 앞섶을 펼쳐 보였다. 옷으로 꽁꽁 싸매고 있던 가슴 윤곽이 살짝 드러났다.
'한 잔만 더 먹이면 뻗어버릴 것 같은데….' 또다시 위험한 착각이 들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나도 같이 뻗어버리고…. 여기서 하룻밤 보내도 별일 있겠어?'
두 번째로 들이마신 담배 연기가 아니었다면 정말 생각대로 움직일 뻔했다. 필름이 완전히 끊어진 뒤에 벌어지는 일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법이었다. 나는 찢어진 팬티만 입은 채로 가로수의 나뭇가지 위에 매달려 있던 친구의 꼴사나운 모습을 떠올리며 자리로 돌아왔다. 나만은 절대 그렇게 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게 불과 몇 달 전이었다.
"지휘관, 제 말 좀 들어주세요."
그녀가 나를 향해 한쪽 팔을 휘저으면서 말했다. 말동무라도 해주면 술 마시는 걸 멈추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녀와 마주 보면서 술병을 옆으로 밀어냈다. 그녀는 내게서 눈을 떼지도 않고 귀신같이 술병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았다.
"정말이지…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어요…."
다행히 말은 똑바로 하고 있었다.
"뭐가 그리 싫다는 거야?"
"전부…마음에 안 든다고요!"
나는 HK416이 집어 들려던 물잔을 책상 밑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멀쩡한 정신이었다면 상상도 못 했을 애처로운 눈빛을 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아기 손에서 딸랑이라도 빼앗은 기분이었다.
"돌려주세요, 지휘관…."
"뭐가 문젠지 말하기 전까진 안 돼."
"한 잔만, 딱 한 잔만 마시면서 얘기할게요."
케케묵은 석고 빛으로 변한 얼굴색 때문에 설득력이 없었다. 그녀는 한껏 토라진 얼굴로 딸꾹질을 하면서 허공을 응시했다.
"됐어요, 어차피 말해봤자 해결해주지도 않으실 거면서…."
"내가 그렇게 못 미덥냐?"
"저한테 관심이 있었으면…히끅…먼저 물어보셨을 걸요."
"임무가 힘들어?"
그녀는 내 얼굴에 검지를 들이밀고 천천히 가로저었다. 그녀는 작전이나 임무에 관해 언급하기만 해도 눈매가 금세 날카로워지곤 했는데 지금은 멍한 눈빛으로 입술을 오므리고 있어서 순한 고양이처럼 보였다.
"그 정도는 저 혼자서도 충분하다고요."
"그럼 소대원이 불만이야?"
그녀의 얼굴이 오묘하게 일그러졌다.
"마음에 안 들지만 그뿐이에요. 임무 땐 그래도 다들 그럭저럭 쓸만하니까요. 그 빌어먹을 잠탱이 녀석만 정신 좀 똑바로 차렸으면 좋겠는데…."
누가 누구더러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건지. 손거울이라도 있었으면 HK416의 얼굴을 비춰주고 싶었다.
"아직도 예전 일이 신경 쓰이는 거야?"
나는 UMP45와 마찬가지로 공란으로 처리되어 있던 그녀의 행적들을 떠올리며 물었다. 이전의 개인 면담에선 그녀의 진중한 분위기 때문에 직접 물어볼 수가 없었다. 나중에 본부 자료를 열람해보고 나서 그녀의 입을 통해선 절대로 듣지 못할 내용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물어본 건 그녀의 태도에 지휘관으로서의 의무감이 들어서였다. 술김에도 고민을 털어놓지 못할 만큼 못 미더운 지휘관이어서야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가장 예민한 사항인데도 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런 것들은 조만간 다 제 손으로 처리할 수 있어요. 두고 보시라고요…."
다행히 내가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지금 털어놓은 대로라면 이 엄청난 주량만 빼면 그녀에게 문제 될 만한 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취중면담을 그만두고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내려놓았다. 재떨이에 조준을 잘못해서 꽁초를 짓이기다가 손등에 불똥이 튀었다.
"더 안 물어봐요…?"
HK416이 술병을 내려놓고 일어나면서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잘 지내고 있다는데 내가 뭘 더 물어보겠어?"
"실망이에요! 아직 제일 큰 고민거리가 남아 있는데…."
"힌트도 안 주면 알아낼 수가 없잖아."
내가 입술을 삐죽이면서 말했다.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지끈거려서 HK416이 내 쪽으로 다가오는 걸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나는 시원한 물 한 잔만을 떠올리면서 의자의 팔걸이에 손을 대고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녀가 내 어깨를 밀면서 다시 의자에 앉혀놓았다.
"그건 바로 당신이라고요, 지휘관."
그녀가 말했다. 술 냄새에 묻어나오는 목소리가 어쩐지 감미롭게 들렸다. 목소리에 정신이 팔린 동안 새빨간 그녀의 얼굴이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416, 지금 너무 취한 것 같은데…."
"저 멀쩡하다니까요? 지휘관, 평소에 저 어떻게 생각하고 계셨어요?"
그녀가 물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건 도도한 욕쟁이였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고민을 해볼 틈도 없었다. HK416은 내 가슴팍에 한쪽 볼을 파묻고 비벼대면서 쌕쌕거렸다. 심장이 가쁘게 뛰어대서 그녀를 떼어내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제 마음을 알아주실 거에요? 오늘만 해도 제가 지휘관님 눈에 들려고 얼마나 바쁘게 움직였는데요."
정말 그러려고 활약했던 걸까? 눈앞과 마찬가지로 내 이성도 갈피를 못 잡고 방황했다. 그녀와 얼굴을 마주 보는 동안 갖가지 과일 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내 볼을 향해 늘어진 그녀의 머리카락이 부드러웠다. 단추 풀린 셔츠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살갗이 생선 배처럼 새하얬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면서도 은근히 그다음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눈이 서서히 감기고 있었다. 다시 독한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러니까…앞으로는 저만…."
본능적인 위기감이 들이닥쳤다. 나는 서둘러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흔들어서 깨워야 할지 아니면 그냥 밀쳐내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그녀가 알아서 의자 뒤로 뻗어버렸다. 나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쳐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사랑스럽게 느껴지더라도 코앞에서 구역질을 받아낼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숨죽이고 누워있다가 3초에 한 번씩 가슴을 들썩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고개를 내젓고 일어나 담배 하나를 더 꺼냈다.
나는 HK416을 등에 업고 지휘실을 나섰다. 원래 계획대로였지만 아쉬운 마음을 달래주지는 못했다. 그녀의 쌔근거리는 숨소리가 고요한 복도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야간등이라지만 지끈거리는 머리로 불빛 아래에서 걷고 있으려니 죽을 맛이었다. 바짝 마른 입안에 고인 침에서 쓴맛이 묻어나왔다. 나는 화장실 앞에서 잠깐 멈춰 섰다가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흔해 빠진 술자리 소동이었을 뿐이야.'
휘청거리는 발걸음을 바로잡아가며 생각했다. 그녀에게 거부감이 든 건 아니었다. 하지만 취했을 때 내뱉은 말들을 전부 믿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날이 밝는 대로 그녀의 도도한 태도를 다시 보게 될 가능성이 컸다. 꽁꽁 싸맨 옷차림도 그대로일 게 뻔했다. 다음 임무에서도 그녀에게 못마땅한 소대원들과 마찬가지로 내 기대를 충족시켜줄 게 분명했다. 이전과 달라진 건 없었다. 거나하게 술을 들이켰을 뿐이니 오늘 남은 미련들은 숙취와 함께 털어내면 그만이었다.
숙소 앞에서 UMP9가 요란스럽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여는 동안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UMP45였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로 벽에 걸린 거울 앞에 기대서서 나를 쳐다보았다.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내 물음에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그냥 잠이 안 왔을 뿐이에요. 죽지 않은 게 아쉽네요."
"술김에 그런 건대 좀 봐주지그래?"
"지휘관님 같으면 봐줄 수 있겠어요?"
"아니."
숱하게 겪어온 진상들이 떠올라서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HK416을 침대에 눕혀놓고 허리를 풀어주었다. 숙소도 덥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웃옷에 풀린 단추들을 다시 잠가주었다. 그녀의 무방비한 모습들을 하루빨리 잊어버릴 필요가 있었다. UMP45는 내가 나가지 전까지 가만히 있다가 픽하고 웃어 보였다.
"꽤나 좋은 시간 보내셨나 보네요, 지휘관."
"좋을 리가 없잖아."
"아침에 그 옷 그대로 입고 416 앞에서 말해보지 그래요?"
나는 내 셔츠를 내려다보았다. 반쪽만 찍힌 옅은 입술 자국들이 침을 따라 번져 있었다. 술기운이 다시 올라오는 듯했다.
"그냥 작은 사고였을 뿐이야. 오해는 말아줘."
퍽이나 믿음직한 말이었다. UMP45의 입꼬리가 더욱 올라갔다.
"그건 믿을 수 있겠어요?"
나는 대답을 하지 않고 빠져나왔다.
아침 햇볕을 받자마자 비명부터 지르고 보았다. 머릿속에서 킹콩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나는 있는 힘껏 커튼을 잡아당기면서 뒷주머니를 뒤적였다. 부관에게 들키면 무슨 소리를 들을지 알고 있었지만 담배라도 물고 있지 않으면 온종일 누워있어야 할 것 같았다. 내 나이를 탓할 필요는 없었다. 어느 모로 보나 끝장나게 좋은 HK416의 주량 때문이었으니까.
눈앞은 멀쩡해서 관자놀이를 주먹으로 쥐어박아 가며 씻을 수 있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붓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양치질을 한 뒤에도 비릿한 술 냄새는 여전해서 찝찝함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간밤에 보았던 HK416의 여리고 도발적인 모습들도 잊히지 않았다. 머리를 한 번이라도 더 흔들었다간 다른 생각도 영영 못 하게 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나는 지휘실로 가기 전에 HK416의 숙소 방향의 복도를 기웃거렸다. 다른 인형들이 내게 인사를 건넸다가 하나같이 눈을 접시만 하게 뜨고 지나갔다. 내 몰골이 얼마나 추레하게 보일지 짐작할 수 있었다.
"뭐 하고 있어, 지휘관?"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UMP9가 물었다. 그녀의 곁에 있던 UMP45는 내 얼굴을 보고 UMP9의 팔목을 잡아끌었다.
"언니, 왜 그래?"
"작은 사고를 수습하러 오신 거니까 우린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녀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어제와 똑같이 웃으면서 말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416의 상태는 어때?"
"곧 나올 테니까 직접 확인해보시면 될 거에요."
"알았어. 제발 쓸데없는 소리만 하고 다니지 마."
UMP45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면서 떠나갔다. 내가 그녀의 뒷모습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동안 숙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HK416이 평소대로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나왔다. 내 볼을 간지럽히던 윤기 나는 머리카락과 각이 잘 잡힌 베레모도 그대로였다. 그녀에게만은 술기운이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구경하던 사람은 완전히 녹초로 만들어놓고 말이지.'
보면 볼수록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HK416은 창밖을 내다보면서 천천히 걸어왔다. 그녀는 복도 끄트머리에 있는 나를 보고 흠칫했다. 어제 일이 떠올랐던 걸까? 그녀가 다시 걷기 시작하면서 부질없는 기대도 사라졌다.
"좋은 아침이에요, 지휘관."
그녀가 말했다.
"그래, 보아하니 상태는 괜찮나 보네."
"네, 어제 저 때문에 고생 좀 하신 것 같네요. 죄송해요."
"아니, 네 술버릇을 몰랐던 내 잘못이지. 미안해할 필요 없어. 그래도 다음부턴 필름 끊어지지 않게 조심하는 게 좋겠어."
나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주고 지휘실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변하지 않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머릿속에서 희비가 교차했다. 나는 짧은 고민 끝에 좋은 일이라고 판단했다. 진심 없는 기억들이 남아있으면 서로 불편해질 뿐일 테니까.
몇 걸음 떼기도 전에 HK416이 내 등 뒤에 다가왔다. 그녀는 까치발을 선 채로 내 고개를 양손으로 붙들고 자기 쪽으로 돌려놓았다. 그러곤 어제 하지 못했던 일을 마무리했다. 술 냄새는 나지 않았다. 체리처럼 부드럽고 진한 달콤함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내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서 있는 동안 HK416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멀쩡하다고 했잖아요, 지휘관."
그녀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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